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

[가장 행복한 공부] 마음의 고향 - 2. 고향 가는 길

通達無我法者 2008. 1. 4. 11:53

    고향 가는 길


- 하나의 생명

이와 같이 모든 것의 본체는 둘도 아니고 셋도 아니고 오직 하나의 성품입니다. 이러한 본체는 곧 불성(佛性)자리요, 부처님 성품입니다. 그것은 어떤 하나의 논리가 아닙니다. 참다운 우주의 도리인 동시에 우주의 생명입니다. 이것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단지 논리적으로만 따져서 합리적인 이치만 구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치만 알면 '공부 다했다'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자리는 다만 논리적인 이해로 닿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 지성ㆍ감성ㆍ의지의 모든 것을 초월한 하나의 생명입니다. 생명체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 근본자리를 부처님이라 하는 것입니다. 생명체이기 때문에 하나님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이라 말하고 하나님이라 말하는 것도 하나의 우상숭배가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는 분도 있습니다. 또 '화두를 구해야 하지' 혹은 '말없이 구해야지 부처님이나 나무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 등 그 근본자리를 인격화시켜서 부르는 것은 하나의 우상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는 분도 있습니다.

우리는 본체를 보지 못하는 중생입니다. 따라서 본체를 어떻게 구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셔야 공부하신 보람이 있습니다.

물리학적으로 본다 하더라도 이 우주는 궁극적으로 광양자(光量子), 즉 광자(光子)로 충만해 있습니다. 공간성ㆍ시간성도 없고, 질료ㆍ열량도 없는 광자만이 우주에 충만해 있습니다.

광양자란 무엇인가? 이것은 알 수 없는 우주의 에너지, 우주의 장(場) 에너지입니다. 우주를 구성한 장 에너지가 광명같이, 빛같이 보이는 것이 이른바 '광양자'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물리학적으로 볼 때는 사실 우주가 모두 빛뿐입니다. 광명뿐입니다. 광양자가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가, 어떻게 진동하고 있는가에 따라서 중성자(中性子)니 전자(電子)니 하는 것입니다.

저는 물리학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상세한 것은 잘 모릅니다만, 그리고 제가 말씀드리는 것 가운데서 다소 부정확한 것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요는 다 그런 뜻입니다. 또 물리학적인 입장에서도 우주의 본질이 '광명의 파동(波動)인가?' '광명의 입자(粒子)인가?' 하는 논쟁을 해오다가 지금은 파동인 동시에 입자라는 입장으로 정리가 되고 있습니다. 파동이 어떤 충동 때문에 동요해서 중성자가 되는 차원에서는 하나의 입자라는 것입니다. 입자인 동시에 파동인 광명이 우주 어디에나 틈도 없이 충만해 있습니다.

따라서 우주는 현대물리학적으로 본다 해도 사실은 광명뿐입니다. 광명뿐인 것이 이렇게 운동하고 저렇게 운동하고 해서 양자가 되고 전자가 되고 또는 중성자가 되었단 말입니다. 그런 것들이 이렇게 저렇게 모여서 산소가 되고 수소가 되고, 각 원소(元素)가 되었습니다. 원소들이 모여서 분자나 세포가 되고 우리 육신이 구성되고 나무가 구성되고 하늘에 있는 달이나 별이 구성되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광명이 어떻게 진동하고 결합되어 사람이 되고 다이아몬드가 되었다 하더라도 그 광명은 조금도 변질이 없습니다. 부처님 법문은 그 광명, 그 순수한 생명체가 곧 진여불성(眞如佛性)이며, 덜함도 더함도 없는 진여불성은 일체 존재가 모양을 내거나 말거나, 천지우주가 파괴되거나 말거나 영원히 존재하는 하나의 생명체이며, 이것이 바로 부처님 성품이요 진여불성이라는 겁니다. 참다운 우주의 도리니까 바로 진여(眞如)요, 우주의 본성품이니까 불성(佛性)이요 법성(法性)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이것이 하나의 생명, 즉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억울하게도 우리 범부중생은 번뇌에 가려서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마음이 규칙없이 진동하기 때문에, 즉 순수한 진동을 못하기 때문에 우리의 본성품인 광명을 못 보는 것입니다. 보지 못하다가 호흡도 하고 염불도 하고 화두도 해서 우리 마음이 안정되어 가면 안정된 정도에 정비례해서 우주에 항시 존재하는 생명이, 광명이 차근차근 비쳐 오는 것입니다.

