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碧巖錄)

제15칙 운문의 일대시교를 뒤집어 엎음〔雲門倒一說〕

通達無我法者 2008. 3. 3. 07:45
 

 

 

제15칙 운문의 일대시교를 뒤집어 엎음〔雲門倒一說〕


(수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칼은 옛 시대의 가르침이기도 하며, 이 시대의 중요한 요체이기도 하다. 말해보라, 오늘날 어느 것이 사람 죽이는 칼이며 살리는 칼인가를. 본칙을 살펴보아라.


(본칙)

어떤 스님이 운문스님에게 물었다.

“상황에 맞는 상대방도 아니고, 상황에 맞는 말씀도 아닐 때는 어떠합니까?”

-날뛰어서 무엇 하려고? 삼천 리나 떨어졌군.


운문스님은 말하였다. “거꾸로 한 번 말씀하심이니라.”

-(거꾸로가 아니라) 제대로이다. 죄상이 죄수의 입에서 왔다. 놓아보내서는 안 된다. 거친 (번뇌의) 풀 속에 몸을 눕혔도다.


(평창)

이 스님은 참으로 작가 선객이었기에 이처럼 물을 줄을 안 것이다. 처음에 한 질문은 ‘법문을 청함〔請益〕’이라고 하는데, 이 질문은 이해한 것을 아뢰는 물음〔呈解問〕 또는 칼끝을 숨신 물음〔藏鋒間〕에 해당된다 하겠다. 만일 운문스님이 아니었더라면 그를 어찌하지 못했을 것이다. 운문스님에게 이러한 솜씨가 있었기에 그가 물어오자 마지못해서 말로 답하였다. 무엇 때문인가? 작가 종사란 밝은 거울이 경대에 걸려 있어서 오랑캐가 오면 오랑캐가 나타나고 한족이 오면 한족이 나타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옛사람은 “자기가 간절하게 얻고자 한다면 물음을 가지고 묻지 말라. 왜냐하면 물음은 답에 있고, 답은 물음에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예전의 모든 성인들은 일찍이 한 법이라도 사람에게 말해준 적이 없으니, 언제 그대에게 선도(禪道)를 말해주었던가? 그대가 지옥의 업을 짓지 않는다면 자연히 지옥의 과보를 부르지 않을 것이며, 그대가 천당에 갈 씨〔因〕를 만들지 않는다면 자연히 천당의 과보를 받지 않을 것이다. 일체의 업연(業緣)이란 모두가 자신이 짓고 자신이 받는 것이다.

옛사람(운문스님)이 그대들에게 분명히 말하였다. “이 일을 논한다면 언구(言句)에 있지 않다. 만일 언구에 있다면, 삼승십이분교(三乘十二分敎)에 어찌 언구가 없다 하겠는가? 더욱이 무엇 때문에 조사가 서쪽에서 오셔야만 했겠는가?”

앞(제14칙)에서는 “상황에 맞게 하신 말씀이라”고 하였고, 여기에서는 다시 “거꾸로 한 번 말씀하심이라”고 하였다. 그저 한 글자(倒 와 對) 다를 뿐인데 어찌해서 천차만별이 있을까? 말해보라, 문제점이 어디에 있는가를. 그러므로 “법은 인연 따라 행하고 전법을 위한 깃발은 가는 곳마다 세운다”고 하였다. “상황에 적절한 상대도 아니고, 상황에 적절한 말씀도 아닐 때는 어떠합니까? 라는 말은 정면으로 한 번 건드려본 것이다. 그러나 만약 안목을 갖춘 자라면 조그만치도 그를 속일 수 없을 것이다. 질문이 이미 어려웠기 때문에 대답 또한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실로 운문스님은 도적의 말을 타고 도적을 쫓은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를 잘못 이해하고서 ”본래 주인이 할 말을 손님이 했기 때문에 운문스님이 ‘거꾸로 한 번 말씀하심이라’고 하였다”고 하나, 무엇이 그리도 다급할까!

이 스님의 물음은 좋았었다. “상황에 적절한 상대도 아니고, 상황에 적절한 말씀도 아닐 때는 어떠합니까?”에 대해, 운문스님은 무엇 때문에 그에게 다른 말로 답하지 않고, 다만 “거꾸로 한 번 말씀하심이라”고 말하였을까? 운문스님이 일시에 그를 타파해버리려고 여기에 이르러서 “거꾸로 한 번 말씀하심이라”고 말한 것은, 사실은 멀쩡한 살갗을 긁어서 부스럼을 만든 격이라 하겠다.

무엇 때문일까? 말의 자취가 일어나면 흰 구름이 천리 만리 덮인 것처럼 그로 인해서 길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설령 일시에 언구가 없다 해도 노주(露柱)와 등롱(燈籠)이 어찌 말이 있었겠으리요. 알겠느냐? 만일 알지 못했다면 여기에 이르러서는 모름지기 시점을 바꾸어야만 비로소 귀착점을 알게 될 것이다.


(송)

거꾸로 한 번 말씀하심이여!

-놓아버리질 못했구나. 갈기갈기 찢겼구나. 수미산 남쪽 언덕에 보관한 경전이 모두 5천 48권이로다.


(쪼갤 수 없는) 한 덩어리를 쪼개어

-그대에게도 있고 내게도 있다. 하남(河南)에도 있고, 하북(河北)에도 있도다. 손을 잡고 인도해주는구나.


생사를 같이하며 그대 위에 결단해주었네.

