인천보감(人天寶鑑)
무외 구(無畏久)법사는 여조(餘姚)사람이다. 혜각 벽(慧覺壁)스님에게 귀의하여 종지를 얻고 훗날 두루 선법회를 찾아다니며 공부하였다. 언젠가는 경산(徑山) 불일(佛日 ; 大慧)선사의 방장실에 간 적이 있었다. 불일선사는 밤에 앉을 때면 반드시 법사를 불러 천태(天台)의 이론과 능엄경(楞嚴經)의 요지를 설하라고 명하고는 깊이 대우를 하였다.
세상에 나가 청수사(淸修寺)에 주지하니 학인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법사는 후생들이 독방을 쓰면서 멋대로 할까봐 근심하여 방을 헐어 대중 방을 만들었다. 또한 깨끗한 책상과 밝은 창문. 이불. 선판(禪板) 등이 물을 뿌린 듯 깨끗하여 옛 총림의 풍모가 있었다. 법사는 강론하던 차에 학인이 글귀에 집착하여 틀린 주장을 하는 것을 보고는 탄식하며 말하였다.
“천태의 도는 사명(四明知禮 : 960·1028)존자에 의해서 흥했으나 또한 사명존자 때문에 망할 것이다. 성인이 다시 나오지 않고는 누가 이것을 지켜 줄 수 있단 말인가!”
이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법사가 진실을 아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법사는 타고난 성품이 지혜롭고 예리하였으며 물 흐른 듯한 논변과 위엄 있는 행동으로 사람들과 거슬리는 일이 없었다. 평생을 사귀어 온 사람도 법사에게는 기쁜 얼굴이나 노여워하는 얼굴을 본일이 없었다고 한다. 법사는 낮에는 7경(七經)을 공부하고 밤이면 좌선하는 것을 일상으로 삼았으며, 무외암(無畏庵)을 짓고 노년을 거기서 보냈다.
소흥 계해(紹興癸亥 : 1143)년 겨울에 대혜(大慧宗杳)선사가 왕은(王恩)을 입어 북쪽으로 돌아오게 되었다(곤양에서 유배생활을 했었다). 마침 육왕사(育王寺)에 주지자리가 비어 있어서 굉지(宏智正覺)선사가 그곳 주지로 천거하였다. 굉지선사는 대혜선사가 오게 되면 대중이 많아져 반드시 식량이 바닥날 것을 미리 알고 소임자에게 이렇게 일렀다.
“그대는 나를 위해 한해 예산을 서둘러 준비하고 향적(香積 : 창고)의 일용품은 모두 두 배로 비축해 두도록 하라.”
소임자는 본부대로 하였다. 이듬해 과연 대혜 선사가 오니 대중이 천 명을 넘어 얼마 안되서 창고가 바닥이 났다. 그리하여 대중은 갈팡질팡하고 대혜선사도 어쩔 줄 몰라 했다. 이에 굉지 선사가 쌓아 두었던 물건을 모조리 꺼내서 도와주니 모든 대중이 구제를 받았다. 대혜 선사는 굉지선사를 찾아가 감사하다고 하면서 “고불(古佛)이 아니면 어떻게 이와 같은 역량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하루는 대혜선사가 굉지선사의 손을 잡고 말하였다.
“우리 두 사람 다 늙었소. 그대가 부르면 내가 대답하고 내가 부르면 그대가 대답하다가 하루아침 먼저 갑자기죽는 사람이 있게 되면 남아 있는 사람이 장례를 치러 주도록 합시다.”
그 이듬해 굉지선사가 입적하니 대혜선사가 마침내 상을 주관하여 그 약속을 어기지 않았다.
원각사(圓覺寺)의 자(慈)법사는 이론과 수행을 겸비한 사람으로 학인들의 존경을 받았다. 동액사(東掖寺)에 주지자리가 비어 있어 능(能)법사와 문(文)법사 두 사람이 주지로 천거하여 자법사가 그곳으로 가자 법석이 크게 성하였다.
