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보감(人天寶鑑)
적실 광(寂室慧光 :宋 운문종)선사가 영은사(靈隱寺) 주지로 있을 때였다. 그의 형이 찾아왔는데 차만 끓여주고는 물러가 버리니 형이 내심 불쾌하게 생각하였다. 소임맡은 이가 창고 방으로 맞아들여 음식을 잘 대접하였는데, 혜광선사는 그 이야기를 듣고 “음식을 대접받으면 뒷날 나에게 누가 되는 일이었다”하고는 형에게 대접받은 만큼 채워 놓고 떠나게 하였다.
장령 탁(長靈守卓:1065~1123)선사는 무시(無示介講 :1080~1148)선사를 입승(立增:선원생활의 책임자)으로 임명하여 법석을 엄숙하게 하였다.
부엌일에는 선경을 쓰지 않았고 오직 참선으로 공양을 대신하고 야참법문으로 저녁공양을 대신하게 하니 납자들 중에는 이런 생활을 참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자 무시선사가 수탁선사에게 아뢰었다.
“사람이란 먹는 일을 우선으로 생각하는데 이렇게 헤서야 대중이 편안하겠습니까.”
수탁선사가 노여워하며 말하였다.
“당돌하고도 경솔하구나!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가.”
그러자 무시선사는 “먹는 일에 관해서라면 제가 아니면 누가 따지겠습니까?”라고 하였다.
효종(孝宗)이 불조(佛照德光 : 1121~1203)선사에게 손수 쓴 글을 내려 말했다.
“선사께서 말씀하신 보살10지(菩薩十也)란 수행해 나가는 단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범부에서 성인의 경지에 들어감을 어찌 의심하겠습니까.
실다운 경지를 몸소 밟아 하루 스물네시간 한번도 끊어지는 적 없이 완전하게 익어진 경지에 이르면 더러움과 깨끗함이 모두가 장애가 되고, 작지임멸(作止任藏)*이 다 병통(揮病)이 되는 줄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선사께서 말씀 하신대로 항상 마음의 칼을 휘둘러 등뼈를 곧추세우고 발심정진을 해도 오히려 물러날까 걱정스럽습니다.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되면 늘 조심스러워 한번도 감히 소홀해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속인들은 선을 허공에 뜬 것이라 생각하고 교학을 희론으로 생각하니 그들은 이토록 도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 지극히 큰 일을 어찌 붓으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그저 내 생각을 적어볼 뿐입니다.”
자항 박(慧散子朴 :宋 임제종)선사는 복주(福州) 사람이다. 명문집안에서 태어났으나 홀연히 허깨비 같은 푼 세상이 싫어 몸을 빼내 출가하였다.
선사가 계를 받을 때 톰과 마음이 공중에 뜬 것처럼 가볍고 편안해지니 계를 내라는 스님이 “그대는 참으로 가장 높은 묘계(上品妙戒)를 얻었다”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종신토록 매우 엄하게 계를 지켰다.
20년 동안 천동사(天童寺)에 주지하면서 하루도 대중과 따로 공양을 한 일이 없고 병에 걸렸을 때도 이 규칙을 어기지 않았다. 스스로는 몹시 검소하게 지냈으나 대중들에게는 지극히 넉넉하게 대했다. 선사에게 제자 한 사람이 있었는데 창고 소임(知庫)을 맡아보다가 일을 끝내고 돌아와 선사에게 절하고 말하였다.
“제가 힘을 다해 경영해서 돈을 굴려 배나 이득을 보았는데 감히 제 것으로 하지 않고 절 재산으로 넣으려 합니다.”
그러자 선사가 화를 내며 말하였다.
“네가 벌어들인 것은 의롭지 못한 수단으로 얻은 것이며, 절 재산은 깨끗한 재산이다. 어찌 의롭지 못한 너의 물건을 받아들이겠느냐.”
그리하여 끝내 받아들이지 않고 그 스님을 쫓아 내버렸다.
선사는 동자승이 머리를 깎고 먹물 옷을 입으면 그들을 모두 사미들의 거처〔沙觸察〕에 보내 계단(械樓)에 올라가 계를 받는 의식절차부터 익히게하고, 유교경(遺錯經)을 외우게 하고 나서야 구속계를 주었다. 구속계를 받으면 모두 새로 계 받은 이들의 거처〔新歲察〕에 들여 보내 승복 세 벌과 발우 하나를 받아 지니도록 하고, 밤이면 좌구를 펴고 오조 가사를 덮고 자게 하였다. 그리고는 계경(職經) 잘 외우는 스님 하나를 청해 그들에게 계경을 가르치도록 하여 통달하여 외울 때가 되면 비로소 선방에서 참구하는 것을 허락하고, 이삼년 하안거를 지내고 나야 비로소 절 일을 맡아보도록 하였다.
