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문무고(宗門武庫)

90. 수마기 (水磨記) / 담당 문준선사

通達無我法者 2008. 2. 21. 09:51
 



90. 수마기 (水磨記) / 담당 문준선사



담당문준 (湛堂文準) 스님은 제갈공명 (諸軫明) 의 「출사표 (出師表)」를 읽고 문장 짓는 법을 터득했다.

그는 「나한공소 (羅漢供疏:나한에게 공양하는 글)」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ꡒ범어의 아라한 (阿羅漢) 이란 이곳 (중국) 말로는 ꡐ무생 (無生) ꡑ이라 한다. 그들은 삼계 25종의 번뇌를 벗어나 분단생사 (分段生死) 를 초월하였으며 여래의 부촉을 받아 천인 (天人) 의 공양을 받을 만하며 일체 중생을 이롭게 하고 복되게 하는 분이다. 그러므로 시주들은 공양을 성대히 해야 한다.ꡓ



또한 「수마기 (水磨記:물레방아에 대한 글)」를 지었다.



ꡒ늑담산 (潭山) 은 옛날 마조 대적 (馬祖大寂) 선사께서 많은 선승들과 함께 부처되기를 겨루시던 큰 도량으로 비록 오랜 세월이 흘렀다 하나 불법에서 멀어진 적이 없는 곳이다. 다만 그동안 선지식들의 경지가 똑같지 않고 간혹 고하 (高下) 가 있었기에 멀어진 일이 있기도 하였다. 이를테면 마조선사에게 한 스님이 무엇이 부처냐고 묻자 마음이 부처라고 대답한 일 등이다. 그 이유를 살펴보면 중생이 본래 성불하여 높고 낮음이 없으니 높고 낮음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 불법에 있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더구나 말세에는 내가 법을 설하노라 하는 자도 있다. 그러기에 부처가 되려고 스승을 구하면서 이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송 원부 (元符)  무인 (1098) 년에 한중 (漢中) 의 의충 (意忠) 스님이라는 분은 스승을 찾아 도를 묻고 부처가 되려고 참선을 하는데 긴장대를 가지고 다니다가 만나면 한바탕 놀다 가곤 하였다. 그 한바탕의 놀음은 일시적인 것이었으나 그 공덕은 천고에 이로움을 주었으니 낡은 제도를 혁신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영인 (人) *은 아직도 이를 깨닫지 못하고 옛날부터 있어온 틀에다가 상황을 맞춘다. 변통 (變通) 이란 나에게 있는 것인데 어찌 규칙으로 큰 뜻을 얽어매 옛사람의 규범에 국한되는가? 이 때문에 제 자식은 가르칠 수 없다고 하였다. 가르치는 것은 언어의 찌꺼기이지 지극히 오묘한 마음의 이치는 아니다. 지극히 오묘한 마음은 나 자신에게 있는 것이지 언어 문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설령 밝은 스승이 은밀히 전해주어도 마음으로 스스로 깨닫는 것만 못하다. 그러므로 마음에서 얻고 손으로 응한다는 말이 있다. 이 모두가 신령한 심법 (心法) 의 묘용 (妙用) 이다.

그러므로 보리를 찧으려면 맷돌을 써야 하고 쌀을 찧을 때는 연자방아를 써야 하고 국수를 뽑으려면 채를 써야 하고 껍질을 없앨려면 부채를 써야 하는데, 그 규모와 규칙은 모두 빗장 (關) 에 달려있다. 이 소식만 달통하게 되면 모든 것을 조작하지 않아도 스스로 돌아간다. 물로 비유해 말하자면 한 물결이 움직이자마자 앞 물결 뒷 물결 모든 물결이 줄줄이 이어져 끝이 없다. 맷돌로 말하자면 한 개의 바퀴가 돌자마자 큰 바퀴 작은 바퀴 모든 바퀴가 움직여 끝없이 돌게 됨과 같다. 이로 말미암아 위 아래가 서로 호응하고 높고 낮은 데가 함께 작동하니 그 묘한 작용이란 자연에서 나온 것이어서 사람의 힘을 빌어 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도 그 기묘함은 볼만하다. 매우 현묘해야만 좌우로 돌고 종횡으로 오가면서 서로 서로 부딪치며 큰 법음 (法踵) 을 낸다. 그 법음은 모두가 고 (苦) ․공 (空) ․무상 (無常) ․무아 (無我) 와 바라밀 (波羅蜜) 이니 듣는 자는 그 마음을 듣고, 보는 자는 그 성품을 보며, 냄새 맡고 맛보고 알아차리는 데 이르기까지 모두 법희 (法喜) 와 선열 (禪悅) 을 얻게 될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쌀과 국수 등 여러 가지 공양거리를 만들어 창고와 주방 (香積) 에 공양하여 이 두 가지로 선승들과 왕래하는 선불자 (選佛者) 를 배부르게 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