몹시 더운 여름에 강론을 마치고 방장으로 돌아와 누워서 쉬고 있는데 마침 문법사가 찾아와 말하였다. “동액사 도량은 대대로 도가 높은 사람이 주지해 왔소, 강을 마치고 나서는 참실(懺室)에 있지 않으면 선당(禪堂)에 있었지 누워서 멋대로 하는 사람은 이제껏 없었소.”
자법사가 듣고는 “어찌 감히 명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하고 그 뒤로는 아주 추운 겨울이나 아주 더운 여름이나 조금이라도 게을리 하는 일이 없었다.
남악 양(南嶽懷讓)스님이 육조스님을 찾아뵈었는데, 거기에는 반야다라(般若多羅 : ?~457 중인도 사람)의 다음과 같은 예언이 있었다. “그대의 한 가닥 불법이 그대 곁에서 떠나면 이 다음에 망아지 한 마리가 나와서 천하 사람들을 밟아버릴 것이다” 하였는데 마조(馬祖道一)선사가 바로 그 사람이다. 마조선사가 84명의 선지식을 배출하였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그를 관음보살의 응화라고 하였으며 그가 주지하는 절은 모두 왕이나 대신들이 바친 것이었다. 그곳에 20년 동안 원주를 맡아 오던 사람이 있었는데 절 살림을 관리하면서 문서를 남기지 않았다. 그런데 하루는 관리가 조사를 하는 통에 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우리 스님은 범부인지 성인인지 모르겠다.20년을 그를 도왔는데 오늘날 이렇게 고통스러운 과보를 받게 되다니...”라고 생각하였다. 마조선사는 절 안에서 그 일을 알고 시자에게 향을 사르게 한 다음 단정히 정(定)에 들었다. 그러자 원주는 옥중에서 홀연히 마음이 열려 20년 동안 써온 돈과 물건을 한꺼번에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서기에게 명하여 입으로 말하는 것을 받아 적게 하니 계산이 틀림없었다.
설당 행(雪當道行)스님이 말하였다.
“고암(古庵善悟)스님은 사람됨이 단정하고 곧으며 매사에 법도가 있었다. 자기에게는 검소하였지만 남에게는 넉넉하여 누가 병이 났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자기 때문에 그런 것처럼 여겼다. 심지어 종이나 마부에 이르기까지 몸소 찾아가 문병하고 그들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을 들어주었다. 그들이 죽게 되면 돈이 있건 없건 예를 다해 장사를 지냐주었으나 그 깊은 자비와 사랑은 참으로 말세의 좋은 본보기다.
황태사(黃太史 : 연정)가 호소급(胡少伋 : 호소급)에게 편지를 보내 이렇게 말하였다.
“공(公)은 제법 공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병을 고치는 처방으로는 참선의 기쁨(禪悅)을 깊이 맛보아 생사의 뿌리를 밝혀내야 합니다. 그러고 나면 기쁨. 성냄. 근심 같은 것은 발붙일 곳이 없게 됩니다. 병의 뿌리가 없어지면 가지나 잎 새로는 사람을 해칠 수가 없습니다.
투자 총(投子普聰)과 해회 연(海會宗演)스님은 모두 도행이 높고 깊어 옛 사람과 비교해도 부끄럽지 않은 분들입니다. 만일 그대가 문장 잘하는 선비들과 다니며 헛된 말이나 꾸밈말을 배운다면 그저 지견(知見)만 늘릴 뿐, 자기 일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간당 기(簡堂行機)선사는 태주(台州) 선거현(仙居懸)사람으로 양씨(楊氏) 집안의 자손이다. 풍채가 남달랐으며 재주는 유림(유림)을 압도하였다. 스물다선에 처차를 버리고 출세간법을 배웠는데, 늦게 차암 원(此庵景元)선사를 만나 남모르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세상에 나와 완산사(莞山寺)에 주지하였는데 산전을 갈아 화전을 일구면서 17년을 혼자 살았다.
그때 게송을 하나 지었다.