제방에 행각 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으면 선사는 언제나 미간에 기쁜 기색을 보이며 기꺼워 하였다. 그리고는 필요한 물건들을 챙겨서 길을 독촉해 보냈다.
한번은 그의 문도들에게 이렇게 훈계하였다.
“예전에는 스님이 되려하면 조정에서 시험을 치루어 도첩을 얻게 하였다. 그래서 발심해서 승려가 된 사람들이 모두 영특하고 수행이 높았으며 부처가 되겠다고 서원을 세운 선비였다. 그런데 지금은 불법이 엷어져서 이름만 있지 알맹이는 없어졌다. 그래서 돈이 많은 사람이면 승복을 입고 돈이 넉넉하지 못한 사람은 부처를 팔아 이득을 본다. 탐욕스런 위선자들이 많이 나와 못하는 일없이 나쁜 짓을 하다가 하루 아침에 승려의 무리 에 끼어 들게 되었다. 그들은 스스로 평생 쓸 만큼이 다 마련되었다고 생각하여 다시는 사욕을 극복하는 수행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인과를 무시해버리고 세월을 허송하며 신도들의 시주만 부질없이 없앤다. 이런 사람들은 모두 출가의 본뜻〔正因〕을 잊고 불법의 인과를 모르며, 3승 12분교를 이해하지 못하고 일체법이 모두 공한 이치를 통달하지 못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얻지 못한 것을 얻었다 생각하고 깨치지 못한 것을 깨쳤다 생각하여 귀족이나 권세가에게 아첨하면서 세상 일에만 신경 쓴다. 법을 위하는 마음이나 몸가짐이라고는 전혀 없고 오로지 탐욕과 성내는 마음으로 허물만 짓는다. 이러한 무리들이 우리 법에 들어와 불법을 무너뜨리니 매우 해로운 일이다. 부처님 말씀에, 사자의 몸 속에 있는 벌레가 사자의 살을 파먹는 것과 같아서 외도나 천마가 불법을 파괴히든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너희들은 이미 바른 생각으로 출가하였고 바른 생각으로 승려가 되었으니 반드시 마도를 멀리 떠나 불도의 계를 지키고 따라야 한다. 만일 도를 통한 사람이라면 도무지 그런 데다 마음을 쓰지는 않을 것이다.
그대들은 오랜 겁부터 지금까지 심식(心識)이 어둡고 전도되었으니 어찌하랴. 처음 승려가 되었을 때부터 세 벌 법복과 발우 하나와 갖가지 계율로 자기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도에 들어갈 수가 있겠느냐. 마치 성질이 거친 코끼리나 말은 길을 들일 수 없다가 갖가지 모진 고통을 주변 비로소 길아 들어 엎드리는 것과 같다. 만일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뒷날 3악도의 고통이 겹칠 것이니 그때 가서 후회한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가 무시(無示)선사의 회중에 있을 때 새벽 날이면 언제나 선사에게 법을 물었다. 선사가 스님네들에게 훈계하면 나도 꼭 가서 들었는데, 업이 쓰도록 대중을 위하는 말씀을 듣자면 나도 모르게 눈물 콧물이 흘렀다.
무시선사의 문하에 들어와 그가 해주는 법문을 듣고 그가 하는 일을 보면 절 집에서 늙은 사람이라도 누구나 땀을 흘리며 기가 죽는다. 그것은 아마도 이 노스님이 평생을 진실하게 지내온 데다가 수행과 설법이 모두 높은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일 것이다. 선사는 40여 년을 때가 아니면 밥을 먹지 않았고 옷과 발우를 쌓아두지 않았으며 몸을 지키는 세세한 행동까지도 모두 계율을 따랐다. 그랬기 때문에 선사가 가시 주지하는 곳은 소리를 지르거나 얼굴빛을 움직이지 않고도 자연히 법석이 조용하고 엄숙하여 제방에서는 그를 철면(鐵面)이라고 불렸다. 너희들은 불제자가 되었으니 분발심을 내서 옛분을 흠모하고 그분들의 말씀대로 수행을 세워 비열하고 저속한 곳에 떨어지지 말아야한다.
