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된 길
여러분들이 아시는 바와 같이 보살의 이름도 얼마나 많습니까? 무장애보살(無障碍菩薩), 미륵보살(彌勒菩薩), 지장보살(地藏菩薩) 등등. 그리고 부처님 이름도 굉장히 많습니다. 천지우주에 부처님 이름 아닌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부처님 이름을 적은 책이《삼천불명경(三千佛名經)》이듯이 부처님 이름이 삼천 가지나 있습니다. 그래서 삼천 부처님께 일배씩 올린다는 의미로 삼천배를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소박한 사람들은 그런 부처님들이 뿔뿔이 다 인격적으로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있다고 생각할 때는 이미 불교가 아닙니다. 어떠한 형체가 있어서 공간적으로 존재한다고 하면 그런 입장은 이미 불교가 아닙니다. 부처님들은 각각 뿔뿔이 있지 않고 생명체 내에 들어 있는 무량한 공덕입니다. 그렇기에 무장무애(無障無碍)라고 합니다. 조금도 장애가 없는 것이고 거리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세계까지 가야 이른바 불교에서 말하는 견성(見性), 즉 성품을 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품을 보는 경지까지 간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단박에 되어 버리기도 어렵습니다. 일언지하에 확철대오(廓徹大悟), 즉 말 한마디에 깨달아 버린다는 말씀도 있습니다만, 사실은 우리가 깨달음을 얻으려면 해오(解悟)가 앞서야 합니다. 이치로 아는 해오 정도는 재주 있는 분들은 단박에 깨달을 수 있겠지요. '정말 따지고 보아도 별것이 아니고 물리학에서도 종당에는 다 비었다고 하는데 결국 남는 것은 생명뿐이 아닌가?'라고 유추해서 믿는 사람들은 '그냥 모두가 생명뿐이구나!' 이렇게 생각만 합니다. 진실로 마음으로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증명을 하려고 하면 또한 쉽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증명을 해야만 온전히 자기 생명 가운데 들어 있는 무량공덕을 우리가 다 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맛도 좀 볼 수 있는 것이지, 증명을 못하면 아무런 맛도 못 봅니다. 팔만사천 경전을 앞으로 외고 뒤로 외운다 하더라도 그것으로는 무량공덕을 느끼지 못합니다.
금생에 우리가 태어나서 잘못 배우고 잘못 생각하고 잘못 느낀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것이 우리 잠재의식에 꽉 차 있습니다. 우리 생명 가운데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지옥을 포함한 육도(六道)가 다 들어 있기 때문에, 무량 세월 동안에 어떤 사람이든 모두 다 과거 어느 생엔가는 아수라 세계로 갔다가 지옥으로 갔다가 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의 우리 생명 가운데는 지옥에 가서 지은 업장, 또는 아수라 세계에 가서 지은 업장이나 축생계에서 지은 업장 등의 수많은 업장들이 꽉 들어차 있습니다.
따라서 그런 업장 때문에 단지 이치로 조금 안다 하더라도 생명의 본바탕인, 본 고향자리인 진여불성을 증명하지는 못합니다. 증명을 쉽게 못하니까 사흘이나 한 달, 또는 일 년의 별시수행(別時修行)이 필요합니다.
홍인(弘忍)스님 같은 분들은 60년 동안 산에서 안 나오고 공부했습니다. 과거 중국 당나라 때나 혹은 우리나라의 신라와 고려시대에는 위대한 신통묘지(神通妙智)를 갖춘 분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그런 때는 자기 생명의 본바탕인 진여불성을 확철대오하신 분들이 많았습니다.
아무튼 단박에는 못 된다 할지라도 우리가 갈 길은 오직 한 길뿐입니다. 우리는 본래가 바로 부처이기 때문에 부처가 되는 길밖에는 참다운 안심입명의 자리는 없습니다. 그 길을 알아야만 가정과 사회와 국가, 그리고 세계의 참다운 평화를 추구할 수 있고 누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다 아시는 영국의 유명한 역사가인 토인비는 불교를 숭상했으며 "현대 원자력시대에 사람들이 집단자살을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석가모니나 예수, 혹은 칸트나 플라톤과 같은 분들이 의도했던 인생관으로 돌아가는 일밖에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핵무기라는 것은 다 아시는 바와 같이 대량 살상무기 아닙니까? 우리가 참다운 자유, 참다운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는 이 길밖에는 없습니다. 그 길을 걷기 위한 가장 핵심적인 것, 공자의 가르침이나 노자의 가르침의 핵심은 '나'와 '일체 존재' 가 모두가 다 허망무상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공부를 빨리 하고 싶습니다. 용(龍)이 제아무리 용맹스럽고 힘이 세다 하더라도 구름이 없으면 승천을 못하고, 물이 없으면 힘을 못 씁니다. 호랑이도 영악스러운 동물이지만 언덕이 있고 산이 있어야 비비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힘을 못 씁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성불하고 싶어서 몸부림치고 애쓰지만, 내가 있고 네가 있고 내 소유가 있다는 관념이 있으면 성불을 못합니다. 자기 자신이 무엇이며 자기 존재가 무엇인가 하는, 존재에 대한 바른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좀 어려운 말로 하면 우리 중생들이 반야의 지혜, 즉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얻어야 공부가 바로 됩니다.
그런데 공부하는 분들을 보면 "염불만 많이 하면 된다" 또는 "화두만 의심하면 쉽게 깨달아 버린다" 하는데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야 일심으로 하면 마음은 모아지겠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성자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원효스님이나 보조국사도 말씀하셨듯이 정혜쌍수(定慧雙修), 즉 항시 부처님 공부에는 지혜가 함께해야 합니다. 지혜라는 것은 제법공의 지혜, 즉 모든 것은 허망하다는 지혜입니다.
현대의 불교는 생활불교이므로 생활불교를 하려면 있는 것, 즉 현상적인 것을 좋게 해야 되는데, 모두가 다 허망하다고 하면 어떻게 생활불교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이렇게 반문하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불교는 실존 따라서, 있는 것은 있다고 하고 없는 것은 없다고 하는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다원적이고 실존적인 사람이 분명히 비었으면 비었다고 생각하는 그 자리에 입각해야 공부도 되고, 자기 마음도 몸도 편하고, 집안이나 사회와 국가, 그리고 세계가 다 편합니다.
토인비는 불교인이 아니면서도 그런 바른 말을 했습니다. 예수나 석가나 공자 등 성인의 인생관을 자기 인생관으로 하고 행동을 그렇게 할 때, 비로소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참다운 평화, 참다운 행복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