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
금강경 과 반야심경의 차이
반야심경을 해설하는 초장부터 금강경을 들먹이는 까닭은, 두 경이 공과 지혜를 설하는 같은 반야부의 경전에 속하기 때문인데, 그 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참선만 해야지 경전을 보면 소위 알음알이를 일으켜 분별심만 더한다고 야단을 치는 선사禪師들도 이 금강경과 반야심경 만큼은 소중히 여길 정도로 '마음 다스리는 방법'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경이 바로 금강경과 반야심경입니다. 제가 관심을 갖는 부분은 금강경이 대승불교의 핵심인 공사상을 설명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놀랍게도 '공'空 이란 단어는 단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공을 말하는데 비非, 무無 등의 부정을 통해 긍정을 유도하는 형식입니다. 이에 반해 반야심경은 공을 사용하긴 하지만 '역무'亦無, '무무'無無 등 이중부정의 논리를 통해 재차 공의 개념을 확인하는 형식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것은 금강경이 번역될 시기에는 중국불교에서는 공이라는 용어를 발견하지 못했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후에 반야심경이 번역될 때는 공의 개념이 완성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문제는 금강경과 반야심경을 이해하는 데에는 물론 현재의 한국불교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기 때문에 소상히 다루어 보겠습니다.
금강경은 구성은 동진東晉때의 도안(道安, 314-385)이 서분序分, 정종분正宗分, 유통분流通分으로 구분하고, 달마와 '공덕이 얼마나 됩니까?' '없다'는 유명한 대화를 나눈 양무제의 아들 소명태자(501-531)가 32分으로 나눈 것이 틀림없습니다. 여기서 확인되는 것은 그 귀신같은 소명태자도 공空이란 단어를 쓰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전적으로 소명태자의 탓이 아니라 그 당시에는 전혀 새로운 개념에 대한 '대체어'를 찾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마치 '인터넷'이란 개념을 대체할 우리말이 아직 정착되지 못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경우입니다. 그 '대체어'는 일반인들도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으로 널리 알려지고 보편화된 후에야 사용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중국에서 불경佛經을 처음 번역한 것은 기원 직후의 일로 지금으로부터 약2천여 년 전의 일입니다. 당시 최초로 번역한 불경이 '42장경'입니다. 그런데 중국에 최초의 번역경이 등장한 이 시기는 불교사적으로 보면, 이미 인도에서 불교가 발생한 지 500~700년이란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때 입니다. 이 역시 인도에서는 이미 불교가 아주 대중적이고 보편적 사상이 되었음을 시사합니다. 현재를 기준으로 비교하면 임진왜란 때의 일이 이제야 알려진 것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중국에 '최초의 불교'가 알려질 때 인도에서는 이미 수출된 불교사상은 사라지고 새 불교인 이른바 '대승불교'가 흥기하게 됩니다. 요즘이야 세계 곳곳에 인터넷이나 무선통신으로 실시간 연결되는 천안통天眼通, 천이통天耳通이 실현되었지만, 그 당시로서는 직접 가서 읽고 오거나 경전의 원본이나 필사본을 가져오는 방법밖에 없을 테니 사상의 국외 수출은 간단한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더욱이 사상의 수출은 생각의 바탕이 공유되거나 일반화되어야 가능한데 그런 면에서 보더라도 사상의 수출입은 큰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인도에서는 이미 대승사상으로 발전해 간 불교가 중국에 처음 수입이 되자 사상적으로 예기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불교를 표현할 마땅한 단어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 중국에는 이미 공자와 노자의 사상은 충분히 전개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공노'孔老의 사상에 불교를 담고 표현해 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언어적 표현의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던 시대의 중국불교를 격의格儀불교라고 합니다. 무위無爲 같은 말도 실은 도가道家의 용어이지 불교의 용어는 아닙니다. 그러고 보니 道란 말도 그렇습니다. 차라리 우리말 '깨달음' 혹은 '깨침'이 우리에게는 더 실감나는 말인지 모릅니다. 격의불교는 중국에서 불교가 사상적으로 독립된 대우를 받을 때까지 계속되는데, 불교가 독립된 대우를 받은 것은 바로 공空이란 단어를 불교 전문용어로 채택하면서부터입니다. 그러니 '공'이란 단어가 불교에 있어서 얼마나 큰 사상적 도약이며, 또한 대중에 뿌리를 내렸음을 뜻하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공이 불교 전문용어로 처음 등장하는 반야심경은 현장스님의 번역했는데, 현장스님은 서기 602년에 출생하여 627년에 장안을 출발하여 인도로 향했고, 645년에 다시 장안으로 돌아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후 인도에서 모셔 온 불경을 번역하는데 일생을 바쳐 무려 75종 1,335권을 한문으로 번역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들로 보아 그전에는 못 보던 '공'이란 단어가 등장하는 반야심경은 적어도 645년 이후에 한역된 것이 틀림없습니다. 금강경을 처음 도안스님이 한역한 것과 비교하면 '공'이란 단어를 발견하는 데 300년 이상이 걸린 셈 입니다 이제 이 문제가 한국불교와 관련하여 무엇을 시사하는지 짚어 보아야 할 듯합니다. 아, 그전에 현장스님이 인도로 구도의 길을 다녀오는 역사적 사건이 설화처럼 꾸민 것이 서유기임을 다들 아실 것이라 믿고, 싱거운 소리 하나 하겠습니다.
손오공이 삼장법사를 모시고 가던 중 이번에는 만만찮은 수의 요괴들을 만나게 되었다. 이에 손오공이 머리털을 한 움큼 뽑아 예의 분신술로 수많은 손오공을 만들어 대적하였다. 그런데 한쪽에서 머리가 허옇고, 흰 도복을 입은 ‘노인’이 열심히 싸우는 것이었다. 이에 손오공이 다가가 말하였다. “아니, 왠 영감님까지 나서서 싸우십니까?” 이에 그 ‘노인’ 하는 말, “저… ‘새친데요’.”.
※ 성법스님 '마음 깨달음 그리고 반야심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