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대혜 종고선사의 행적
대혜 종고 (大慧宗曠:1088~1163) 선사가 담당 준 (湛堂文準:1061~1115) 스님을 찾아가니
준스님은 도에 들어가는 지름길을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선사가 제멋대로 생각하며 물러섬
이 없자 준스님은 ꡒ그대가 깨닫지 못하는 것은 알음알이로 이해하려는 데 병통이 있기 때
문인데 이것이 바로 소지장 (所知障) 이라는 것이다"라고 꾸짖었다.
당시 뛰어난 선비였던 이상노 (李商老) 가 준스님을 찾아뵙고 도를 묻고 있었는데 마침 선
사가 이런 말을 하였다.
ꡒ도는 신령하게 깨달아야 하며 그 묘는 마음을 비우는 데 있다. 이를 체험하는 데에는 총
명함이 필요치 않고 이를 얻는 데는 보고 들음을 훌쩍 뛰어넘어야 한다."
그러자 이상노가 무릎을 치고 감탄하며 ꡒ어찌 사고 (四庫) 의 책을 다 읽고 나서야 학문을
했다고 하겠는가"라고 하였으며, 이 일로 두 사람은 도반이 되었다.
준스님이 입적하자 선사는 승상 무진거사 (無盡居君, 張商英:1043~1121) 를 찾아가 준스님
의 탑명 (塔銘) 을 부탁하였다. 공은 평소 선공부를 했다고 자부하고 있어서 대단한 지견을
갖춘 사람이 아니고는 감히 그의 문턱을 오르지도 못했다. 선사는 그를 만나 대화하는데 탁
월하면서도 여유가 있었다. 공이 이를 보고는 ꡒ자네의 선은 격식을 넘어섰네"라고 칭찬을
하니, 선사가 ꡒ그래도 스스로는 긍정하지 못하겠는 데야 어떻게 합니까"라고 하자, 공이
ꡒ그대는 천근 (川勤:원오극근) 스님을 만나보면 될 것 같소"라고 하였다.
이에 선사는 서울 천녕사 (天寧寺) 로 원오 극근 (圓悟克勤:1063~1135) 스님을 찾아갔는데
원오스님은 마침 법좌에 올라 거량법문을 하고 있었다.
ꡒ한 스님이 운문 (雲門文偃) 스님께 묻기를 ꡐ무엇이 모든 부처님들의 몸이 나오신 곳입니
까?'라고 하니 운문스님께서 ꡐ동산 (東山) 이 물 위로 간다'라고 하셨는데 만약 누군가 내
게 묻는다면 나는 그에게 ꡐ훈풍이 남쪽에서 불어오니 전각에 서늘한 기운이 돈다'라고 대
답하겠다."
선사는 여기서 홀연히 앞뒤가 다 끊겼다. 그리하여 움직임 〔動相〕 은 생겨나지 않았으나
도리어 깨끗하여 아무 것도 없는 경계 (淨處) 에 빠지게 되었다. 선사가 방장실에 들어갈 때
마다 원오스님은 이렇게 말하였다.
ꡒ그대가 이런 경계에 도달한 것도 역시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아깝구나! 죽기만 했지
다시 살아나지 못하니. 화두 (語句) 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로다. 듣지 못했는가. 깍
아지른 낭떠러지에서 손을 놓고 스스로 긍정해야 맨 끝에 다시 살아난다는 말을. 이렇게 되
면 그대를 속일 수 없으니 이런 도리가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한번은 방장실 〔東山五祖法演의 처소〕 에서 원오스님이 묻기를 ꡒ있다는 말 〔有句〕 과
없다는 말 〔無句〕 이 등넝쿨이 나무에 기대 있는 것과 같으니 입을 열고 말을 했다 하면
틀립니다"라고 한 일이 있었다.*
선사가 하루는 손님과 함께 저녁밥을 먹는데 젓가락을 손에 잡고도 먹는 것을 잊고 있으니
원오스님이 웃으며 손님에게 말하였다.
