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생은 실향민
이른바 위없는 부처님의 법왕법(法王法)은 말을 떠나고 일체상(一切相)을 떠나 있습니다. 상대적인 말이나 형상은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다 표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법상(法床)에 오를 때는 마땅히 상(相)을 떠난 법문(法門), 또는 말을 떠난 법문을 해야 합니다. 즉 우리 중생의 상대적이고 유한한 말을 떠난 참다운 진리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러기에 방(棒;몽둥이)을 탕탕 내리쳐서 선기(禪機)를 보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자리는 그런 자리가 아니므로 해설이 곁들여진 법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불이나 법회를 시작할 때 우리는 "귀의불양족존(歸依佛兩足尊)" 하면서 삼보(三寶)에 귀의하는 예를 올립니다. '양족존'이라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자비나 지혜와 같은 모든 덕성을 완전히 구비한 부처님이라는 뜻입니다. 부처님의 공덕을 일일이 다 이야기하자면 비단 자비나 지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자비와 지혜의 두 속성을 들어서 부처님의 공덕을 표현합니다.
그럼 '부처란 대체 무엇인가?' 우리 불자(佛子)들은 이런 질문을 항시 하게 됩니다. 부처님께 귀의해서 일 년 된 분이나 또는 십 년 된 분이나, 몇십 년 되었다 하더라도 이런 질문을 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든 성불하여 부처가 되기 전까지는 부처님은 대체 어떤 분인가 하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질문에 바르게 해답할 수 있어야 수행도 바르게 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말이나 문자로는 부처님을 표현하지 못합니다. '부처'라고 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 또는 인과율을 초월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중생들은 현상적인 형상만 보고 상대적인 문제만 생각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부처님이 현상적인 문제를 떠나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현상과 그 본래 모습인 실상(實相) 모두를 하나로 보는 것이 부처님 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은 안목이 짧아서 실상을 보지 못하고 현상만 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참다운 세계, 본래 진면목의 세계가 우리 중생이 볼 수 있는 현상의 세계와 둘이라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하나의 현상은 모두가 다 실상이 형상화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마치 바다에 대한 파도의 관계와 같습니다. 바닷물 자체가 실상, 곧 체(體)에 해당한다면, 여기서 일어나는 온갖 거품이나 파도는 현상인 용(用)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바닷물을 떠난 파도와 거품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현상을 떠나서 참다운 실상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 중생은 자기 한계상황을 분명히 느껴야 합니다. 이 현상적인 세계만 본다면, 우리 중생은 평생 동안 인생 고해(苦海)에서 헤매다가 맙니다. 이런 의미에서 근본을 떠난 우리는 모두가 다 실향민입니다. 우리 민족은 지금 1천만의 실향민 때문에 피차 서로 가슴을 앓고 있습니다만, 비단 이북에서 온 1천만 동포들만 실향민인 것은 아닙니다. 깨달은 성자를 제외한 세계 50억 인총(人總)의 범부중생은 모두가 다 자기 고향을 떠난 실향민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주만유(宇宙萬有)의 본성품을 스스로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비록 제아무리 분별시비(分別是非)하는 학식이 많다 할지라도 실향민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불교는 참다운 본성을 찾는, 참다운 고향을 찾는 공부라 할 수 있습니다. 참다운 고향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항상 '지금 나는 어디만큼 가고 있는가?' 이렇게 자기를 성찰해 보고 자기 반추를 해봐야 합니다.
- 죽음에 이르는 병
우리 중생들이 추구하는 안락은 오욕락(五欲樂)이라는, 상대적이고 유한한 쾌락입니다. 오욕락이란 재(財), 색(色), 명(名), 식(食), 수(睡)를 말합니다. 재물이나 이성(異性)에 대한 욕심, 명예, 음식, 또는 잠 욕심, 이런 것은 분명 오욕락인데, 우리 중생들은 이런 것들을 추구합니다. 그것이 곧 인간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의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석가모니나 예수, 공자나 노자 혹은 소크라테스 같은 성인들은 이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성경에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키에르케고르가 이것을 제목으로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만, 우리 중생은 지금 모두가 다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고 있습니다. 어째서 그런가? 우리 중생들은 눈에 보이는 현상적인 것이 모두라고 여기고 참다운 실상, 그 본성품을 보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도무지 본성품인 참다운 고향자리를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고향자리를 모르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실향민인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경험하는 이 현상세계는 인연 따라 지나가는 과정에 불과한 것이지 절대로 실존적인 것이 못 됩니다.
