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

[성철스님] 인천보감(人天寶鑑) 22

通達無我法者 2008. 1. 21. 08:59

인천보감(人天寶鑑)

황룡 심(黃龍祖心)선사는 남웅(南雄)사람이다.
유생으로 이름을 날렸는데, 열아홉살에 눈이 멀어 부모가 출가를 허락하자 홀연히 다시 보게 되었다. 행각하면서 남(黃龍祖心)선사를 찾아 뵈었는데 비록이 일을 깊이 믿기는 하였으나 깨닫지는 못했다.
그리하여 하직을 하고 운봉(雲峯文脫)선사의 회하에 갔는데 운봉선사가 세상을 떠나자 석상(石露楚圓)선사에게 가서 머물렀다. 거기서 전등록(傳燈鎭)을 보다가 한 스님이 다복(多福)선사에게 묻는 것을 읽었다.
“무엇이 다복의 한떨기 대(竹)입니까?”
“한두 떨기는 비스듬하다.”
“잘 모르겠습니다.”
“서너 떨기는 굽었다.”
선사는 이 대목에서 문득 두 분 선사의 면목을 보게 되었다. 그 길로 혜남선사에게 돌아와 제자의 예를 올리고는 좌구를 펴고 앉자 혜남선사가 “그대는 내 방에 들어왔다” 라고 하였다. 선사도 뛸 듯이 기뻐하면서 응수하였다.
“큰 일이란 본래 이런 것인데 스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사람들에게 화두를 들게 하십니까?”
“만일 네가 깊이 참구해서 마음 쓸 곳 없는 경지까지 가게 하고, 거기서 스스로 보고 스스로 공정하도록 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너를 매몰시키는 것이다.”
마침 혜남선사가 입적하자 스님들과 신도들이 선사에게 그 뒤를 이어달라고 청하였고 사방에서 귀의하여 혜남선사가 있을 때 못지 않았다. 그러나 선사는 진솔함을 숭상해서 일하는 것을 즐기지 않았으므로 다섯 번이나 그만두겠다고 해서 마침내 주지를 그만두게 되었다. 얼마 안돼서 사사직(謝師植)이 담주(團州) 태수가 되어 대위산(大僞山)에 주지자리가 비었다고 선사를 초청하였다. 선사가 세 번이나 사양하자 또 강서(江西)의 전운사(轉運使)인 팽기자(影器資)에게 부탁해서 장사(長沙)를 마다하는 이유를 알려달라고 청하니 선사가 말하였다.
“마조나 백장스님 전에는 주지란 것이 없었고, 도인들은 서로 고요하고 한가한 곳을 찾아다녔을 뿐이다. 그 후에도 비록 주지란 제도가 있었으나 왕처럼 존경을 받아 인간과 하늘의 스승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이름을 관기에 걸어 놓고 바로 심부름꾼을 보내 오라 가라 하니 이 어찌 다시 할 짓이겠는가.”
팽거자가 그대로 전하자 사사직은 다시 편지를 보내 “한번 만나보고자 할 뿐 감히 주지 일로 서로를 궁색하게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선사는 사방의 공경대부와 사귀는 데 있어서 뜻이 맞으면 천 리라도 가지만 뭇이 맞지 않으면 수십 리밖에 안 되는 곳도 가지 않았다. 선사는 불전(佛典)뿐 아니라 다른 책들을 가지고도 자세히 따져가면서 법문하여, 저마다 공부해 온 것을 바탕으로 욕심을 극복하고 스스로 보게 하였다. 그리하여 깨닫게 되면 같은 길로 돌아오게 하고, 돌아오면 가르칠 것이 없었다. 이 일로 제방에서는 다른 책과 불전을 뒤섞어서는 안 된다고 비난하니 선사가 말하였다.
“견성을 못하면 불조의 비밀한 말씀도 모조리 바깥 책이 되고, 견성을 하면 마구니 설이나 여우선도 불조의 비밀한 말씀이 된다.”
이런 까닭에 40년 동안 그의 도풍을 듣고 깨달은 사대부가 많다.
황정견(黃庭堅)은 오래 전부터 수가를 받은 일로 큰 법을 맡아볼 만한 사람이었으나 안목이 아직 완전하지 않았다. 그는 선사의 탑을 칭f아와 보고 직 서는 크게 우러러보는 마음으로 깊은 탄식을 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단단한 옥돌에 글을 새겨 선사가 남기신 아름다운 자취를 공경히 송하였다.
굉지 각(宏替正覺)선사는 습주(照州)사람이다.
행각을 나서기 전에 미리 천동사(天童寺)의 경관을 꿈꾸고는 그것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우거진 솔밭 길, 깊숙한 문에 갔을 때는 희미한 달, 바야흐로 황혼이었네.”
건염(建炎 : 1127~1130)년 간에 장노사(長盧寺) 주지를 그만두고 보타암(寶陀嚴)의 진헐(眞歇淸子)선사를 찾아가는 길에 천동사에 도착해 보나 그 경관이 꿈에서 본 것과 똑같았다. 그리하여 관청에서 천동사 주지를 맡아 달라고 간독히 청했으나 굳게 거절하였는데, 뒤에 납자들이 어깨를 비비며 법좌를 찾아오자 힘써 받아들였다. 30년을 주지하 면서 불법을 전하는 일 밖에도 살림살이를 새로 잘 갖추어 항상 천여 명의 대중이 살았다. 공양거리와 필수품이 넉넉하여 가장 부자 절이 되니 납자들은 편안하게 도에만 힘쓸 수 있었다.
선사가 한번은 대중을 위해 걸식을 나갔다. 오월(吳越)지방 사람들은 그의 교화를 독실히 믿고 있었기 때문에 돈과 베 동의 시주가 구하지 않아 도 모여드니 선사가 여러 시주에게 말하였다.
“내가 시주를 받는 것은 그대들의 인색한 마음 을 깨주려 함이니 나에게만 시주할 것이 아니라 뒷날 작은 절에서 스님이 찾아오면 거기에 시주하기 바란다. 혹은 궁핍환 절을 보거나 노약자동 딱한 백성을 보거든 옷과 돈을 시주하여 그들을 기쁘게 해 주어라.’ 선사는 물건을 쌓아두는 일이 없었고 쓰다가 떨어지면 그대로 지냈다.
철괴(哲魁)라는 습주(購州)스님이 있었는데 꿋꿋한 사람이었다. 고향이 어디라고 말하지 않고 선사의 회하에 묻혀 지냈는데, 10여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그가 굉지선사의 고향사람이라는 것이 알려지게 되었다. 굉지선사는 기쁘게 찾아가서, 고향 사람인데 너무 인정을 끊고 지내는 것이 아니냐며 그를 방장실로 불러들이려 하였다. 그러자 철피스님이 사양하며 말하였다.
“내 일도 아직 가리지 못했는데 어찌 고향 예법을 논할 겨를이 있겠습니까?” 그리고는 주장자를 끌고 떠나버리니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그는 그 길로 예전에 진헐스님이 살던 보타암을 찾아가 좌선을 하며 지냈다. 한달 남짓 지나 엄종하게 되자 대중을 불러 설법을 하고는 세상을 떠났는데, 다비를 하니 사리가 무수히 나왔다.