톨스토이 같은 사람도 그가 남긴 최후의 기록을 보면 가끔 광명을 봤습니다. 광명을 보고 환희심에 넘쳐 절대자를 흠모했다 합니다. 위대한 분들은 이와 같이 영원한 광명을 보는 것입니다. 또한 그와 동시에 영원한 리듬을 듣습니다. 우리 중생은 이런 광명을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우주에 가득 차 있는 영원한 리듬, 황홀한 음악도 듣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주에는 영원한 리듬이 분명히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그와 같은 본래 광명에서 온 하나의 생명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여타의 생명체와 다르지 않습니다. 돼지나 소, 혹은 나무나 흙과 같은 생명과 다를 것이 없는 하나의 생명입니다. 대개 '생명' 하면 현대인들은 "사람이나 동ㆍ식물까지는 생명인데 다른 곳에도 생명이 있는가?"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 차원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 어떤 것이든 전자나 중성자의 결합체가 아닌 것이 없는 것처럼, 모두가 다 부처님 성품이라고 하는 진여불성, 즉 생명의 형상화인 것입니다. 모든 존재는 생명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나무든 흙이든 일체 자연(自然)이 생명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자연을 함부로 훼손하거나 공해를 만들어 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나만 생명이고 다른 것은 생명이 아니다" "우리 인류만 생명이다" "인본주의다"라는 주장을 펼 때는 온갖 문제들이 일어납니다.

불교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불교를 '인본주의(人本主義)'라고 합니다. 일면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불교가 인본주의라 하는 것은 인간의 본질이, 인간의 본성이 바로 부처님이라는 의미에서입니다. 오직 이런 의미에서 볼교는 인본주의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지 중생의 차원에서 "사람이 제일 높다"라고 할 때는 불교를 인본주의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불교가 인본주의라는 본래의 뜻에서 어긋나는 해석입니다. 석가모니께서 태어나서 맨 처음에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 "하늘 위나 하늘 아래서나 나 홀로 존귀하다"라고 하신 말씀도 그냥 우리 인간 존재, 범부 그 자체가 존귀하다는 것이 아니라 불성까지 간 존재, 일체 존재의 근원까지 간 존재, 부처님 차원까지 간 존재만이 하늘 위나 하늘 아래서나 가장 존귀한 존재라는 말씀입니다.

- 고향으로 돌아가는 방법

우리는 지금 광명의 바다, 광명의 고향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광명의 고향에서 떠나온 것입니다. 광명의 고향을 떠나서 얼마나 헤맸는지 모릅니다. 과거 전생에는 천상(天上)에도 갔을 것이고, 사람도 되었을 것이고, 더러는 축생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다행히 금생에 사람의 몸을 받고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또다시 우리는 광명의 바다, 광명의 고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광명의 고향으로 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우리 인간이 탐욕[貪]이나 분노[瞋] 혹은 어리석은[癡] 마음에 가려서 미처 모르는 것이지, 설사 지금 강도짓을 하는 사람이라 해도 불성의 차원에서 보면 아무런 흠도 훼손도 없습니다. 불성은 결코 훼손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순금으로 가락지를 만드나 안경테를 만드나 순금 자체는 조금도 변질이 없듯이 진여불성 자리, 부처님 성품자리는 이렇게 되나 저렇게 되나 변질되지 않습니다. 우리 중생 차원에서 강도요 나쁜 놈이요 좋은 사람이요 하는 것이지 불성 차원에서 본다면, 불성은 똑같이 온전하게 그 사람 속에 충만해 있습니다. 좋은 사람에게 불성이 빛나고 있는 것처럼, 나쁜 사람에게도 진여불성 자리가 훤히 빛나고 있으며, 동물이나 식물 속에도 부처님의 불성광명(佛性光明)이 훤히 빛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렇게 오염된 세계 그 자체가 바로 광명정토(光明淨土)인 것입니다.

