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심반야바라밀다시行深般若波羅蜜多時
지혜의 완성인 반야바라밀
보살은 연꽃과 같아서 자비는 뿌리 되고 편안한 것 즐기며 지혜는 꽃술이요 계율은 깨끗한 향기
부처님 법의 광명을 놓아 그 연꽃 피게 하니 함이 있는 물이 묻지 못하며 보는 이는 모두 다 기뻐하더라.
보살의 묘한 법 나무 정직한 마음 땅에 나나니 신심은 종자되고 자비는 뿌리 지혜로 밑등이 되고
방편은 가지와 회초리 다섯 바라밀다 아주 번성해 선정의 잎에 신통의 꽃이 피고 온갖 지혜의 열매 맺히니 가장 굳센 힘 덩굴이 되었고 늘어진 그늘 삼계에 덮이네.
이 멋진 詩는 화엄경 이세간품의 보현보살의 게송 중 하나입니다.
여기에 대승불교의 가르침의 핵심인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한 여섯 가지 필수 덕목인 육바라밀六波羅蜜(밀 자를 비밀스럽다는 密이 아니라 벌꿀처럼 달다는 蜜을 쓰는 것이 재미 있습니다)이 다 담겨져 있습니다.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관자재보살이 행하셨다는 '반야바라밀'이 바로 보살의 수행의 핵심이며, 또 마지막 단계입니다. 육바라밀의 마지막 단계인 반야바라밀을 설명드리기 전에 앞의 다섯 가지 수행의 바라밀에 대해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바라밀波羅蜜’은 수행의 완성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반야바라밀 하면 지혜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반야심경에서는 ‘관자재보살이 심오한 반야바라밀을 실천한다’ 라고 했습니다. 바라밀다는 바라밀과 같은 말입니다.
바라밀, 혹은 바라밀다는 명사이지 행위를 말하는 동사가 아닌 것입니다. 다시 육바라밀의 설명으로 돌아오면 육바라밀 자체는 수행의 '덕목'이지 행위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문제가 왜 중요한지를 짚어 보겠습니다.
웬만큼 공부한 불교 신도들은 육바라밀 하면,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반야’하고 줄줄 외웁니다. 그리고 첫 번째 수행의 과제인 보시布施 가 절에 시주를 한다거나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베푸는 행위라고 정확히 답 합니다. 그럼, 이 답이 정답일까요?
앞으로 이 책의 곳곳에서 여러분이 지금까지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불교 교리의 풀이를 두고 다른 각도에서 민감하게 반응하는 제 모습을 보실 겁니다. 이번 경우가 첫 번째가 될 것 같습니다.
알고 계시다시피 보시란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주는 것'이 모두 관세음보살의 경우와 같이 ‘구제’와 ‘수행’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겠습니까? 아주 노골적인 예를 들겠습니다.
신도가 부처님께 복을 지으려고 절에 보시를 하는데, 그 돈을 받는 것은 부처님이 아니라 스님입니다. 그 보시 받은 돈으로 한 스님은 그간 돈이 없어 못 사 본 경전을 사서 공부하는 데 쓰고, 한 스님은 결혼을 했기 때문에 자기 애 옷 사주는데 썼다고 가정합시다.
말이 가정이지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 아닙니까? 신도의 보시를 어느 쪽으로 사용하는 게 더 불교적 이겠습니까?
이런 제 말에 속으로 흥분하는 스님들이 있을 겁니다. ‘저 놈이 조계종이라고 대처승帶妻僧들을 모함한다’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조계종 스님들 중에도 호적에는 올리지 못하지만 여자를 취한 스님이 있을 수 있고, 조계종이 아니라고 모두 결혼한 스님이라고 단정 지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닙니까? 더욱이 저는 신도나 일반인이 ‘부인을 가진 승려’라는 뜻으로 대처승이란 말을 쓰는 것도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차라리 ‘보살승菩薩僧’이라는 말이 더 합당할 듯합니다. 보살이란 원래 ‘부처에 버금가는 깨달음에 이른 사람이나, 부처가 되려고 수행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니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원효가 설총을 출생시켰다는 이유로 그를 폄하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는 그 ‘보살승菩薩僧’들에게 당당히 말하고자 합니다. 여자를 취하건 말건 그것은 순전히 개인의 수행의 문제라고.. 그러나 출가하고 나서도 여자와 매일 밤 같이 자게 되는 결혼생활을 아무런 고민이나 번민 없이 당연시하는 것이 과연 자신의 수행과 불교를 위해 문제될 것이 정말 없겠는가라는 생각을 지울 수는 없습니다.
그것도 불교에서 말하는 옷 깃만 스쳐도 이루어진다는 ‘인연’이라고요? 아닙니다. 그건 분명 욕망에 의해 옷 깃이 아니라 옷 속까지 스쳐버린 ‘연인’의 결과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제게 역정을 내실 것이 아니라 자신의 수행에 도움이 된다고 확신하여 결혼하였다거나, 그 결과 부인을 통해 내가 하지 못하고 있는 신도들에 대한 교육이나 포교를 아주 잘해내고 있어 한국불교에 드러나지 않는 힘이 되고 있다고 당당히 말하거나, 불교 내에서나 사회적으로도 그렇다고 인정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보시에 대해 예를 들다 이번에는 제 분수도 모르고 옆길로 새버렸습니다. 덕분에 여러분은 이제 간단히 육바라밀을 이해하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 견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보시 + 반야 = 보시바라밀(지혜롭게 보시를 함) 지계 + 반야 = 지계바라밀(지혜롭게 계를 지킴) 인욕 + 반야 = 인욕바라밀(지혜롭게 욕됨을 참음) 정진 + 반야 = 정진바라밀(지혜롭게 열심히 수행을 함) 선정 + 반야 = 선정바라밀(지혜롭게 선정에 듦)
이것이 다 완성되면 곧 지혜의 완성인 반야바라밀. 간단하지 않습니까?
※ 성법스님'마음 깨달음 그리고 반야심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