빙제천(碼濟川 : ? ~1153)거사가 장경(藏經) 보시를 하면서 발원문을 저었는데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제가 장경을 시주한 것은 한 가지로 두 가지 시주를 한 것입니다.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내가 장경에다가 돈을 낸 것은 재물보시가 되고, 그 경으로 법을 전하는 것은 법 보시가 됩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살펴보건대, 재물보시로는 다음 생에 하늘이나 인간세상에 태어날 복된 과보를 받고, 법보시로는 세상에서 가장 지혜롭고 말솜씨가 좋은 사람이 되는 과보를 받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과보가 모두 윤회의 씨앗이며 괴로운 과보의 근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제가 이제 발원하오니, 이 두 가지 과보를 회향하여 엄종할 때 극락에 왕생하여 그곳을 장엄하게 하여지이다. 연꽃 태(服)에서 나와 부처님을 뵙고 그 법문을 들어 무생법인(無生法忍)을 깨닫고 물러남이 없는 자리에 올라 보살지위에 들어가게 하여 지이다. 그리하여 시방세계의 5탁악세에 다시 돌아와 어디든 내 몸을 나타내 불사를 하게 하여지이다. 오늘 재물과 법, 이 두 가지를 보시한 인연으로 관세음보살같이 대자비를 갖추고서 5도(五道:지옥·아귀 ·축생 ·사람·하늘)에 노닐되, 그 중생의 모습대로 몸을 바꾸어 갖가지 묘한 법문 설하게 하여지이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고통의 길을 멀리 여의고 지혜를 얻게 하며, 모든 중생과 더불어 성불하게 되어지이다. 이것이 제가 장경불사를 하면서 발원하는 것입니다.”