그러면 부처님 공부를 어떻게 해야 가장 빨리 광명의 자리로 돌아갈 것인가? 사실 이것 때문에 우리 중생들은 옥신각신 서로 싸우게 됩니다. 일본 일련종(日蓮宗) 같은 종파는 '남묘호랑게교'를 외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한 종파를 세웠습니다. 언젠가 신문을 보니까 우리 한국에도 한 40만 정도가 일련종을 따르고 있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남묘호랑게교'를 외는 것이 부처님 공부의 첩경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약 40만 명 정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법화종(法華宗)도 일련종을 본따서 '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華經)'이라는 경의 이름을 외우게 하고 있습니다. 광명세계로 가는 길, 성불의 길로 가기 위하여 법화경의 이름을 외는 방법을 취합니다. 경의 이름을 외면서 하는 방식은 일본의 일련대사(日蓮大師)가 처음으로 창시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법화경이 제일 수승한 경이므로 법화경의 본래 이름인 '남묘호랑게교'라는 경 이름만 외우면 진리가 그 속에 다 들어간다는 식이란 말입니다. 물론 그것도 하나의 좋은 방법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 보통 하고 있는 '나무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은 어떤 것인가? 또는 우리 선방에서 보통 하고 있는 '이뭣고[是甚麽]' 선이나 '무(無)'자 화두, 또는 '판때기 이빨에 털 나온다[板齒生毛]' 화두나 '마삼근(麻三斤)' 화두는 어떤가? 이 중에서 어떤 것이 우리의 본래성품 자리로 가장 빨리 그리고 효과적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하는가? 이런 것이 문제가 되겠습니다.

- 참다운 참선 참다운 염불

부처님 자리는 단지 경(經)만이 아니고 바로 생명 자체입니다. 내가 생명인데, 우리 자신이 바로 생명인데 일체 존재, 일체 생명의 근본자리인 부처님 자리가 생명 아니겠습니까? 천지우주가 바로 하나의 생명입니다. 그러기에《관무량수경》에도 시방여래(十方如來)는 법계신(法界身)이라, 즉 부처님은 바로 우주를 몸으로 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부처님은 저 어떤 하늘에 계셔서 하늘만 몸으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주를 몸으로 합니다. 우주를 몸으로 하는 가운데 우리도 다른 모든 존재와 똑같이 우주에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품자리에서는 대소장단이 없습니다. 모두가 우주에 들어 있는 부처님 성품인데 잘난 사람은 부처님 성품이 더 많은가 하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못난 사람이나 잘난 사람, 동물이나 인간, 또는 식물이나 하나의 티끌조차도 모두가 '성품'이라는 차원에서는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왜 그런가? 성품은 공간성이나 시간성이 없습니다. 공간성이나 시간성이 없는 것은 물질이 아닙니다. 공간성이 없으니 물질이 아니겠지요. 또한 공간성이 없으니 시간성도 없단 말입니다. 그것은 공간과 시간, 인과율(因果律)조차도 초월한 순수생명 자체이기 때문에, 그런 차원에서는 작고 크고 많고 적고, 또는 높고 낮은 어떠한 차이도 없습니다. 티끌에 있는 진여불성이나 사람에게 있는 진여불성, 석가모니에게 있는 불성이나 예수님 불성이나 똑같습니다. 다만 역사적인 상황과 인과의 여러 가지 차이 때문에 상(相)만, 오로지 상만이 차이 있게 표현된 것이니, 본성품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따라서 '남묘호랑게교'를 한다고 하더라도, '부처님의 참다운 성품은 대소장단의 차이 없이 우주에 충만해 있고, 훤히 빛나는 부처님의 무량광명이 우주에 충만해 있다' 이렇게 확신하면서 '남묘호랑게교'를 외우면 허물될 것이 없습니다. 또 '판때기 이빨에 털 나온다'는 화두를 한다고 하더라도 '어째서 판때기 이빨에 털 나온다고 하는가?' 이런 식으로 의심하면 참다운 공부가 못 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참다운 참선이라는 것은 본성품 자리, 본분(本分)자리, 본래면목(本來面目) 자리, 곧 본체를 여의지 않아야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불자님들도 기왕이면 참선을 하고 싶지요? 스님네한테 말을 들으면 "일반 공부는 방편이요 참선이라야 훌륭한 공부다" 하니까, 저에게도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화두를 타러 옵니다. 그래서 "당신은 지금 어떻게 공부합니까?" 하고 물으면 "아, 저는 '관세음보살' 합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런 분들은 관세음보살과 화두가 별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관세음보살을 부른다고 하더라도 입으로는 "관세음보살!" 하면서 그 마음 자세가 본성품을 떠나서 '관세음보살이 저만큼 어디 계신다' 이렇게 관세음보살을 대상적인 것으로 추구하는 것은 참다운 참선이 못 됩니다. 그것은 참다운 염불이 아니라 그저 단순한 염불에 불과합니다.

