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유서기(裕書記)에게 주는 글
실다운 경지를 밟고 편안한 곳에 도달하고 나면, 그 가운데에는 헛되이 버릴 공부가 없고 끊임없어서 실낱만큼도 샐 틈이 없다. 담담하고 고요히 엉켜서 불조도 알 수 없고 마군외도도 부여잡을 수 없으니, 이는 스스로 머물 것 없는 대해탈문에 머문 것이다. 다함없는 시간을 지낸다 해도 그저 한결같을 뿐이니[如如], 하물며 모든 인연이야 말할 필요가 있겠느냐.
여기 머무는 가운데 바야흐로 가풍을 세워 남들의 못과 쐐기를 뽑아 주며 그들의 집착을 없애줄 수 있으니, 바로 이것을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이라 한다. 여래가 간직하신 비밀스런 말씀을 가섭이 감추지 않았으니 이것이 바로 여래의 진실한 밀어이다. 감추지 않은 그것이 곧 은밀함이며 은밀한 그대로가 감추지 않음이니, 이를 어찌 미혹한 생각에 매이고 잘잘못을 따지며, 상투적인 격식에 빠져 알음알이를 짓는 자와 함께 거론할 수 있으랴! 투철히 벗어나 실제로 깨달은 경지에 도달하려면 격식에서 벗어나고 종지를 초월한 맨 꼭대기에서 알아차려야 할 것이다. 깨닫고 나서는 잘 간직했다가 상근기를 만나거든 그때 가서 인가해 줄 일이다.
불자를 들고서 법좌에 올라 종사라 불리 우면서도 본분작가(本分作家)의 수단이 없다면 사방에서 찾아오는 사람을 속여 그들을 풀밭 구덩이 속으로 끌어들여 자질구레한 물건으로 만들어버리는 꼴을 면치 못하리라. 만약 금강의 바른 안목을 갖추었다면 먼지하나 있지 않은 말쑥한 경지에서 오로지 본분사를 가지고 지도할 일이다. 그러나 설사 견처가 부처님과 같다 해도 그들은 오히려 부처님의 경지라는 장애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부터 방(棒)을 휘두르고 할(喝)을 내뱉으며 한 기연과 한 경계, 한마디가 모두 낚시밥이었다. 홀로 벗어남을 귀하게 여길 뿐, 풀잎이나 나무에 붙어사는 도깨비짓을 무엇보다 꺼린다. 이른바 농사꾼의 소를 빼앗고 주린 사람의 밥을 빼앗는다는 것이다. 그런 솜씨가 아니라면 모두가 흙장난이나 하는 자일뿐이다.
제방에서 찾아온 납자로서 숙세의 선근이 있어 공부를 하다가 곧장 깨달아 들어갈 수 있는 자라도 진정한 종사를 만나지 못하면, 도리어 그를 끌어다가 격식을 표방하고 기연과 경계에 떨어져서 오랏줄 없는데 스스로 결박되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한다.
비슷하기는 하나 옳지 않은 이것이 가장 처리하기 어렵다. 요컨대 그의 병맥을 알고 막힌 곳을 가려내며 치우친 곳을 캐물어 일깨워주고, 집착과 막힘을 버리게 해야 한다. 그런 뒤에 진정한 본분종지를 보여 주어 의혹이 없게 해야 한다. 그리하여 분명하게 큰 해탈을 얻고 큰 보배 집에 거처하면 자연히 쫓아도 떠나지 않으리라. 그렇게 되면 불법을 크게 넓히고 조사의 법등(法燈)을 끊임없이 이어서 가히 갚지 못할 은혜를 갚았다고 할 만 하겠다.
황룡 혜남(黃龍慧南)선사가 지난 날 석상(石霜)스님을 뵙기 전에는 한 밥통의 선[一 皮禪]만을 알았었다. 취암스님은 그를 가엾이 여기고 자명(慈明)스님을 찾아보라고 권하였다. 거기서 오로지 "영운(靈雲)스님은 투철하게 깨치지 못했다."고 한 현사(玄沙)스님의 말씀을 끝까지 캐 들어갔는데, 시절이 맞아서 기왓장 부서지듯, 얼음 녹듯하여 이윽고 인가를 받았다. 그리하여 30년을 이 도장으로 제방의 알음알이를 뽑아 주었다. 병을 낫게 하는 데는 이런저런 약이 필요치 않으니, 긴요한 곳에 어찌 그 많은 불법이 있으랴.
훌륭한 종사가 학인을 위해서 정형화된 격식[ 臼]이나 어떤 표방[露布]을 내걸지 않더라도 오래 가면 배우는 무리들이 잘못 알아 기어코 격식과 표방을 만든다. 더욱이 그들은 격식 없음으로 격식을 삼고, 표방 없음으로 표방을 만든다. 모름지기 여기에 이르러서는 그루터기를 지켜 토끼를 기다리고 손가락을 달로 착각하는 그런 일들을 모두 없애야 하리라.
기미보다 앞서서 비춰보고 먼지바람에 움직이는 풀에서도 그 단서를 알아차려야 하는데, 더구나 시끄럽게 세상살이를 하는 경우이겠느냐. 가슴이 텅 비고 고요하여 아무것도 헤아릴 것이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어떻게 기미보다 먼저 사물을 알아차리고 착오 없이 원만하게 응대할 수 있겠는가. 이는 모두가 나가선정(那伽禪定: 부처님의 선정)의 효험이다.
임제스님의 금강왕보검, 덕산스님의 말후구(末後句), 약교(藥橋)스님의 한마디, 비마(秘魔)스님의 나무집게, 구지스님의 손가락[指], 그리고 설봉(雪峰)스님이 공을 굴렸던 일과 화산(禾山)스님이 "북 칠 줄 아느냐" 했던 것과 조주(趙州)스님이 "차나 마시게" 했던 것과 양기(楊岐)스님의 밤숭어리[栗棘蓬], 금강 울타리[金剛圈] 등이 모두 같은 이치일 뿐이다. 깨치면 그대로 힘을 덜어 모든 불조의 말씀을 다 통달할 것이니, 오직 당사자 스스로 두루 널리 지니는 데 달려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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