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보감(人天寶鑑)

73. 대지율사 (大智律師) 의 행적

通達無我法者 2008. 2. 20. 16:12
 

73. 대지율사 (大智律師) 의 행적



영지사 (靈芝寺)  원조 (元照:1048~1116) 율사는 전당 (錢塘)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숙세의

인연이 익어져 나이 열여덟에 경에 통달하여 출가하였으며, 사미로 있을 때 이미 대중을 위

해 경을 강의하였다. 계율을 배우면서는 배울만한 스승이 없다고 늘 탄식하였다. 당시 신오

처겸 (神悟處謙) 법사는 천태의 도를 깊이 터득하고 있었다. 율사가 찾아 뵙고는 참으로

나의 스승이시다" 하고 청을 해서 문하에 있게 되었다.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거나, 춥거나

덥거나 날마다 몇 리 길을 걸어와 배웠다. 처겸법사는 강론을 할 때마다 반드시 율사가 도

착하기를 기다렸다. 어쩌다 조금 늦어져 대중들이 시간이 지났다고 강론을 청하면 언제나

ꡒ강을 들을 사람이 아직 오지 않았다"고 말했으니 그는 이토록 율사를 사랑하였다.

율사가 익혀왔던 것을 버리고 법사를 따르려 하니 법사가 말하였다.

ꡒ요즘 들어서 율의 가르침이 점점 약해지는데 그대는 뒷날 반드시 종장이 될 것이니 꼭 법

화 (法華) 를 밝히고 사분율 (四寶律) 을 널리 펴도록 하여라. 나의 도는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율사는 마침내 많은 종파를 널리 연구하고 그 중에 율을 근본 삼았는데 단지 말로만 하지

않고 실천에 옮겼다.

일찍이 남산 도선 (南山道宣) 율사에게 귀의하여 하루 여섯 차례씩 예배를 드리고 밤낮으로

도를 닦았다. 발우를 들고 걸식을 다녔는데 옷이라고는 큰 베옷 하나만 걸쳤을 뿐이었고, 정

오가 지나서는 밥을 먹지 않았다. 발우 하나와 옷 세벌 뿐 바랑 속에 쓸데없는 물건은 없었

다.

기도를 하면 언제나 그 정성이 하늘에 닿아 메뚜기를 없애달라고 빌면 메뚜기가 경계 밖으

로 떠나고, 비가 오게 해달라고 빌면 장마비가 내렸다. 술고방공 (術古龐公) 이 율사에게 비

를 빌도록 명하였는데, 축원 〔懺〕 이 입에서 끝나기도 전에 천둥이 치며 소나기가 쏟아지

니 공이 말하였다.

ꡒ우리집안은 대대로 불법을 섬기지 않았는데 지금 율사를 만나고 보니 귀의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태사 (太師)  사월왕 (史越王) 이 율사의 비 뒷면에 이렇게 썼다.

ꡒ유학을 하는 사람은 유학으로 자기를 묶고, 계율을 하는 사람은 계율로 자기를 묶는 것이

공부하는 이들의 큰 병통이다. 그런데 유독 율사만은 3천 가지 몸가짐과 8만 가지 세세한

행을 갖추어 흠잡을 데 없는데도 늘 정혜 (定慧) 의 테두리를 껍질벗듯 초탈하였으니 율장

중에 진짜 법왕의 아들이었다. 그러므로 수백년 뒤까지도 사람들을 분발케 하니, 그를 남산

율사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평가하나 그 공은 배가 된다고 하겠다.

만일 지난날 율사에게 하여금 승복을 입게 하지 않았더라면 반드시 유교의 우두머리로서 특

출난 조예를 가진 사람이 되었을 터인데, 아까운 일이다."

율사가 돌아가신 지 26년이 되도록 그 남긴 향기가 없어지지 않자 조정에서는 「대지율사

(大智律師) '라는 호를 내리고 탑을 ꡐ계광 (戒光) '이라 이름지어 시호를 하사하는 은혜를

주었다. 이 일은 유공 (劉公) 의 글에 언급되지 않았기에 비의 뒷면에 써둔다."

「탑명 (塔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