참다운 염불은 불이불(不二佛), 즉 부처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입장에서 부처님 이름을 외는 것입니다. 또는 불리불(不離佛)이라, 즉 부처와 내가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염불한다는 말입니다. 좀 어려운 말로 하면 일상삼매(一相三昧)라, '천지우주가 오직 부처님뿐이다, 부처님 한 분뿐이다' 이렇게 보기 위해서 염불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중생은 그 자리를 떠나기 쉬우므로 그 자리를 간절히 지키기 위해서 염불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 참다운 염불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한다면 "관세음보살!" 하는 것 이상의 다른 화두를 들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화두를 들든 그 화두를 다만 상대적인 문제로나 의심하고 이럴까 저럴까 또는 이것이 무엇인가 하는 식으로 의심한다면 그것은 바른 참선이 못 되는 것입니다.

의심하고 회의하는 것은 하나의 이성적인 추구방법에 불과합니다. 마땅히 한순간도 본체를 여의지 않아야, 본 주인공을 안 여의어야 바른 참선입니다. 이렇게 하다 보면 공부가 차근차근 순숙(醇熟)됩니다. 보통 생각하는 것처럼 단박에 다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사람의 근기가 선근(善根)에 따라서 차이가 있습니다만, 대체로 오랜 시간 동안 추구해야 바른 참선에 이를 수 있습니다.

석가모니께서도 6년 고행(苦行)이 필요했으며, 조주(趙州)스님 같은 대천재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조주스님께서 처음에 남전보원선사에게 가서 공부를 하셨는데 "부처란 무엇입니까?" 하고 보원선사에게 묻자 "평상의 마음이 바로 도이다[平常心是道]"라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그 말을 따라서 조주스님이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조주스님이 깨달은 경계를 말씀드리니까 "그대가 비록 문득 깨달았다[頓悟] 할지라도, 재참삼십년(再參三十年)하라!" 즉 30년 동안 더 참선 수행하라고 말씀했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이 열렸다 하더라도, 즉 '천지우주가 부처님뿐이며, 모두가 광명세계'라는 것을 알았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공부가 다 끝난 것은 아닙니다. '아, 그렇구나!' 하고 느꼈다 하더라도 공부가 끝난 것이 아닙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잠재의식 속에 들어 있는 습관성, 그 씨앗을 뿌리뽑으려면 굉장히 많은 세월이 필요합니다. 조주스님 같은 분도 30년의 수행이 더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부처님 명호는 '나무아미타불'이든 '관세음보살'이든 모두가 다 진여불성 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무아미타불!' 했다고 해서 더 높은 것도 아니고 '관세음보살'을 외는 것이 더 낮은 것도 아닙니다. 여기에는 고하가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부처님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공덕 차원에서 볼 때만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부처님은 형상이나 이름이 아니기 때문에, 부처님은 우주의 대생명이기 때문에 그 자리를 찾게 하기 위해서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나무아미타불' 또는 '아미타불'을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따라서 그런 부처님 명호(名號)는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제시하신 화두입니다. 다시 말하여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나무아미타불 해라!" 또는 "관세음보살 해라!"고 하신 것은 '나무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 그 자체가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화두라는 말입니다. 꼭 '무(無)'자나 '이뭣고'만 화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화두라는 것은 현성공안(現成公案), 즉 바른 마음에서 보면 우주만유가 다 화두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지금 '지장보살!'을 많이 하여 거기에 습관이 붙었고, 게다가 약간의 법락(法樂)에 가까운 재미까지 보았다면 구태여 이름을 바꿀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주의할 것은 지장보살이나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이나 모두가 하나의 자리, 하나의 생명자리이며 전혀 구분지을 수 없기 때문에, 영가천도(靈駕薦度)를 할 때도 이런 자리에 우리 중생이 영혼을 천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해서 '지구 같은 땅덩어리를 맡고 있는 성령 기운이 지장보살이다' 이렇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장보살은 다른 성령 기운하고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