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처님의 자비와 지혜
부처님 차원의 참다운 기운은 전혀 한계가 없습니다. 부처님 차원의 기운은 우주에 충만해 있어서 어디에 덜 있다거나 더 있다는 차이가 없다는 말입니다. 관세음보살을 외우든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든 '이뭣고'를 하든, 또는 광명진언(光明眞言)을 하든 하나인 바로 그 자리라고 생각하셔야 쓸데없는 시비를 하지 않게 되고, 우리의 공부도 차근차근 진전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가 서두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귀의불양족존(歸依佛兩足尊)이란 자비와 지혜가 원만히 갖추어진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말입니다. 자비와 지혜, 이것은 부처님 자리에 갖춰져 있는 가장 중요한 속성이기 때문에, 우리가 공부할 때는 꼭 자비와 지혜를 함께 가지런히 지닐 수 있을 때까지 밀고 나가야 합니다. 창공을 날아다니는 새의 날개가 한쪽만 있고 다른 한쪽은 없다면 바로 날 수가 없습니다. 땅 위를 굴러가는 달구지도 두 바퀴가 똑같이 있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공덕, 다시 말하여 우리의 본성품인 진여불성의 공덕은 자비와 지혜가 원만히 갖추어져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부처님의 공덕은 음과 양이 온전히 갖추어져 있습니다. 음이 많고 양이 부족하다거나 혹은 그 반대가 되면 곤란하다는 말입니다. 만일 자비만 좋아서 자비만 추구하고 지혜를 소홀히 한다면 자비조차도 참다운 자비가 못 되는 것입니다.
자비와 지혜는 원래 혼연일체라서 온전히 하나입니다. 지혜와 자비가 뭉친 자리가 본래 우리의 성품이기 때문에 이 둘은 둘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공덕을 말하면 둘로 대별할 수 있기 때문에, 자비만 구하고 지혜를 무시하면 우리의 공부가 더딥니다. 본래 우리의 근본 생명자리는 다 갖추어진 것인데 하나만 추구하면 공부도 잘 계합(契合)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도인이든 자비와 지혜, 또는 정(定)과 혜(慧)를 함께 추구했습니다. 정과 혜에서 '정'은 '뜻 정(情)'의 '정'이 아니라 마음을 한 군데에 통일시키는 '정할 정(定)'자 '정'입니다. 마음을 한 곳에 일념으로 모으는 정(定)과 비추어 보는 지혜[慧]는《화엄경》이나《육조단경》또는《보조어록(普照語錄)》에도 강조되어 있습니다. 또한 모든 도인들이 정혜쌍수(定慧雙修) 또는 정혜균등(定慧均等)을 말씀하셨습니다. '고를 균(均)'자 '같을 등(等)'자, 즉 정과 혜가 고르게 나아가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런 점은 주의하셔야 합니다. 어떻게 정과 혜를 같이 공부할 것인가? 화두를 하든 참선을 하든 또는 다른 무슨 공부를 하든 원래 우리 성품에 구비되어 있고 전 우주에 갖추어져 있는 정과 혜를 균등하게 해서 나아가야 한단 말입니다. 그래야 공부가 빨리 진척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지혜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른바 반야지혜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반야지혜가 너무 좋아서,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을 하던 분들이 '마하반야바라밀'을 해야겠다고 하시기도 합니다. 그것도 물론 좋습니다. 그러나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이 모두 같다고 생각해야지 줄곧 나무아미타불 하던 사람에게 그것은 그만두고 '마하반야바라밀'을 하라고 한다면 그것도 역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는 방식이 좋다고 해서 다른 공부를 비방하거나 폄하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이런 데에서 공부하는 방법을 참 주의해야 합니다. 자기가 염불을 좋아한다고 해서, '염불 아니면 필요없다. 염불만이 성불한다' 하면 이것도 문제가 큰 것입니다. 그런 데서 방금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지혜와 자비가 균등히 똑같이 가야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균등히 갈 것인가? 사실 그것은 여러분께서 공부를 하시면 그때그때 자기한테 요령이 붙습니다.
