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칙 파릉의 제바종〔巴陵提巴宗〕
(수시)
구름이 너른 들녘에 뒤덮이니 온 세계 어디에도 감출 수 없고 눈이 갈대꽃에 내리니 자취를 구분하기 어렵다. 차가운 곳은 얼음 눈처럼 차갑기만 하고 미세한 곳은 쌀알 끝처럼 미세하며, 깊고 깊은 곳은 부처의 눈으로도 엿보기 어렵고, 은밀하고도 은밀한 곳은 마귀나 외도도 헤아리지 못한다.
하나를 들어서 나머지 세 가지를 밝히는 일을 그만두고 앉아서 온 세상 사람의 혀를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것은 어떨는지? 말해보라, 이는 어떠한 사람의 경계에 해당하는 일인가? 본칙의 거량을 살펴보아라.
(본칙)
어떤 스님이 파릉(巴陵)스님에게 “무엇이 제바(提婆)의 종지입니까?”라고 물으니
-흰 말이 흰 갈대 꽃 속으로 들어간다. 뭐라고 하겠는가? 바로 그것이다.
파릉스님이 말하였다.
“은바리때에 눈〔雪〕을 담았노라.”
-그대의 목구멍을 막았다. 갈기갈기 찢겼구나.
(평창)
이 공안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잘못 이해하고서 “이는 외도(外道)의 종지다”라고 하지만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제15조 제바(提婆)존자는 외도 가운데 하나였는데 제14조 용수(龍樹)존자를 뵈었을 때 바늘을 바리때 속으로 던지자 용수존자는 그를 큰그릇으로 여기고 부처님의 심종(心宗)을 전수하여 제15조로 삼았다.
「능가경(楞伽經)」에서는 “부처님이 말씀해주신 마음〔佛語心〕으로 종(宗)을 삼고, 문(門)이 없는 것으로 법문(法門)을 삼으라”고 하였으며, 마조스님은 “이러쿵저러쿵 말을 한다면 제바의 가르침이니 다만 ‘이것’을 핵심으로 삼아야 한다”하였다.
여러분들은 납승의 문하객(門下客)들인데 제바의 종지를 일찍이 몸소 알아차렸는가? 만약 몸소 알아차릴 수 있다면 서천(西天)의 96종 외도가 일시에 그대에게 항복하겠지만, 몸소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도리어 가사(袈裟)를 뒤집어 입고 쫓겨나는 꼴 (논쟁에서 패하면 이렇게 함)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말해보라, 이 무엇인가를. 지껄인 말이 옳다 해도 관계가 없을 것이며 옳지 않다 해도 또한 관계가 없을 것이다. 말해보라. 마대사(馬大士)의 뜻은 어디에 있는가? 그뒤에 운문스님은 “마대사는 좋은 말씀을 했지만, 묻는 사람이 없었을 뿐이다“고 하였다. 어느 스님이 ”어떤 것이 제바의 종지입니까?“하고 묻자, 운문스님은 96종 외도 가운데 그대가 최하의 한 종류이다”라고 하였다.
지난날 어느 스님이 대수(大隋)스님을 하직하자 대수스님은 말하였다. “어느 곳으로 가려느냐?” 그 스님이 “보현보살(普賢菩薩)에게 예배하러 갑니다”라고 말하자, 대수스님은 불자(佛子)를 곧추세우면서 말하였다. “문수․보현 보살 모두가 ‘여기’에 있느니라.” 그 스님이 하나의 원상(圓相)을 그려 스님께 바치려다 등뒤로 던져버리자, 대수스님은 말하였다. “시자야, 차 한 봉 가져다가 이 스님에게 주도록 하라.”
이에 운문스님이 따로이 논평하기를 “서천에서는 머리를 베고 팔을 끊어버리지만 여기서는 내쫓는다”고 하고, 또 이르기를 “붉은 깃발이 나의 손안에 있다”고 했다. 서천에서는 논의(論議)에서 이긴 사람은 손에 붉은 깃발을 잡고, 진 사람은 도리어 가사를 뒤집어 입고 쪽문으로 물러가는 관례가 있었다.
서천에서 논의를 하려고 할 때는 반드시 왕의 칙명에 따라 큰절에서 종을 울리고 북을 두드린 뒤에 논의를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외도들은 불교 사원 종과 북을 봉하여 치지 못하도록 금하여 불법을 배척했던 것이다. 당시 가나제바존자(迦那提婆尊者)는 불법에 어려움이 닥치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서 신통력으로 누각에 올라 종을 치며 외도를 물리치려고 하였다. 이윽고 외도가 물었다.
“누각 위에서 종을 치는 자는 누구인가?”
제바가 말하였다.
“하늘이다.”
“하늘은 누구인가?”
“나〔我〕다.”
“나〔我〕라니, 누구인가?”
“내〔我〕가 그대이다.”
“그대가 누구인가?”
“그대는 개〔狗〕이다.”
“개는 누구인가?”
“개가 그대이다.”
이처럼 일곱 번을 반복하자 외도는 스스로 졌다는 것을 알고 이치에 굴복하여 드디어는 문을 열었다 한다. 제바가 이때에 누각 위에서 붉은 깃발을 가지고 내려오자 외도가 말하였다.
“그대는 왜 뒤에 않는가?”
“그대는 왜 앞서지 못하는가?”
“그대는 천한 사람이다.”
“그대는 훌륭한 사람이구나.”
이처럼 끊임없이 문답을 주고받으면서 제바가 막힘없는 논변으로 그를 꺾어버리니 이로 인하여 외도는 굴복하였다.