무시선사가 언제나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가 볼법을 이끌어 가는 사람으로서 방편으로 그대들을 가르쳐 마음을 다스려 도를 닦게 하지 못하고 뒷날 그대들이 무지로 해서 죄를 짓게 되면 이 노승도 그대들과 함께 고통받는 일을 변치 못할 것이다. 그럼으로 지금 그대들에게 들려주는 것이니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것은 나의 허물이 아니다. 듣지 못했느냐?’
양(良)선사란 사람은 정주(靖州) 사람으로 양기(楊岐方會)선사의 회하에 있었던 큰스님이다. 이분에게 제자가 하나 있었는데 계율을 범해서 죽을 무렵에 악도에 떨어지게 되었다. 그의 어머니가 꿈을 꾸었는데 아들이 스승에게 한을 품고 하는 말이 모든 것이 스승께서 나에게 선행을 하도록 아끌어 주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고통을 받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였다. 그의 어머니가 꿈꾼 이야기를 양선사에게 알렸으나 그는 믿지 않았다.
당시 용도각(龍圖開)의 덕점(德古) 서희(徐續)가 평민으로 있을 때였는데 양선사를 찾아가 법을 묻곤 하였다. 그가 잠깐 꿈을 꾸니 어느 관청에 들어 갔는데 무기를 든 병졸들이 양쪽에 빽빽이 늘어서 있었다. 자세히 보니 뜰 아래 양선사가 앉아있고 졸개귀신들이 방아공이로 그의 등을 때리는데,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온통 진동하였다. 다시보니 그의 제자가 결박을 당하고 목칼을 쓴 채 그 옆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덕점이 문지기에게 스님이 무슨 죄를 지었느냐고 물으니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늙은 사람은 젊은 사람의 스승인데 스승이 평소에 제자를 잘못 가르쳐서 마음대로 파계하도록 내버려 두었으므로 스승의 죄가 특히 무거운 것이다. 이것은 오히려 살아서 받는 과보이지만 7일 뒤에는 제자와 함께 무간지옥에 떨어질 것이니 그땐 정말 고통스러울 것이다.’
서희가 꿈에서 깨어나 양선사에게 까닭을 물어 보았더니 양선사가 말하기를 ‘이 며칠 동안 등허리가 마치 무엇으로 두드려 맞는 것처럼 아픈데 약을 써도 낫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과연 7일 만에 죽었다. 이에 서희는 주먹만한 큰 글씨로 분녕(分寧)지방 모든 절 벽에다가 이 사실을 써 붙였다. ”
법지존자(法智尊者)는 학식과 수행이 뛰어난 분이었다. 그가 지은 모든 저술은 종지를 세우고 삿된 이론을 물리쳤으며, 사람들의 마음을 활짝 열어 주어 진실한 경지에 이르도록 하였다. 존자가 한번은 핵심 되는 내용을 뽑아서 책을 만들었는데, 완성되자 설두현(雪寶重顯)선사가 그것을 가지고 산을 나와서 재를 올려 축하하였다. 이어서 다회(茶會)를 열고 방을 써붙여 그 일을 찬미하였다. 이렇게 예전에는 선과 교가 하나가 되어 서로 그 분위기나 취향을 존중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것임을 알 수 있다. 선과 교가 서로를 헐뜯고 매몰시키려는 지금과는 함께 논할 바가 아니다.
구양문충공(歐陽文忠公:修)이 숭산(崇山)에 갔을 때였다. 마음 닿는 대로 가다가 어느 옛 절에 이르니 경치가 쓸쓸한데 한 노승이 태연히 경을 읽고 있었다. 공이 말을 걸어도 별로 돌아보지도 않았다. 공이 물었다.
"옛 고승들은 생사의 갈림길에서도 대체가 담소하면서 업적 하셨는데 무슨 도리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 스님이 대답하였다.
“정혜(定慧)의 힘으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어째서 지금은 그런 인물이 없습니까?”
“옛 사람은 생각 생각이 정(定)에 있었으니 임종여라해서 어떻게 흩어〔散〕질 수가 있었겠습니까. 지금 사람은 생각 생각이 산란함〔散〕에 있으니 임종에 어떻게 정(定)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문충공은 이 말을 듣고 탄복하였다.
* 「원각경」·보안보살장에서 설명하는 네 가지 병통. 작(作)은 어떤 목적을 위해 꾸준히 작용되는 것, 지 (止)는 그 작용을 그치는 것, 임 (任)은 되는 대로 놔두는 것, 멸(滅)은 적멸을 추구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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