루터가 법문을 할 때, 법상 - 물론 지금 여기의 법상과는 다르겠습니다만 - 에 올라가면 먼저 가만히 하늘을 한참 우러러본 다음에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루터가 설교를 시작하기 전에 영원한 진리와 자신과의 거리를 없앤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상당(上堂)에 올라서 하는 법문은, 방금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한마디 한마디가 다 영원한 진리의 차원을 벗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는 길은 바로 참다운 성품자리로 가는 성불의 길이기 때문에, 거기서 한 발짝만 벗어나게 되면 죽고 사는 길에 떨어지고 맙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란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조금 전에 제가 말씀드린 오욕락, 즉 재물에 눈이 어둡고, 이성에 대한 욕망에 눈이 어둡고, 명예나 음식 또는 잠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힌 생활, 이런 것에 얽매인 생활은 모두가 다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재물ㆍ명예ㆍ잠ㆍ음식ㆍ수면, 심지어는 자기 몸뚱이까지도 결국에는 스러지고 마는 것 아닙니까? 어느 땐가는 죽고 맙니다. 어느 땐가 소멸해서 목숨이 다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 이 몸뚱이입니다. 내생(來生)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 몸뚱이 이대로 생(生)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평생 동안의 자기 행위에 따라서 다시 다른 몸을 받는 것이고, 지금 이 몸은 이 생으로 끝나고 맙니다.
이 몸뚱이는 인연 따라서 잠시 동안 이런저런 요소들이 모여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별반 변하는 것 같지 않지만, 변화무쌍하여서 오늘 죽어 없어질지 내일 죽어 없어질지 모르는 것이 바로 이 몸뚱이입니다. 이런 것에 우리 마음을 두고 사는 것, 그게 바로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애지중지 아끼는 재물도 명예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재물이든 명예든 상대적이고 유한한 것에 얽매여 사는 생활, 그건 예외없이 죽음에 이르는 생활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한 걸음만 밖으로 나가도 온갖 어려운 문제에 부딪히고 맙니다.
예를 들어, 공산주의는 대체 무엇인가? 머잖아 우리는 이북과도 합해야 하는데, 주체사상은 어떠한 것인가? 또는 우리 한민족 가운데 1천 5백만을 헤아리는 신도를 가진 기독교 신앙은 어떠한 것인가? 아직도 우리 사회의 근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유교는 어떠한 종교인가? 이런 문제에 부딪히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이런 문제에 명확한 해답을 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슬기로운 어머니가 되고, 참된 아버지가 되고, 또한 지혜로운 스승, 총명한 사회인이 됩니다. 그렇지 않고는 바른 사회인도, 바른 어버이도, 바른 스승도 못 됩니다.
다른 종교나 이데올로기를 안다는 것은 나의 종교나 이념을 아는 것만큼이나 중요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다른 종교를 모른다는 것은 나의 종교를 모른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따라서 다른 종교나 이데올로기와 자신의 것을 비교해서 생각하는 것은 꼭 필요합니다. 오늘날에는 적어도 20대부터 자기 인생관, 자기 철학이 확고히 서 있어야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와 같이 모든 중생에게 참다운 길이 어떤 것인가, 우주의 본바탕은 무엇인가, 상대적인 생각을 떠나서 영원히 변치 않는 부동의 진리는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비단 부처님의 가르침뿐만이 아닙니다. 성경이나 유교 경전, 혹은 마호메트의《코란》이나 모두가 다 죽음에 이르는 가르침이 아니라 죽지 않고 영생에 이르는 가르침입니다. 무상하기 그지없는 자기 몸뚱이나 재산, 헛된 명예나 이성간의 욕망에서 벗어나 참되고 변치 않는 불멸의 진리에 도달하게 하는 것이 모든 성자들의 가르침입니다.
- 삼매와 법락
적어도 부처님 공부를 하시는 분들은 삼매(三昧)라는 용어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독서삼매, 염불삼매 등 무슨 무슨 삼매라는 말이 많지 않습니까? 삼매란 무엇인가 하면 우리 마음이 산란하지 않고 바른 도리, 참다운 도리에 딱 모아진 그 자리입니다.
우리가 생활할 때도 더러는 황홀할 때도 있는 것이고, 또는 무엇에 도취해서 자기도 모르는 순간도 있겠지요. 그러나 이런 것들은 삼매가 아닙니다. 우리 마음이 참다운[正] 생각으로 일념(一念)이 되어서 움직이지 않는 그런 때를 삼매라고 합니다. 참선을 좀 했다고 해서 그냥 삼매에 드는 것은 아닙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참선을 좀 했더니 무아무중(無我無中)의 삼매에 들었다" 이렇게 말합니다만, 그런 정도로는 아직 삼매가 못 됩니다. 우리 마음이 정확히 참다운 부처님 성품, 우주만유의 본래자리, 용(用)이나 상(相)이 아니라 근본 참다운 성품자리에 입각해서 그것을 몸소 체험하여 전혀 흔들림이 없는 마음, 그런 마음을 삼매라 합니다.
