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원수좌(圓首座)에게 주는 글
도를 체득한 사람은 선 자리가 고고하고 우뚝하여 어떤 법과도 마주하지 않는다. 티끌 하나 건드리지 않고 움직이니, 어찌 풀하나 까딱 않고 숲 속에 들어가며 물결을 일으키지 않고 물에 들어가는 정도에 그치랴. 그런 가운데 속이 이미 텅 비어 고요하고 밖으로는 대상에 응하는 작용이 끊기면 어느덧 저절로 무심을 철저히 깨치게 되니, 비록 만 가지 일이 단박에 닥쳐온다 해도 어찌 거기에 정신이 휘둘리랴. 평상시에는 마치 어리석고 바보스러운 듯 한가함을 지키다가도 사물에 임하게 되어서는 애초에 재주를 부리지 않는다 헤아리고 결단함이 바람이 돌고 번개가 구르듯 기연에 딱딱 들어맞으니, 어찌 본래 지켜온 것이 아니겠느냐.
옛스님이 말하기를, "사람이 활쏘기를 배울 때, 오래도록 쏘아야만 비로소 적중시키는 것과도 같다"고 하였다. 깨닫는 것은 찰나이나 공부를 실천해가는 데는 모름지기 긴 시간을 요한다. 마치 비둘기새끼가 태어나서는 붉은 뼈가 허약하지만, 오랫동안 먹이를 주고 길러서 깃털이 다 나면 문득 높고 멀리 날 줄 아는 것과도 같다. 그러므로 투철하게 깨닫는 요점은 발로 다스림[調伏]에 있는 것이다 예컨대 모든 티끌 경계가 항상 흘러들어와 속을 꽉 막으나 체득한 사람에게는 완전히 뚫려 있으니, 모두가 자기의 큰 해탈문이다. 종일토록 무엇을 해도 한 적이 없고, 좋고 싫음이 전혀 없으며 권태도 없다.
모든 중생을 제도하면서도 제도를 한다느니 제도를 받는다느니 하는 생각이 없는데 하물며 염증을 내랴. 성품이 치우치고 메마른 이가 있으면 부족한 점을 보태주어 원만하게 해준다. 또한 방편을 열어 중생을 섭수하여 교화하는 데 있어서, 위 아래로 살펴 응대하며, 높고 낮고 멀고 가까움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게 한다. 상불경(常不經)보살의 행을 실천하고 인욕선인(忍辱仙人)을 배우며 옛 부처님의 법도를 따라 37품(三十七品)의 조도법(助道法)을 성취하면, 4섭법(四攝法)을 견고하게 행하여 큰 작용[大用]이 목전에 나타나게 되면 시끄러움과 고용함이 하나가 된다. 물 따라 내려가는 배에 노 젓는 수고가 필요치 않듯이 모두를 흠뻑 받아들여 보현보살의 행원(行願)을 원만하게 깨달으니, 세간과 출세간의 큰 선지식이다.
옛 스님은 말하기를, "촌구석[三家村] 그대로가 저마다 총림이 되어야한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총림이 없는 곳엔 뜻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편리만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더욱 편리함에만 집착하게 되니, 반드시 힘써서 끝까지 게으르지 않도록 해야 한다.
시끄러움과 고요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즉, 시끄러운 곳에선 두루두루 변화에 응하되 속은 텅 비고 고요하여, 텅 비고 고요한 곳에서는 고요함에 매이지 않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가는 곳마다 모두 나의 활발한 생활이다. 오직 속은 비고 밖은 따라주면서 근본이 있는 자라야만 이럴 수 있다.
선지식이 된 자는 자비와 부드러움으로 중생들을 잘 제도하되, 평등하여 다툼이 없도록 처신해야 한다. 상대방이 나쁜 마음을 먹고 내게 욕하거나 이치에 맞지 않게 내게 관여해 오고 헐뜯고 욕되게 하는 경우에는, 다만 뒤로 물러나 스스로를 비추어 보아야 한다. 자기에게 잘못이 없으면 일체를 따지지 말며, 생각을 움직여 성내거나 원망하지도 말아라. 그저 그 자리에 눌러 앉아 애초에 듣지도 보지도 않은 것처럼 해야 한다. 시간이 흘러가면 마군의 재앙은 저절로 없어진다. 만약 그들과 시비를 한다면 나쁜 소리가 서로 나오게 마련인데, 어찌 끝날 기약이 있으랴. 또 자기의 역량을 드러내지 말지니, 세속의 무리들과 무엇이 다르랴. 부디 힘써 행하라. 그러면 생각 생각 자연히 다스려질 것이다.
백추와 불자를 쳐서 인간과 천상을 일깨워주고 생사를 투철히 벗어나게 함이 어찌 작은 인연이랴. 화애로운 얼굴과 부드러운 말로 근기에 맞게 제접 인도하며, 그들의 동기를 살펴서 판단해주고, 그가 있는 곳을 시험하며 치우침을 바로잡고 집착을 떨어주어야 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드러내 주어서, 불성을 보게하여 푹 쉬어버린[休歇] 안락한 곳에 도달하게 해야 한다. 이른바 못과 쐐기를 뽑고 끈끈함을 없애고 결박을 풀어준다고 하는 것이다. 부디 실다운 법이라고 하면서 학인을 묶어놓아서, 이처럼 머물고 이처럼 집착케 해서는 안된다. 그들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로부터 휘둘려 전도되지 않게 하라. 그것은 독약이다. 그들에게 그것을 먹게하면 일생을 한 쪽만 보고 속아서 잘못될 것이니, 무슨 이익이 있으랴.