지혜는 무엇인가? 불교의 지혜는 바로 반야지혜입니다. 또한 반야지혜는 제법공(諸法空)의 지혜입니다.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모두 비었다는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모두가 다 변화해 마지않는 변화의 과정에 불과합니다. 변화하는 과정에 있는 것은 실존적으로 고유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왜 비어 있는 것인가? 인연 따라 잠시 동안 합해져서 차근차근 변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한순간도 머물지 않으며, 또한 어느 순간도 공간성이 있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공(空)이라고 한 것입니다. 부처님 법은 철저히 과학적입니다. 모든 존재는 인연 따라 잠시 동안 합해졌으나 합해진 그것이 조금도 머물지를 않는단 말입니다. 그래서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에도 "사람은 같은 냇물에 두 번 들어갈 수는 없다. 왜냐하면 언제나 새 물이 흘러 내려오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흘러가는 한 시냇물에 우리가 두 번 다시 발을 담글 수가 있겠습니까?
현상계는 모두가 일과성(一過性)입니다. 한 번 지나가는 것입니다. 한 번 지나가는 무한한 인생입니다. 누구를 미워하고, 누구를 지독하게 탐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가 제아무리 미워한 사람도 이윽고 얼마 안 가서 흔적도 없이 사리지고 맙니다.
반야는 내 몸이나 원수의 몸, 혹은 내 권속의 몸이나 모두가 다 비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잘못 봐서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산소나 수소와 같은 것이 잠시 합해져 있을 뿐 시시각각으로 변동하듯이, 우리 몸의 세포도 또한 신진대사를 통하여 시시각각으로 변화해 마지않습니다. 고유한 자기 몸뚱이가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므로 제법공(諸法空)이요 오온개공(五蘊皆空)입니다. 많은 사람들이《반야심경》을 즐겨 독송하는 것은, 이 경전에서 강조하고 있는 제법공이 바로 부처님 법문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 제법공이라 해서 다만 공(空)으로만 안다면, 그때는 불교가 허무주의에 떨어지고 맙니다. 불교를 '허무주의'라고 말하는 것은 불교를 잘못 아는 것입니다. 불교는 결코 허무주의가 아닙니다. 단지 우리 중생이 보는 그 자리만 공인 것이지 영원한 생명, 즉 시간성과 공간성을 초월한 영원한 생명의 자리는 항상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아인슈타인 다음 가는 위대한 물리학자인 호킹도 역시 우주가 파괴되면 '블랙홀'이라 불리는 하나의 '광명의 구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형성되어 나온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런 분들이라 할지라도 보다 깊은 소식은 모른다고 봐야겠지요. 부처님 법은, 천지우주가 다 파괴되어 우리 인간이 모두 광음천(光音天) 이상으로 다 올라가 버려서 물질이 전혀 남아 있지 않는 때라고 할지라도 조금도 변함이 없고 조금도 감축(減縮)이 없습니다. 모양이 있는 현상세계는 다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주가 이루어질 때는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가? 우리 중생의 업력(業力)이 모여서 원자가 되고 분자가 되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물질과 중생의 업력은 조금도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염파(念波)에 불과한 것입니다. 모두가 상념파(想念波)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상념파가 금생에 이 몸을 만들었습니다. 생명이 엄마의 태(胎) 속으로 들어갈 때에는 단지 식(識)밖에는 없습니다. 우리의 상념파인 식밖에 아무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바로 그 식들이 부모의 영양을 취하고 그 영양 밑에서 이렇게 사람의 모습이 되어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물질은 없는 것입니다. 모두가 진여불성 즉 광명뿐입니다. 모두가 마음뿐인 것입니다. 따라서 불교의 반야라는 것은 '모두가 다 마음뿐이다, 모두가 다 진여불성뿐이다' 이렇게 느껴야 합니다. 이렇게 느껴야 불교의 지혜입니다.
