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선은 쉬운 것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이내 다시 가을이 오고 하는 것은 누가 막으려고 해야 막을 수도 없을뿐더러, 가장 쉬운 일인 동시에 불변의 우주섭리입니다.
우리가 하는 참선 공부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쉽습니다. 보통은 참선을 특별한 사람들만 하는 어려운 공부로 압니다. 그러나 참선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가장 쉬운 공부입니다. 그래서 불교용어로 편안하고 즐거운 법문, 즉 안락법문(安樂法門)이라고 합니다. 참선은 어디서 빌려 온 것도 아니고 또 다른 것을 보태서 하는 것도 아니고, 다만 우리가 본래 갖추고 있는, 본래 자기의 생명 자체인 마음을 깨닫는 것이기 때문에 가장 쉽고 경비도 가장 적게 드는 공부입니다. 이토록 쉬운 것이 어려운 한자문화권을 거쳐 오면서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참선 공부가 어째서 쉬운가? 이는 우리가 원래 갖추고 있는 생명의 보배를 찾는 것이기 때문에 쉽습니다. 나한테 갖추어져 있는 마음자리, 나한테 갖추어져 있는 보배 가운데 최상의 보배 마니보주, 이것이 마음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도인들은 자기 마음 찾는 공부를 비유해서 '기우멱우(騎牛覓牛)'라 했습니다. 소를 타고서 소를 찾는다는 말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소가 어디에 있는지 안 보이니까, 지금 소를 타고 있으면서도 소를 찾는 격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중생과 깨달은 도인의 차이는 무엇인가. 깨달은 분들은 모든 현상의 본모습을 봅니다. 본성품을 봅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들은 본성품을 못 보고 겉의 현상만 봅니다. 우선 우리는 깨달은 분과 우리 중생의 이런 차이를 분명히 알아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참선이 쉽다는 이유는 어차피 현상적인 것은 본성품으로 자연히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봄이 가면 반드시 여름이 오듯이 우리 중생들은 본래성품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방황하는 나그네가 결국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과 똑같습니다. 기왕이면 우리 중생들은 잘 먹고, 잘 입고, 많이 쓰고, 많이 놀고, 또 높은 감투까지 쓰고 싶어합니다. 이렇게 현상적으로 거기에 얽매여 살아도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산 사람도 역시 어느 땐가는 죽어서 윤회하다가 결국은 본성품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돌아가야 할 것이며 또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고향은 어디입니까? 우리는 그 고향을 부처님 또는 여래(如來)라고 합니다. 여래란 무슨 뜻인가 하면 진리 그대로의 성품을 말합니다. 진리에서 나와서 진리로 간다 하여 여래라 합니다. '같을 여(如)'라는 글자는 바로 진여(眞如)를 말합니다. 진여란 진리(眞理)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여래란 말은 진리에서 조금도 흠축 없이 왔다는 그런 뜻입니다. 따라서 진리에서 왔으니까 다시 진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생각할 때, 진리를 고정불변한 어떤 교리라고 보아서는 안됩니다. 진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데올로기 같은 그런 것도 아닙니다. 진리는 모든 생명을 다 감싸고 있는 일체 존재의 근본자리입니다. 다시 한번 확실히 말씀드리면 우주의 본체가 바로 진리입니다. 따라서 진리는 과거도 없고, 현재도 없고, 미래도 없고 언제나 그대로 있습니다.
- 광명세계
우리는 지금 과학만능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원자력이 얼마나 위력이 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원자력 저쪽 세계는 광명의 세계입니다. 현재 살고 있는 사람을 위시해서 다른 동물이나 식물을 포함한 어떠한 것이나 모두가 생물학적인 술어로 말하면 광합성(光合成), 즉 광명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어떤 식물이든 태양광선이 안 들어간 게 없습니다. 물질의 가장 미세한 저편 세계는 하나의 방사능 같은 방사광명입니다. 그러므로 빛으로 합성되는 광합성이라는 말 이전에 사실은 모두가 다 광명으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진여불성 자리는 바로 광명인 것입니다.
우리는 참선을 해서 깨닫고자 합니다만, 우리가 가고자 하는 곳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른바 목적을 뚜렷이 설정해야만 그곳에 도달하려고 보다 더 열심히 노력할 것이고, 또한 거기에 걸맞은 수행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서 자기 목적의식이 희미하면 가고자 하는 열성도 적을 뿐만 아니라 공부하는 방법도 거기에 계합되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가고자 하는 진여불성 자리, 여래 자리, 또는 부처님 자리는 그냥 무조건 어디에 인격적으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나의 빛입니다. 그 빛은 우리가 볼 수 있는 태양광선과 같은 가시적인 광명만이 아니라 우리 중생이 볼 수 없는 비할 데 없이 청정한 광명입니다.