북봉 인(北輩印)법사는 잠자는 것을 경계하는 글을 지었다.
“불법은 멸해가는데 허깨비 같은 몸뚱이를 기르는구나. 그러나 이 냄새 나는 몸은 끝내 재가 되고 흙이 되니, 조금이라도 불법을 세우려다가 죽는다면 정말로 대장부가 아니겠는가”
또 말하였다.
“다른 사람보다 말만 잘한다고 해서 일을 잘하는 것은 아니니 행동이 다른 사람보다 나아야 한다. 만일 자기 자신에게 한 점 쓸모도 없다면 비록 천만 가지 경론을 외운다 해도 마치 아닌 존자와 같을 것이니 무엇이 귀하겠는가.”
또 말하였다.
“한번은 식견 있는 사람과 불교집안을 일으키고 빛나게 하려면 주지가 어찌해야 되는지에 대해 이야기 하였는데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부지런히 예불 올리고 재물을 결백하게 쓰며 대중을 위해 일하면 그 뿐입니다.’ 나는 이 말이 극진한 도리라 고 생각하며 매우 기뻐한다. 만약 식견 없는 사람과 이야기 했다면 땀을 흘리며 세상을 쫓아가야 한다고 했을 것이니 그것은 납숭 본분의 체통을 잃는 일이다.”

도담(道壘)법사는 상주(常州)사람으로 선정을 닦던 중 자인삼매(慧忍三妹)를 얻었다. 늘 원숭이와 새들이 꽃과 과일을 공양하니 그들을 위해 계를 주고 설법을 해서 보냈다. 밤이 되어 귀신에게 밥을 줄 때면 “내 밥을 먹고 내 법을 받아 내 도반이 되어라”하며 축원하였다. 90여 세가 되어서도 사방에서 와서 스승으로 모셨는데, 법을 받은 사람은 모두 신참 소년이었다.법사는 경을 읽을 때면 언제나 향을 사르고 아홉 번 절한 다음, 기부좌 한 채 한참을 묵묵히 있은 뒤에야 책을 열었다. 항상 문도들에게 이렇게 훈계하였다.
“성인의 가르침을 엿보는 목적은 종지를 밝히기 위해서이니, 만일 자기률 단정히 해서 마음을 비우지 않으면 어떻게 여래의 경계에 갈 수 있겠는가. 참으로 작은 인연이 아니니 쉽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곽도안(郭道人)의 집안은 대대로 철공 일을 해왔다. 그는 늘 경덕사(景德츄) 충(忠)선사를 찾아뵙곤 하였는데 한번은 충선사가 이렇게 말하였다.
“그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버리고, 스스로에게 묻고 참구하기만 한다면 해내지 못할 것이 없다.”
하루는 충선사가 상당하여 법문하였다.
“선악은 뜬구름 같아서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것이 모두 자리가 없다.”
곽도인은 이 말 끝에 흘연히 마음이 열리면서 이때부터 하는 말이 보통사람과 달랐다.
죽을 때 가서는 친척 친구들과 작별하고 결가부좌를 한 채 게를 짓고 떠났다.
“육십삼년을 쇠를 두들겨
밤낮으로 풀무가 쉴새 없었네
오늘 아침 쇠망치를 버리고 나니
붉은 화로가 흰 눈이 되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