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법왕(法王)의 충장로(沖長老)에게 드리는 글
옛부터 내려온 종승(宗乘)에서는 높이 초월하여 곧바로 증득하였으니, 스승과 제자가 계합하여 깨닫는 일에 결코 소홀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이조(二祖)스님은 눈에 서서 팔을 끊었으며, 육조스님은 황매산(黃梅山)에서 돌을 지고 디딜방아를 찧었던 것입니다. 그 나머지 분들도 이삼십년씩을 부지런히 힘썼으니, 어찌 쉽게 인가하였겠습니까.
이는 아마도 근기를 관찰하여 맞게 가르치고 백천 번을 단련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편견이나 집착, 의심 등이 생기자마자 모두 결단 내주어 철저히 놓아버리도록 하여 마치 새는 가죽부대를 새지 않도록 하는 것처럼 쳐도 부숴지지 않는 곳으로 평온하게 옮겨 밟도록 하였습니다. 그런 뒤에야 세상에 나와 중생들을 지도하게 하였으니, 이야말로 작은 인연이 아닙니다.
한 구석이라도 빈틈없게 하지 않으면 모양새가 바르지 못하니, 이리저리 들쑥날쑥하면 선지식에게 비웃음을 당합니다. 이 때문에 옛스님들은 8면으로 영롱한 구슬처럼 빈틈없고 올바르고자 힘썼을 뿐입니다. 안으로는 자기 행실이 얼음장이나 옥처럼 청결하고, 밖으로는 방편을 원만하게 통달하여 뭇 유정들을 보살펴서 마치 방죽의 못물처럼 서로 잘 돌이켜 베풀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참문할 때에는 본분의 일로써 낱낱이 묻고 점검하여 그가 알아차리면 그때 가서 수단을 써서 탁마해 주었으니, 비유하면 물 한 그릇을 조금도 흘리지 않게 다른 그릇에 쏟아 붓는 것과도 같다하겠습니다. 농사꾼의 소를 몰고가고 주린 사람의 밥을 빼앗듯 하여 귀신도 알아차리지 못하니, 큰 해탈을 의지해야만 다시는 머리에 뿔 달린 이류(異類) 중생으로 태어나지 않습니다.
함이 없는 데에 편안히 안주하면 참으로 5계 10선(五戒十善)으로 티끌세계를 벗어난 아라한입니다. 달마스님도 "행동과 이해가 서로 일치한 사람이라야 조사라 부른다"고 하였습니다.
두루 행각하여 제방을 초월함은 생사의 일이 큼을 근본으로 삼기 때문이며 중생을 지도하고 이롭게 하여 큰 선지식이 되는 것은 일대사인연을 밝히는 데 있습니다. 이는 서로를 필요로 하고 서로에게 도움이 되어주는 이치로서, 예로부터 원래 그러하였습니다.
큰 법을 걸머질 만한 근기라야 만 길의 절벽에 서서 종사의 풀무와 쇠망치에 단련되고 완성되어 처음과 끝이 모두 진정하였습니다. 나오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한번 나왔다 하면 반드시 대중을 놀라게 하는 것은 언제나 그랬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이미 깨달음이 엉성하지 않으니 법을 전수할 때도 경솔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회양(懷讓)스님이 조계(曹溪)에 8년을 있었던 경우와 마조스님이 관음원(觀音院)에 있었던 경우와 덕교(德嶠)스님이 용담사(龍潭寺)에 있었던 경우와 앙산(仰山)스님이 대원 위산스님에게 있었던 경우와 임제스님이 단제(斷際)스님 회상에 있었던 경우가 모두 십년 이십년을 하산하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한 기연, 한 경계와 한 마디 한 마디가 쇠 소리로 시작하여 옥 소리로 끝나는 연주처럼 시작과 끝이 정연하여 뒷사람들은 엿볼 수도 없었으며, 훌쩍 뛰어넘어 증득하여 대동(大同)의 경지에 도달하면 자연히 그 귀착점을 살피게 됩니다.