ꡒ저놈은 회양목선 (黃楊木禪:꼭 막혀 융통성 없이 선공부 하는 것을 잘 자라나지 않고 딱
딱한 회양목에 비유한 말) 을 참구해 터득했다오."
대혜선사가 분개하며 물었다.
ꡒ스님께서는 지난 번 오조스님께 ꡐ등넝쿨이 나무에 기대 있는 것과 같다'고 하셨다는데
오조스님께서는 무어라 대답하셨습니까?"
ꡒꡐ묘사하려 해도 묘사할 수 없고 그림으로 그리려 해도 그릴 수 없다'고 하셨다. 그래서
또 묻기를, ꡐ나무도 자빠지고 넝쿨도 말라버리면 있다 없다 하는 그 말은 어디로 돌아갑니
까?'라고 하니 오조스님은 ꡐ서로 따라오느니라' 하셨다."
선사는 여기서 ꡒ나는 알았다!"라고 외쳤다. 이때부터 마음이 확 트여 응어리지고 막히는 곳
이 없었다. 그후 얼마 안되어 길을 떠나 강서지방을 가다가 대제 (待制) 한자창 (韓子蒼)
을 만나 유학과 불학에 대해 열띤 토론을 했는데, 한자창이 깊이 탄복하여 선사는 그의 서
재에 반년을 묵게 되었다. 새벽에 일어나 서로 인사하는 외에 때가 아니면 강론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길을 가는 데 선후를 사양하는 일이 없고 앉을 때에도 주인자리 손님자리를 따지
지 않았다. 너와 나를 서로 잊고 마음 속에 있는 것까지 다 쏟아 놓으며 하루도 법락을 맛
보지 않는 날이 없었다.
그후 승상 장위공 (張魏公:張商英) 의 청으로 경산 (徑山) 에 주지하니 천하의 납자들이 모
여들어 따르는 대중이 2천 명이나 되었다. 선사는 청규 (淸規) 로 대중들을 묶지 않는 것은
아니나 자율에 맡기기도 하였다. 납자들이 불법의 요의를 서로 따지다가 혹 기분이나 이론
이 맞지 않아 선사 앞에서 다투는 일이 있으면 그때마다 선사는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결
정을 지어주지 않고 으레 담당자를 보내서 쫓아내버렸다. 당시 유나 (維那) 로 있던 소진
(紹眞) 스님은 촉 (蜀) 땅의 선비였는데 선사가 명을 내리면 잠만 자면서 그대로 시행하지
않고 심지어는 그들에게 산 유람을 하도록 하였다. 이 일이 나중에 선사에게 알려지니 선사
는 ꡒ이 묘희 (妙喜:대혜의 호) 의 용상굴 (龍象屈) 이 아니면 어떻게 이러한 열중 (悅衆:대
중을 통솔하는 직무) 을 얻을 수 있겠는가"라고 칭찬하였다.
형중온 (曉瑩仲靜:임제종 대혜파) 이 말하였다.
ꡒ선사는 뜻이 크고 의리를 좋아하였으며 취향과 식견이 고명하였다. 성격은 비록 급했으나
도량은 실로 너그러워 성이나서 꾸짖는 가운데도 사실은 자비로움이 있었다. 대중 가운데
계율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모두 명령대로 거행케 하지만 한번도 사람을 다치게 하
거나 물건을 상하게 할 마음은 없었으니 선사가 소진유나를 칭찬한 이유에는 깊은 뜻이 있
는 것이다. 뒷사람들이 거울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정속전 (正續傳)」
'인천보감(人天寶鑑)' 카테고리의 다른 글
76.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는 화두를 들다가 / 덕산 연밀 (德山緣密) 선사 (0) | 2008.02.20 |
---|---|
75. 금강경 송 (頌) / 야보천 (冶父川) 선사 (0) | 2008.02.20 |
73. 대지율사 (大智律師) 의 행적 (0) | 2008.02.20 |
72. 수식관 (數息觀) / 소동파 (蘇東坡) (0) | 2008.02.20 |
71. 정토를 눈앞에 보다 / 우법사 (愚法師) (0) | 2008.0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