그때 제바존자는 손에 붉은 깃발을 잡았으며 논의에서 진 사람은 깃발 아래 서 있었다. 외도들이 모두가 목을 베어 사과를 하려 하자, 제바는 이를 제지하고 단지 잘 지도하여 머리를 깎아 불도에 들어오도록 하니 이로써 제바의 종지는 크게 흥성하였다. 설두스님이 뒤에 이 일을 송(頌)하였다.
파릉스님의 대중들 중에는 그를 감다구(鑑多口 : 말 잘하는 감스님)라 부르기도 했다. (선승이 선지식을 만나면 좌구를 펴고 예를 올리는데) 그는 항상 좌구를 꿰매어버리고는 (절도 올리지 않고)행각했다. (바로 이 파릉스님이) 저 운문스님 본분의 대사(大事)를 깊이 체득했다. 그래서 기특한 것이다. 그후 세상에 나와 운문스님의 법을 이었지만 처음 악주(岳州) 파릉에 주지살이 할 때 결코 법사(法嗣)에 대한 글을 지어 올리지 않고, 다음과 같은 삼전어(三傳語)만을 운문스님에게 올렸다.
“무엇이 도일까? 눈밝은 사람이 우물에 떨어졌도다.”
“무엇이 취모검(吹毛劍)일까? 산호의 가지마다 달이 걸렸다.”
“무엇이 제바종일까? 은바리때에 눈을 담았다.”
운문스님이 말하기를 “후일 노승의 제삿날에 이 삼전어만 거량하여도 크게 은혜를 보답한 것이다”라 했다. 이후로 그의 말대로 제삿날이 되면 재를 올리지 않고 운문스님의 유언에 따라서 이 삼전어만을 거량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여러 총림에서 답변한 것은 대부분 사(事)의 측면에서 답변한 것이므로, 오직 파릉스님의 이와 같은 말은 지극히 고준(孤峻)하여 이해하기 어렵다. 또한 조금치도 칼날을 노출하지 않은 채, 팔방의 적을 상대하면서도 쓱쓱 몸을 벗어날 길이 있으며, 범을 사로잡는 솜씨가 있어 사람의 정견(情見)을 벗겨주었다. 만약 절대평등의 세계에서 의론한다면 여기에 이르러 모름지기 자신이 투철히 벗어난 뒤에야 마침내 사람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도오(道吾)스님이 홀(笏)을 들고 춤을 춘 것은 같은 경지에 있는 사람이라야 알고, 석공(石鞏)스님이 활을 당긴 뜻은 작가 선지식이라야 안다. 이 이치를 스승이 인가하고 전수하지 않는다면 어느 법에 의지하여 현담(玄談)을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설두스님은 바로 뒤이어 사람을 제접하기 위하여 송을 했다.
(송)
신개(新開)의 영감님
-일천 군사를 얻기는 쉽지만 한 장수를 구하기는 어렵다. 말 많은 스님이로다.
뚜렷이 남다르구려.
-무엇이 뚜렷한가? 정문(頂門)을 한 번 내지를 줄을 알았겠느냐 몰랐겠느냐?
은바리때에 흰 눈을 담았다고 말할 줄 알았네.
-새우가 뛰어봐야 물통을 벗어나지 못한다. 두 번 잘못된 공안이로다.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으리라.
96종 외도들도 스스로 알았을 것이다.
-그러는 네 자신도 외도이다. 화상아, 알았느냐? 한 구덩이에 묻어버려라.
몰랐다면 다시 하늘 저편의 달에게 물어보라.
-아직 까마득히 멀다. 꺼져라. 허공을 바라보며 하소연하는군.
제바의 종지, 제바의 종지여!
-무슨 말을 하는가? 산승은 여기에 있다. 입이 얼어붙어 열 수가 없다.
붉은 깃발 아래 맑은 바람 일으키네.
-산산이 부서졌다. (원오스님은) 치면서 말한다. 벌써 급소를 찔렸군. 그대는 가서 머리를 베고 팔을 끊도록 하라. 그대에게 ‘한 구절’을 말해주리라.
(평창)
“신개(新開) 영감님”에서 신개(新開)란 사원의 명칭이다. “뚜렷하게 남다르구려”라는 설두스님의 찬탄은 참으로 적절하다.
말해보라, 어디가 뚜렷하게 남다른 곳인가를. 일체의 언어가 모두 불법이다. 산승이 이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무슨 까닭이 있는 것은 아니다. 설두스님은 의도를 살짝 드러내어 다만 “참으로 남다르구려”라 하고, 그 다음에 풀이하기를 “은바리때에 눈을 담았다고 말할 줄 아네”라고 했다. 다시 그대들에게 주석을 내려 “96종 외도들도 승부에서 졌는 줄을 스스로가 알아야만 한다. 만일 그대들이 몰랐다면 하늘 저편의 달에게 물어보아라”고 하였다.
옛사람이 일찍이 이 이야기에 대해서 말하기를 “하늘 저편의 달에게 물어보아라”하였다. 설두스님은 송을 마치고 맨 끝에 모름지기 활로(活路)가 있었으니, 사자의 되받아치는 말로써 다시 그대들에게 말하기를, “제바의 종지, 제바의 종지여! 붉은 깃발 아래 맑은 바람 일으키네”라고 하였다.
파릉스님은 “은바리때에 눈을 담았다”고 하였는데, 설두스님은 “붉은 깃발 아래 맑은 바람 일으키네”라 하였을까? 설두스님은 칼을 쓰지 않고도 사람을 죽인다는 사실을 알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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