그러면 그런 법락은 어떤 때에 나오는가 하는 것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욕락이란 잘 먹어서 재미가 있고, 재물이 많아서 재미가 있고, 명예가 높아서 재미가 있는 것을 말하지만, 법락은 그러한 즐거움이 아닙니다. 참다운 법락은 방금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삼매에 들어야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귀중한 보배입니다. 만약 우리 중생이 삼매에 들지 못한다면 평생 동안 참다운 법락을 맛보지 못하고 가는 셈입니다. 이렇게 사람으로 태어난 것은 참으로 소중한 인연이지만, 참다운 법락을 맛보지 못하고 죽는다면 그처럼 억울한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불자님들은 이번 공부에서 법락을 맛보셨습니까? 우리 마음이 부처님 성품자리에 딱 머물러서 조금도 동요 없는 법락을 맛보셨습니까? 우리 인생은 낭비할 마당이 아닙니다. 낭비할 겨를이 없습니다. 우리 인생은 한 걸음도 한눈 팔지 말고 참다운 행복을 맛봐야 하는 마당입니다. 그리하여 꼭 고향으로 가야 하는 것이며, 고향으로 못 갈 때에는 다시 동물로, 사람으로 끝도 갓도 없이 헤매고 맙니다. 이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피타고라스와 엠페도클레스 그리고 소크라테스도 윤회설을 긍정했습니다. 자기가 금생에 마음 먹는 대로 꼭 다시 태어납니다.
따라서 삼매를 가리켜 현법락주(現法樂住)라 합니다. '나타날 현(現)'자 '법 법(法)'자 '즐거울 락(樂)'자 '머무를 주(住)'자, 즉 삼매를 가리켜서 법락이 나타나는 그러한 경계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한순간 삼매 혹은 법락을 맛보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온전한 행복, 즉 영원불변의 참다운 행복은 못 됩니다. 그런 자리에서 일단 증명은 했다 하더라도 아직 습관성, 다시 말하여 잠재의식 속에 들어 있는 번뇌는 못 버린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습관성이 된, 마음 구석 깊은 곳에 숨어 있는 번뇌까지, 그런 씨앗까지 모두 뽑아 버려야 참다운 최상락(最上樂)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최상락 자리가 바로 열반락(涅槃樂)입니다. 비록 우리가 미처 열반락까지 못 간다고 할지라도 알기는 알아야 합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중생들이 구하는 행복인 오욕락은 사실 아무런 자취가 없습니다. 세간에서 흔히 "저 사람이 나를 배신했다"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만, 사실 가장 지독한 배신자는 바로 우리 몸뚱이입니다. 아무리 아껴 봐야 죽을 때는 미련없이 갑니다. 다시 말하지만 가장 지독한 배신자는 바로 우리 몸뚱이입니다. 분을 칠하고 연지를 칠하고 다이아몬드로 몸을 장식한다 하더라도, 제아무리 좋은 옷을 입히고 산해진미를 먹인다 하더라도 결국에는 자취 없이 사라지고 맙니다.
우리 중생들은 법락을 모르고 열반락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 몸의 노예가 되어 한 세상 보내기 쉽습니다. 바로 이런 사실을 깨우쳐 주는 것이 성자들의 가르침 아닙니까? 성자들의 가르침만이 거짓말을 않습니다.
부처님과 우리 중생과 천지우주는 절대로 둘이 아니고 셋이 아닙니다.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을 하나의 생명으로 통관(通貫)한 데 있습니다. 하나의 생명으로 통관하고 있으니 나무나 소나 사람이나 또는 부처님이나 천체나 어느 것이나 할것없이 모두가 하나의 성품인 것이고, 단지 모양만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불자님들이 알아야 할 문제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본체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체(體)란 무엇인가' 혹은 '본성품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핵심입니다. 누구한테 법문을 하건, 누구한테 법문을 듣든 간에 '본체가 어떤 것인가' '본성품이 무엇인가' 그 자리를 알아 버리면 다른 문제는 다 술술 풀려 갑니다. 제가 누누이 말씀드렸습니다만 본체는 모양이 없습니다. 모양이 없기 때문에 모양만 따지고 사는 사람들은 본체를 모르고 삽니다. 모양이 없지만 그것은 분명히 존재하는 생명의 실존이기 때문에, 일체 존재의 근본성품인 본체는 바로 생명의 실상자리입니다. 따라서 분명히 존재합니다. 다만 번뇌로 때묻은 우리 중생의 안목에서는 볼 수도 체험할 수도 없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길을 가다가도 '엑스터시' 즉 무아경(無我境)에 들곤 했습니다. 한번 마음이 통일되면 발도 안 떼고 바로 그 자리에서 온종일 멈춰 서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너무나 이상해서 사람들이 구경을 하느라고 길거리가 장바닥처럼 되곤 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만, 유명한 분들은 이처럼 영원한 본체를 지향하므로 자기 마음이 분산되고 동요되는 것을 무척 싫어합니다. 선방스님들이 한 철 90일 동안 가능한 한 문 밖에도 안 나가고 더더욱 산문(山門) 밖에 나가는 것을 금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모든 상(相)을 떠나고 허망무상한 현상을 떠나서 영원한 것, 또 생사를 초월하고, 더함도 덜함도 없는 일체 존재의 근본인 그러한 생명의 본체를 알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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