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법
관법을 주로 하시는 분은 눈을 뜨시는 것이 좋지요. 그러나 관법을 않고 화두나 염불을 하시는 분들은 감고 뜨는 것은 알아서 하시지만 원칙은 반폐반개(半閉半開)라 하여, 본 듯 만 듯 하는 것입니다. 보는 것도 아니고 안 보는 것도 아닌 상태입니다. 그와 같이 모두가 자연스럽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기왕이면 정면을 똑바로 보는 것이 낫습니다. 훨씬 혼침이 덜합니다. 고개를 아래로 숙여 버리면 그때는 꾸벅꾸벅 혼침이 더 빨리 옵니다.
모두가 다 진여불성인데 우리는 진여불성 부처님을 보지 못합니다. 모든 관법이나 주문이나 화두 등은 보지 못하는 우리 중생이 볼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가령 일상관은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가는 해를 보고서 공부하는 관법입니다. 서쪽으로 해가 넘어가는 것을 자꾸 생각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거기에 따라서 마음이 모아지고 정말로 해와 같은 광명이 보인단 말입니다. 원래 광명이 없으면 그렇게 보이겠습니까? 원래 천지우주에는 우리 중생이 보는 눈부신 빛이 아닌, 청정미묘한 빛이 항시 충만해 있습니다. 진여불성은 생명의 빛이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공부하든지 공부가 사무쳐서 정말로 마음이 모아져서 망상이 줄어들면 차근차근 빛이 비춰 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부할 때, 이렇게 공부해 나가면 아주 행복스러운 진여불성의 빛이 비추어 오겠구나, 하는 기대를 가지고 해야 좋습니다. 없는 허상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빛은 있는 것이기 때문에 빛을 미리 생각하고 공부하는 것은 공부에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광명관 또는 일상관이라는 관법이 있습니다.
또는 법계관도 있습니다. 법계관은《화엄경》의 가르침에 일치하는 관법인데, 우주 모두가 다 진여불성의 순수 청정미묘한 광명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도 공부에 손해가 없습니다. 다만 문제는 '내가 지금 한 치 앞의 진여불성 자리를 못 본다 하더라도 일체 존재가 어김없는 진여불성뿐이다' 이렇게 믿고 화두나 주문 혹은 염불이나 관법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어떤 공부를 해도 무방합니다. 손해가 없습니다.
다만 혼침이 올 때는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서 애써 화두나 염불이나 관법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좀 들뜨면 가만히 놓아 버리고서 그냥 호흡만 해도 무방합니다. 따라서 마음에 혼침이 올 때 일깨우는 요령 또는 마음이 들뜰 때 가라앉히는 요령, 그런 것은 자기 스스로 해보시면 짐작이 됩니다.
이렇게 해야 이른바 정(定)과 혜(慧)가 쌍수(雙修)가 됩니다. 우리 진여불성 자리는 원래 지혜와 선정이 같이 온전히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의 공부도 지혜와 선정이 병행되어야 진여불성하고 빨리 하나가 됩니다. 따라서 항시 '모두가 다 허망한 것이고 있는 것은 결국 청정미묘한 진여불성뿐이다' 이렇게 비추어 보는 반야의 지혜를 닦아야 하며, 거기다가 진여불성을 생각하는 우리 마음을 이어가야 합니다. 그 마음을 지속시키는 것이 이른바 참다운 삼매입니다. 그렇게 해야 정혜쌍수가 됩니다.《보조국사 어록》의 대요는 돈오점수(頓悟漸修)입니다. 즉 먼저 문득 본래 부처인 것을 깨닫고서 그 다음에 거기에 입각해서 차근차근 닦으라는 것입니다. 돈오점수나 돈오돈수(頓悟頓修)나 원래는 다 똑같은 뜻입니다. 해석상의 차이일 뿐입니다. 그리고《도서(都序)》나《화엄경》이나《보조국사 어록》이나 모두가 다 그 대요는 돈오점수와 정혜쌍수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비록 일체 존재의 본래면목이 부처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할지라도 아직 범부이므로 그것을 증명하지는 못하겠지요. 그러므로 이치로써 깨달은 힘을 따라서 그 자리를 점차로 닦아 나간단 말입니다. 닦아 나가되 모두가 부처라는 반야의 지혜를 놓치지 않고 지속시켜야 합니다. 그것이 정(定)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이제 지관균등(止觀均等)이라는, 즉 지(止)와 관(觀)이 어우러지는 것이고 정(定)과 혜(慧)가 같이 어우러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어야 마치 부처님 경전이나 논장(論藏)에서, 새는 양쪽 날갯죽지가 있어야 잘 날고, 달구지는 양쪽 바퀴가 있어야 잘 달린다고 비유한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공부도 본래 불성이 갖추고 있는 지혜와 자비를 함께 닦게 되어, 이른바 진여불성과 계합이 잘 됩니다.
- 적게 먹기
이렇게 해서 공부를 하시되 음식도 가려야 합니다. 음식은 우리 공부에 굉장히 중요합니다. 음식을 많이 먹으면 그야말로 그런 원수가 없습니다. 공부할 때는 항시 위장이 좀 빈 듯한 상태라야 혈액순환이 빠르고 몸이 가볍습니다. 그런데 위에 무엇이 많이 들어 있으면 뇌에 있던 산소가 위장의 음식을 소화시키려고 위장으로 가버립니다. 그러면 결국 머리도 무겁고 혼침도 오고 그럽니다.