불조께서 세상에 나오시어 다만 이 큰 인연을 주창하셨으니, '오직 마음[心印]만을 전할 뿐, 문자를 쓰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최상 근기만을 상대하여 하나를 들으면 천을 깨닫는 자를 귀하게 여길 뿐이다. 그 자리에서 알아차려 수행을 마치고 명예와 이익을 구하지 말고, 오직 생사를 투철하게 벗어나고자 힘써야 한다.
지금 이미 그 자손이 되었으니 그 가풍[種草]을 간직해야 한다. 옛부터 도가 있었던 사람을 살펴보니, 그들은 움쩍하면 용과 호랑이를 항복시켰으며 불보살이 신통으로 계(戒)를 주었다. 괴로움과 싸우고 담백한 음식을 먹으며 인간세상을 몽땅 잊고 티끌 세계를 영원히 떠났다.
20·30년을 자취와 명예를 숨기고 다리 부러진 냄비로 밥을 먹으면서, 더러는 앉아서도 죽고 서서 죽기도[坐脫立亡]하였다. 그 가운데 한 개 또는 반개의 도인이 여러 성인이 밀어내줌으로써 출세하여 종풍을 세우고, 고매한 행을 지니며 부처님의 은혜에 힘써 보답하지 않음 없었으니, 비로소 내놓은 한 두 마디는 부득이해서 그렇게 한 것이었다. 이것은 중생들을 인도하여 진리로 들어가게 하는 문이며, 초인종이라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들의 체제와 역량은 후학들의 모범이 될 만하니 마땅히 본받고 더더욱 힘써서 옛 가풍을 되찾아야한다. 절대로 명리를 구하려 해서는 안된다. 그러기를 깊이깊이 축원하노라.
마조(馬祖)스님이 옛날에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키 장이 집이라는 조롱 때문에 도를 펴기가 어려울까 두려워하여 다시 협(峽) 땅을 나와 강서(江西)에 가서 인연이 맞게 되었다.
대수(大隋)스님은 지난 날 고향으로 돌아와 우선 용회(龍懷)의 길 입구에서 3년 동안 차를 끓이면서 여러 인연을 맺다가 목암(木菴)에 은둔하여 촉(蜀) 땅에서 도를 행하였다.
향림(香林)스님은 옛날에 고향으로 돌아와 수정궁(水晶宮)에 자취를 감추고 40년 동안 한 덩어리가 된 일을 성취하여 지문(智門) 노스님의 가풍을 드날리더니, 이윽고 설두(雪竇)스님을 배출하여 운문(雲門)스님의 정통 종지를 크게 펼쳤다. 이처럼 머물기도 하고 다시 나오기도 하되, 이 모두를 인연으로 판단하였다. 지금은 이미 멀리 서역 만리에 돌아갔지만 행각의 근본 뜻만을 간직할 뿐, 결코 머물고 떠남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자명(慈明)스님이 옛날에 분양(汾陽)스님을 하직하자 분양스님은 이렇게 축원하였다.
"절을 짓고 보수하는 일은 자연히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불법의 주인이 되도록 하여라."
자명스님은 그로부터 다섯 번이나 큰 사찰에 머물게 되었으나 서까래 하나 건드리지 않고 임제스님의 정통종지만을 드날렸다. 드디어는 양기(楊岐)·황룡(黃龍)·취암(翠巖) 세 큰스님을 얻어 자손이 세상에 두루 퍼지니, 결과적으로 당부를 저버리지 않은 셈이다.
옛사람은 짐을 걸머질 만한 사람을 선택하는 데 이처럼 신중했었다. 절집을 화려하게 장엄하는 일은 불법에 있어서는 대단할 것이 없다 하겠다.
부처님의 도는 아득하고 넓어 오랫동안 부지런히 힘써야만 성취할 수 있다. 조사의 문하에선 팔을 자르고 눈 속에 서 있기도 했으며, 허리에 돌을 지고 방아를 찧기도 했다. 보리를 지고 수레를 밀기도 했으며, 채소밭을 건사하며 밥을 짓기도 했었다. 또는 밭을 개간하기도 하고 차를 달여 베풀기도 하며 흙을 나르고 연자방아를 돌리기도 했다. 이는 모두 높은 뜻으로 세속을 끊고서, 쉬지 않고 스스로 애쓰며 도를 성취하고자 한 자만이 할 수 있었던 일이었으니, 이를 두고 "게으름 속에서는 한 법도 나오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마침내 연원(淵源)을 통달하고 나서 보니 그것은 너무나 어렵고도 험하여 아무도 달성하지 못할 것이었는데도 그들은 해냈었다. 그런데 세상에 나와 상대하며 허리 굽히거나 높혀보는 등의 일은 못하겠다고 하니, 이것은 하지 않는 것이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당초에는 구름 위에 머물렀으나, 스스로 경책하여 방편문을 넓히는 것도 좋지 않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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