불경을 많이 외우고 다른 공부를 많이 하는 것은 하나의 분별공부인 것이고, 가장 핵심은 반야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진여불성은 모든 상(相)을 떠난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허망무상해서 다 공이고 무아이기 때문에 '나'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 무아
'무아!' '무아!' 이렇게 말씀들은 잘 합니다. 그러나 무아 소식을 좀더 깊이 알아야 합니다. 무아 소식을 제대로 안다면 앞에서 말씀드린 오욕락(五欲樂)을 추구할 아무런 이유도 없습니다. 무엇 때문에 명예를 구하고, 무엇 때문에 재산을 구하겠습니까?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은 절대로 아닙니다. 무아라는 것은 진리에 입각한 마음 상태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라는 말입니다. 이는 우리의 삶이 반야지혜와 더불어서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베풀 때도 반야지혜로 베풀어야 무주상(無住相) 보시가 됩니다. 어떤 경우라도 반야지혜와 더불어서 해야 합니다. '무'자 화두를 하더라도 반야지혜와 더불어서 해야 참다운 참선입니다. '나무아미타불'을 외운다고 할지라도 반야지혜와 더불어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천지우주는 조금도 흠이 없고, 간격도 없고 모두가 다 부처님의 진여광명뿐이다' 이렇게 해야 참다운 염불입니다.
그러나 이런 마음 상태를 지속시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경전에서도 우리 마음은 '까불기 잘하는 경망스러운 원숭이' 같고, 또한 풍중등화(風中燈火), 즉 바람 가운데 있는 등불 같다 하였습니다. 바람 가운데 있는 등불같이 동요가 끊이지 않고, 원숭이같이 경망스러운 것이 우리 마음이기 때문에, 법문을 듣고서 우선 당장은 '내가 잘은 모르지만 천지우주가 참으로 텅 빈 것이겠구나. 무아니까 부처님께서 무아라고 하셨겠지' 이렇게 생각들을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에 부딪히면 금방 잊어버리고 맙니다.
따라서 그런 마음, 즉 '모두가 텅 비었고 오직 부처님만 존재하고 진여불성만 존재한다. 삼천대천세계가 일체유심조이므로 오직 마음뿐이다' 하는 그 무아(無我)의 마음자리를 지속시켜야 합니다.
이런 마음자리를 지속시키는 것이 바로 '정(定)'입니다. 지혜와 정(定)을 함께 균등히 해나가야 합니다. 순간 찰나도 참다운 지혜, 즉 반야의 지혜를 안 떠나야 하는 것이고, 동시에 한결같이 그 자리를 지켜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를 지켜가기 위해서 염주를 가지고 천번 만번 염불을 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거니와 염불하거나 화두를 참구할 때 꼭 반야지혜를 놓치지 마십시오. 반야지혜, 이것은 우리의 참다운 고향자리입니다. 우리의 참다운 생명자리입니다.
한용운 선생의 <님의 침묵>에서는 "기룬(그리운) 것은 다 님이다"라고 했습니다만, 우리가 진여불성에서 볼 때는 그립지 않고 미워도 모두가 다 '님'입니다.
정혜쌍수(定慧雙修)라, 즉 자비와 지혜를 지속시키는 수행을 하는 것은 본래 우리가 갖추고 있는 자비와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본래 갖추어져 있는 지혜요 자비요 정(定)이요 혜(慧)이기 때문에, 우리의 공부도 정과 혜, 자비와 지혜를 함께 닦는 공부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식 때마다 '귀의불양족존'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반야의 지혜, 즉 시를 쓰든 그림을 그리든 모두가 다 반야의 지혜와 더불어서 해야 합니다. 그래야 걸작이 나올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반야의 지혜를 지속시키는 선정을 병행해야 합니다. 즉 정혜쌍수(定慧雙修) 혹은 정혜균등(定慧均等)을 염두에 두시고서 다음에 공부하실 때는 꼭 오욕락을 떠나서 법락을 맛보시기 바랍니다. 법락을 맛보셔야 몸도 가볍고 마음도 가볍습니다. 법락을 맛보셔야 속물이 안 되고 인간다운 인간이 됩니다. 그렇게 해서 꼭 금생에 무상대각(無上大覺),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이루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오늘 법문을 마치겠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
<불기 2535년 8월, 태안사 금륜회 하계 용맹정진 회향 및 정기법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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