그렇기 때문에 음식을 많이 먹으면 식곤증(食困症)이 옵니다. 음식과 우리 공부는 굉장히 밀접합니다. 이런 관계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화두를 많이 하려면 고기도 먹어야 하고 다른 음식도 많이 먹어야 기운을 내고 공부도 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런 분들은 정말로 뜨겁게 생명을 내던지고 공부를 해본 경험이 없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부처님 계율은 모두가 우리 중생들의 공부를 위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부처님 말씀에는 거짓말이 한마디도 없습니다. 우리 중생의 허물을 벗겨서 성자의 몸이 되고 성자의 마음이 되게 하려는 법문입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적게 먹으라고 했으면 적게 먹어야 합니다. 따라서 될수록 배가 고플 정도로 잡수시면 몸도 가볍고 마음도 가볍고 공부가 잘 되어 갑니다.
적게 먹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계(五戒)에는 없지만 사미십계(沙彌十戒)에는 "때가 아닌 때에는 먹지 말라"고 하는 불비시식(不非時食)이란 계가 있습니다. 지금은 모두들 계율도 그냥 잊어버리고 '적당히 하면 되겠지' 하지만, 부처님 경전에서 하신 말씀은 모두가 다 꼭 우리 중생을 성불로 이끄는 말씀입니다.
'때 아닌 때'라는 것은 오후를 통틀어 말합니다. 때 아닌 때에 먹지 않으면 소음(少淫), 즉 음탕(淫蕩)한 마음이 줄어들고, 소수(少睡), 즉 잠이 줄어들고, 득일심(得一心), 즉 마음이 하나로 빨리 모아지고, 무하풍(無下風), 즉 몸에 방귀도 안 생기고, 신득안락(身得安樂), 즉 몸에 안락함이 있습니다. 이것이 모두 부처님께서 경전에서 말씀하신, 오후불식(午後不食)을 한 사람에게 오는 다섯 가지 복입니다.
우리 젊은 스님네들은 이성에 대한 음욕 때문에 항시 괴로움을 받습니다. 혈기가 왕성할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따라서 어떻게 음욕을 줄일 것인가 하는 문제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고기를 많이 안 먹고 기름기 있는 것을 많이 안 먹고 하는 것은 모두가 다 그런 데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음욕은 줄어들고, 욕심도 잠도 줄어듭니다.
우리가 백 근, 이백 근 무거운 짐을 지고 어디를 간다면 모르겠지만, 마음공부 하려고 한다면 많은 활력이 필요치 않습니다.
갑자기 오후불식을 하려면 장애가 있을 것입니다만, 아무튼 우리는 그렇다는 것은 알고 있어야 합니다. 알고서 공부해야 손해가 안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백장청규(百丈淸規)에도 역시 조죽중재(朝粥中齋)라 하여, 아침에 죽을 먹고 낮 한 때 재를 먹습니다. 오후에는 안 먹는다는 말입니다. 작업을 할 때는 간식을 조금 먹습니다만, 그래도 오후불식이 원칙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사람들은 근기가 약해서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들 합니다만, 지금 사람들이 옛날 사람들에 비해서 근기가 절대로 약하지 않다고 봅니다. 두뇌로 보나 무엇으로 보나 훨씬 더 영리합니다. 요즘 사람들이 장수하는 것 보십시오. 옛날에는 평균 수명이 40세 정도였는데 이제 한국도 평균 수명이 70이 넘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보면 지금 사람들의 근기는 절대로 약하지가 않습니다. 다만 자기 몸 관리를 너무 과다하게 합니다. 너무 많이 먹고 함부로 합니다. 따라서 어디서 공부하든지 우리 불자님들이 금생에 성불하려고 마음 먹을 때는 꼭 음식을 염두에 두고, 부처님 계율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겁초(劫初)에 인류는 음식을 먹어야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겁초 인간은 우리처럼 이런 몸이 아니고 광명으로 이루어진 몸이었기 때문에 음식을 섭취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차츰 오염되어서 이렇게 각 원소 집합체인 세포가 우리 몸을 이루게 되었고, 따라서 에너지가 소모되므로 이것을 보충하기 위한 음식이 필요해졌습니다. 설사 그렇더라도 우리에게 꼭 필요한 정도만 섭취하자는 게 계율의 근간입니다. 도인들이 우리 생리를 관찰해서 계율을 세웠던 것입니다. 우리는 부처님 법문에 대해서 어떤 면에 대해서든 생리나 심리 모두 전폭적으로 믿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셔서 꼭 선오후수(先悟後修), 돈오돈수(頓悟頓修)하셔야 합니다. 이런저런 모든 것을 타성일편(打成一片)해야 합니다. 하나로 모아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이 열립니다. "마음을 열어 버려라"라고 하지만 마음이 무엇인지 모르면 열려고 해도 열어지지 않습니다.
천지우주는 물질이 아닙니다. 공간성과 시간성, 또는 인과율도 초월해 버리면 결국은 다 마음인 진여불성뿐입니다. 이것만이 실상이고 딴 것은 모두가 다 없습니다. 이렇게 분명히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처님 말씀입니다. 이렇게 느끼고 공부하시면 종전에 몸이 좀 거북했다 하더라도 정말로 믿는다면 반드시 가볍게 풀릴 것입니다.
설사 우리 집안의 영가(靈駕)가 와서 우리를 침노한다 하더라도 그냥 제도가 됩니다. 정말로 영가 몸도 비었고, 분명히 모든 것이 다 비어 있는 것이므로 확실히 비었다고 믿고 되뇌이며 공부를 한다면 자기 주변의 영가도 제도를 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자기 공부에 진일보하시기를 간절히 바라 마지않습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불기 2535년 12월, 동안거 결제중인 스님들께 하신 소참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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