원자 속에 들어 있는 기운도, 우리가 알 수 있는 범위만 하더라도 굉장히 기기묘묘한 힘을 내지 않습니까? 하물며 원자력보다도 더 순수한 가장 근원적인 광명인 부처님 광명을 그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무한의 환희광명이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런 광명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신비로운 힘을 냅니다. 과거의 도인들은 삼명육통하고 신통자재하였습니다. 또는 그곳까지는 미처 못 간다 하더라도, 부처님을 조금만 모셔도 부사의한 힘으로 아픈 것이 그냥 나아 버리는 원리가 무엇인가 하면, 우리의 오염된 생명이 차근차근 정화되어서 그러한 광명세계에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부사의한 힘을 내게 됩니다. 그 이유는 천지우주의 근본생명인 광명 자체는 일체 공덕을 다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현상적으로 잘나고 못난 것, 또는 학문적으로 지식이 많고 적음은 마음의 본바탕을 닦아가는, 즉 생명의 본질인 광명을 향해서 가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일자무식인 사람이라도 상관이 없고, 또 과거에 설사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별 상관이 없습니다.
여러분도 다 아시는 앙굴리마라는 나중에 부처님 제자가 되어 아라한과를 성취해서 도인이 되었지만, 그 전에는 바라문교 스승을 섬겨서 공부했습니다. 그의 스승은 바라문교에서도 상당히 유명한 사람이어서 한 500명 이상의 제자를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앙굴리마라가 제일 미남이고 똑똑하고 또 능력이 제일 특출했습니다. 바라문 스승의 아내는 제법 잘나고 예쁘게 생긴 사람이었는데, 남편은 나이가 많으니까 나이 젊고 똑똑하고 미남인 앙굴리마라에게 호감을 느꼈습니다. 그러다가 차츰 호감이 짙어져서 애정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바라문 스승이 외출하여 다른 곳의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는 동안에 앙굴리마라에게 접근해 왔습니다. 앙굴리마라는 마음이 진실한 사람이었고 스승에 대한 공경의 마음을 조금도 변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부인의 요구를 안 들어 주었습니다.
그러자 스승의 부인은 원망의 마음을 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남편이 돌아오니까 일부러 자기 옷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또 옷에다 자기가 할퀴어서 핏자국을 내놓고는, "당신이 없을 때 앙굴리마라가 욕보이려고 해서 이렇게 되었다"고 모함하였습니다. 바라문 스승은 아직 무아의 도를 성취한 도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분노의 기운이 차 올랐습니다. 그래서 앙굴리마라를 파멸시키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앙굴리마라에게 말하기를 "그대에게 내가 여태가지 아껴오던 신비스러운 비결을 전수할 테니 그리 알아라" 하고는 "그대가 백 명의 사람을 죽여 한 사람한테서 손가락 하나씩을 잘라 그 손가락으로 목걸이를 만들어 공부하면 공부가 완성된다"고 하였습니다.
앙굴리마라는 매우 정직하고 단순할 뿐만 아니라 자기 스승을 숭배했기 때문에 그 말을 곧이듣고 차례로 사람을 죽여 나갔습니다. 그래서 정말 99명까지 사람을 죽여 그 손가락으로 목걸이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전생에 선근이 있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그것을 아셨습니다. 마지막에 부처님의 인연에 도래했다는 것을 아시고 그 앞에 나섰단 말입니다.
앙굴리마라가 99명을 죽였으니 다른 사람들은 모두 피해 버리고 마을이나 거리에서는 사람을 찾으래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앞에 나오시자 기운이 장사이고 용맹스러운 앙굴리마라는 혼신의 힘을 다해서 칼을 내리쳤지만 팔뚝을 딱 잡혀 꼼짝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굴복을 하여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본래 선근이 깊어서, 크게 죄를 범했다 하더라도 몇 년 안 가서 아라한과를 성취하였습니다.
이것을 봐도 현상적인 모양은 설사 사기를 치고 죄를 짓는다 하더라도 우리의 본성품은 조금도 오염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참선은 교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본래 자기가 갖추고 있는 마음을 깨닫는 것이므로, 참선 공부를 할 때는 군더더기나 복잡한 것은 필요가 없습니다. 단순하고 소박하게 오직 마음만을 닦아 나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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