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림성사(叢林盛事)

125. 당(唐) 우세남(虞世男)의 통력(通曆)

通達無我法者 2008. 2. 27. 14:28
 



125. 당(唐) 우세남(虞世男)의 통력(通曆)



당(唐)나라 우세남(虞世南:558~638)의 `통력(通曆)"에 이런 글이 있다.



어느 사람이 물었다.

"양 무제(梁武帝)는 흉악한 무리를 평정하여 왕업을 이룩하고 50여년을 천하에 군림하였으니, 아마 그는 문무(文武)의 도를 겸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리고 불전(佛典)에 마음을 두어 승려들과 비슷하게 수행하였으니, 만승천자로서 한낱 필부의 선행까지 다한 사람인데도 그가 닦고 익힌 도를 보전하지 못하고 위태로움과 멸망이 그의 생전에 닥쳤습니다. 이는 어찌하여 그처럼 된 것이며 겸허한 이는 복 받는다 하는데 어찌하여 영검이 없습니까?"

선생이 답하였다.

"불교란 세속을 초월하는 나루터이자 교량이며, 번뇌를 끊는 궤도이자 발자취이다. 마음 속을 운용하고 유무를 초탈하여 세속의 번뇌가 모두 없어지고 인연이 끊어진 다음에야 해탈의 문에 들어갈 수 있다.

그리고 속세를 교화하는 법에 보시(布施)․지계(持戒)․인욕(忍辱)․정진(精進)․선정(禪定)․지혜(智慧)가 있는데, 이것을 6바라밀(六婆羅蜜)이라 한다. 이는 유교의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과 무엇이 다른가? 자신이 닦는 바는 `인(因)'이 되고 보답 받는 바는 `과(果)'가 되는데 사람이 이 6바라밀행을 닦지만 모두 온전하지 못한 자가 많으나 여기서 한가지라도 빠지면 과보도 따라서 없어진다. 그러므로 종명(鬷明)은 얼굴은 추악하였으나 마음은 지혜로웠고 조일(趙一)은 재주는 높았지만 벼슬은 낮았으며 나포(羅褒)는 복은 있으나 의리는 없었고 원헌(原憲:공자제자)은 가난했지만 도가 있었다. 각기 이렇게 엄청나게 다른 것이다. 사람의 흥망 득실이란 모두가 자신의 수행으로 말미암아 얻어진 것이다. 못난 선비와 용렬한 사람들은 충직한 간언을 해서 살점을 도려내는 극형을 받았던 비간(比干:殷의 충신)을 보고서, 마음 속으로 `충직하기는 하지만 반드시 그렇게 할 필요는 없다'라고 여기며, 언왕(偃王)의 망국고사를 들고서 그들은 `어질고 의로운 사람이기는 하나 본받을 바는 못된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사람이라면 도척(盜跖)처럼 동능(東陵)에서 베개를 높이 하고 장교(莊蹻)처럼 서촉(西蜀)에 수레를 매달아 놓고서 안일한 일생을 마친다 한들, 이를 어떻게 잘한 짓이라 하겠는가"

"주 무제(周武帝)는 불교와 도교를 파괴하였는데(會昌法難을 말함)이것은 옳은 일입니까? 아니면 잘못된 일입니까?"

"잘못된 일이다."

"그에 대한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석가의 법이란 공(空)과 유(有)에 막힘이 없고 인아(人我)를 모두 잊고 생사를 뛰어넘어 적멸(寂滅)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는 우주 만상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난 이야기들이다. 노자의 뜻은 `곡신(谷神)은 죽지 않고 현빈(玄牝:현묘한 생명)은 길이 존재하여' 장생을 누리면서 구름과 학을 타고 물외(物外)에 노니는 것이다. 이는 신선세계의 가르침이다. 악을 막고 어짐을 숭상하며 잔혹한 이와 살인자를 없애는 데에는 두 종교가 모두가 왕도정치에 유익한 것이며 세속의 법칙에 어긋남이 없다. 그런데 지금 용렬한 승려가 계율을 범했다고 해서, 또는 도사가 경전을 잊었다고 하여 그 가르침을 버리고 그 말씀은 없앤다 하면 이는 도올(檮杌)의 죄를 물어 요(堯)임금까지 폐위시키거나, 삼묘족(三苗族)을 원수로 여겨 우(禹)임금까지 쫓아내거나, 또는 고자(瓠子)지방에 수해가 범람하였다 하여 항하수의 수원을 막아버린다거나, 곤륜산 후미진 곳에 햇볕이 들지 않는다 하여 갑자기 불씨를 던지는 일들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는 일찍이 백성에게 혜택의 이로움이 깊은 줄을 모른 것이며, 세속의 풍속을 변화시킨 공용이 매우 넓다는 사실을 조금치도 모른 것이다. 이는 마치 우물 안의 개구리가 바다를 보고서 자기의 소견에 얽매여 긴긴 밤같은 미혹 속에 윤회하면서 깊이 빠져들어가는 괴로움을 스스로에게 끼치는 격이다. 또한 후학에게 의혹을 주어 잘못 인도하게 되니, 참으로 가슴아픈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