땅화로에는 불티 하나 없고 객승의 바랑은 텅 비었는데 저무는 해에 눈은 버들꽃처럼 내리는구나 동강난 삼오라기를 주워 누더기를 꿰매면서도 내 몸이 쓸쓸한 데 있는지를 모르겠구나
地虛無火客蠅空 雪似楊花落歲窮 拾得斷麻穿壤衲 不知身在寂蓼中
선사는 늘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아직도 모자라는 점이 있는데 어떻게 주지하는 일로 내 본분을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도에 대한 마음이 대중 속에 있을 때에 비해 조금도 덜함이 없었으며 조금도 그만두는 일이 없이 밤낮으로 참구하였다. 하루는 우연히 도끼로 나무를 찍다가 나무가 땅에 자빠지는 것을 보고 홀연히 크게 깨쳐 평소 가슴에 막혀 있던 것이 얼음 녹듯 녹아 없어졌다. 얼마 있다가 강주(江州) 원통사(圓通寺)에 주지를 맡으라는 명이 있자 선사는 “나의 도가 이제 세상에 펼쳐지려 한다”하며 즐거이 주장자를 끌고 떠나가서 법좌에 올라가 설법하였다. “나는 여기서 약방을 연 것이 아니라 오직 죽은 고양이를 팔 뿐이다. 몇 사람이나 사량분별하지 않는 사람이 나와 이 독약을 먹고 온몸에 식은땀을 흘릴 것인지 모르겠다.”
은산(隱山 : 당나라 스님, 마조의 법제자)선사가 영공(靈空)선사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였다. “사문이 고상한 것은 부처님의 큰 자비 덕분인데 후세에 와서 시끄러워진 것은 스스로가 비천하게 굴기 때문이다, 둘씩 셋씩 짝을 지어 산속에 나타났다가는 사라지는데 그 모양이 마치 천태산 바위동굴과 다를 바가 없고, 빈번히 왕공재상들 앞에 가서 꼽추처럼 등을 구부리고 아첨을 하니 뜻있는 사람이라면 말문이 막히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근년에 와서는 똥불에 산감자를 구워 먹고 살면서 사신이 와도 일어나 인사하지 않았던 옛 분의 풍모는 아예 볼 수 없거니와 황소를 타고 다닌 유정(惟政)스님이나 지암주(志庵主) 같은 사람 한분을 찾기가 마치 땅을 파고 하늘을 찾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이 되고 있다.”
소흥(紹興13 : 1143)년 좌수직랑(左修職郞)인 첨숙의 (詹淑儀)가 재부(財賦 : 세금 등 국고수입)에 관한 의견서를 올려 도첩을 한 곳에서만 팔게 하자고 하였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32년 동안 이 의견에 의해 도첩을 팔아 왔는데, 시랑(侍郞) 오자재(吳子才)가 진정서를 올려 도첩을 나누어 팔도록 허가받았다. 이에 물의가 일어나자 오자재는 “이것은 부처를 속여 복을 받으려는 짓이다”하고는 관직을 그만두고 바위산으로 돌아가 선상에 앉아 경과 선을 음미하며 자족하였고 구름과 물을 감상하며 스스로 즐거워하였다. 그리고는 관을 하나 만들어서 밤이면 그 속에 누워 자다가 날이 밝으려 하면 두어 명의 동자를 시켜 관을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게 했다. “오자재는 돌아가라! 삼계는 어디고 불안하여 살 만한 곳이 없으나 서방정토에는 연화대가 있다.” 오자재는 듣자마자 일어나 참선과 독송을 하였다. 이렇게 몇 년을 계속 정진하였다. 임종 때 집안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은 들었느냐?” 하니 집안사람들이 :아무것도 못들었습니다.“하였다. 오자재가 ”너희들은 생각을 거두고 들어보라“ 하니 이때 모든 사람들은 공중에서 은은하게 들려오는 하늘음악을 들었다 이에 오자재가 말하였다.”나는 청정세계에 살다가 생각(念)을 잃어버려서 이곳에 왔었는데 금으로 된 좌대가 도착했으니 이제 가겠다,“ 그리고는 말이 끝나자 임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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