생각컨대, 지난 날 마조(馬祖)스님은 서당(西堂)스님을 위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대는 교학을 공부하였는가?"
"교가 어찌 다르겠습니까?"
"그렇지가 않네. 그대가 이후로는 사람들에게 여기서는 이리 말하고 저기서는 저리 말하게 될 걸세."
"저는 자신의 병을 치료할 뿐인데, 어찌 감히 다른 사람을 위하겠습니까?"
"그대는 말년에 반드시 세상에 도를 크게 펼칠 걸세"라고 하였는데, 과연 그렇게 되었습니다.
옛사람을 자세히 살펴보면, 향상의 한 덩어리 인연을 확철대오하여 언상(言像)과 분별을 떠나 확고한 곳에 이르렀으니, 그들은 홀로 즐기며 편안히 쉬는 경계를 스스로 알았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마조대사는 오히려 이처럼 격려하였으나, 정작으로는 원만자재한 변통으로 한 모서리만 지키며 한 곳에만 달라붙지 않기를 바랐으며, 반드시 고금을 포괄하여 원만하게 실천하고 섭화해서 둥글게 뒤섞여서 그 한계가 없기를 바란 것이었습니다.
중생을 이롭게 할 때는 팔방으로 적을 받아들이고 초막 속을 헤쳐서 하나나 반개의 꼬리 그을린 큰 잉어를 찾아서 본분의 가풍을 담당할 법손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하니, 이 어찌 방편으로 불조의 은덕에 보답하고자 불사를 짓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요컨대 정신을 바짝 차리고 방편의 손을 드리워 척척 닿는 곳마다 모름지기 몸을 벗어날 기틀이 있어야 하며 남의 눈을 멀게 해서는 안되고 인과를 미혹해서 그르치면 안되니, 도리어 이익이 되지 못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선지식에게 가장 요긴한 길입니다.
황룡 혜남(黃龍慧南)선사는 일찍이 말하기를, "단정하게 방장실에 거처하면서 본분의 일로 사방에서 찾아오는 사람을 제접하는 것이 장로의 직분입니다. 그 나머지 자잘한 일들은 소임 맡은 사람[知事]에게 맡기면 안될 일이 없다"라고 하였는데, 정말 그렇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쓸 때는 반드시 조심스럽게 선택하고 일을 맡겨 그르치지 않게 해야 합니다. 대위사(大 寺) 진여(眞如)스님은 말하기를, "주지하는 데는 특별한 재주가 없다. 그저 사람을 잘 쓰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고 했으니, 깊이깊이 생각하십시오.
속담에, 재주를 부리는 것이 원칙대로 하는 것만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백장 대지(百丈大智)스님이 규범을 세우시니 천고에도 그것을 부수지 못하였고, 요즈음도 조심스럽게 준수할 뿐입니다. 자기가 솔선하여 그 고아한 모범을 어기지 않으면 여러 사람들이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말후구를 꺾어 거꾸러뜨리고 생사를 투철히 벗어난 납자라면 모름지기 모든 성인들이 가두어도 갇히지 않고 번뇌의 뿌리[命根]까지 끊어버리는 하나[一著子]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옛 분들에게는 잡고 놓고 죽이고 살리고 하는 큰 도가 있었으며, 큰 해탈을 얻어 언제나 그 지식(知識)을 활용하였습니다. 알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니, 일 속에서 살펴보아 그 근기에 마땅하게 초탈 단행해야만 비로소 영원토록 힘을 얻을 것입니다.
양기조사(楊岐祖師)는 금강권(金剛圈)과 율극봉(栗棘蓬)을 제창하여 용과 뱀을 가려내고 호랑이와 물소를 사로잡았습니다. 만약 본분종사가 그 집안 사람이라면, 무심코 드러내 보여도 납자의 혀끝을 앉은 자리에서 끊는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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