-(부질없이) 진흙 속에서 흙덩이를 씻는다. 무슨 까닭인가? 그대를 포기할 수 없다.


8만 4천 대중은 봉황의 털이 아니며

-(그 숫자가) 새털처럼 많다. 너무나 사람의 기를 죽이는구나. 답답한 놈이 부지기수로다.


33인의 조사는 호랑이 굴로 들어갔다.

-나만이 알뿐이다. (천 명의 졸개를 구하기는 쉬워도) 한 명의 장수는 구하기 어렵다. 들여우떼 한 무리로다.


별나고도 별남이여!

-무슨 유별난 곳이 있으랴. 뽐내지 마라. 마음대로 날뛰거라.


일렁일렁, 반짝반짝 물 속에 어린 달이로다.

-밝은 대낮에 거울 속의 형상을 자기로 잘못 알았구나. 허둥지둥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평창)

설두스님 또한 참으로 작가다웁다. 한마디로 대뜸 “(쪼갤 수 없는) 한 덩어리를 쪼갰다”하니, 분명하게 한 수 뒤로 물러나 손을 잡아 인도해주었다. 그는 원래 용서해주는 솜씨가 있기에 감히 그대와 함께 진흙과 물 속으로 들어가 생사를 함께 하였다. 그러므로 설두스님이 이처럼 송을 하였으나, 실로 별다를 것이 아니다. 다만 그대의 끈끈한 속박을 풀고, 그대를 얽어매는 쐐기를 뽑아주려고 하였던 것인데, 요즈음엔 도리어 언구에 의지하여 점점 더 알음알이를 내고 있다.

예컨대 암두스님이 “설봉(雪峰)스님은 비록 나와 생을 함께 하지만 나와 죽음을 같아할 수는 없다”라고 말한 것처럼, 만일 온전한 기틀로써 투철히 벗어나 완전히 자재(自在)를 얻은 사람이 아니라면 결코 그와 사생을 함께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운문스님)에게는 수많은 득실․시비․삼루(滲漏 : 悟道上에 있어서의 미혹)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동산(洞山)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향상인(向上人)의 진위(眞僞)를 분별하고자 한다면 여기에는 세 가지 삼루(滲漏)가 있다. 곧 망정이 새어나오는 것〔情滲漏〕과, 견해가 새어나오는 것〔見滲漏〕과, 말이 새어나오는 것〔語滲漏〕이 그것이다. 견삼루란 작용이 단계적인 지위를 떠나지 못하면 독바다〔毒海〕에 떨어진다는 것이며, 정삼루란 지혜에 항상 안정되지 못해 식견이 치우치는 것이며, 어삼루란 오묘함만을 따르다가 종지를 잃어 언제나 상황판단이 어두운 것이다. 이 세 가지 삼루를 마땅히 알아야 한다.”

또 삼현(三玄)이 있으니, 곧 체중현(體中玄), 구중현(句中玄), 현중현(玄中玄)이다. 옛사람은 이러한 경계에 이르러 온전한 기틀〔全機〕과 완전한 작용〔大用〕으로 삶을 만나면 그와 함께 살고, 죽음을 만나면 그와 함께 죽는다. 범의 아가리에 몸을 처넣고 내맡겨 천 리 만 리라도 그를 따라갔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 궁극의 한 수는 그 자신이 얻도록 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8만 4천 대중은 봉황의 깃털이 아니다”한 것은 영산회상(靈山會上)의 8만 4천 성중(聖衆)이 봉황의 깃털이 아니라는 것이다. 「남사(南史)」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송(宋)나라1)때 사초종(謝超宗)은 진군(陳郡) 양하(陽夏) 땅 사람이며, 사봉(謝鳳)의 아들이다. 학문을 널리하고 문장과 재주가 뛰어나 조정에서 따를 사람이 없었다. 그 당시에 독보적인 존재였으며 문장에 능하여 왕부상시(王府常侍)2)가 되었는데, 왕의 모친 은숙의(殷淑儀)가 죽었을 때 제문을 지어 올리게 되었다. 무제(武帝)는 그 글을 보고서 크게 칭찬하면서 ‘초종에게 참으로 봉황의 깃털이 있다’하였다. ”옛 시(두보의 시)에서는 다음과 같이 인용한 바 있다.


조회 마친 소매 끝에 향기 가득 스며 있고

시를 지음에 붓 끝엔 주옥이 구르네.

대대로 맡아온 사륜(絲綸)의 아름다움을 알려는가.

연못 위엔 지금 봉황 깃털이 있다.


지난날 영산회상에서 사부대중(四部大衆)이 구름처럼 모였는데 세존께서 꽃을 드시니 오직 가섭만이 홀로 빙그레 미소를 지을 뿐, 나머지는 무슨 뜻인지를 몰랐다. 설두스님은 이 때문에 “8만 4천 대중은 봉황 깃털이 아니다”라고 했던 것이다.

“33인이 호랑이 굴로 들어갔다”고 송했다. 아난(阿難)이 가섭존자에게 “세존께서 금란가사(金襴袈裟)를 전하신 외에 따로이 어떠한 법을 전했지요?”라고 묻자, 가섭존자는 “아난아!”하고 불렀으며, 아난이 “네!”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가섭이 이르기를 “문 앞에 서 있는 찰간(刹竿)대를 넘어뜨려버려라”라고 했다. 아난은 드디어 깨치고 그후 조사와 조사가 서로 전수하여 서천과 중국 땅에서 서른세 사람이 “호랑이 굴로 들어가지 않으면 어떻게 호랑이를 잡을 수가 있겠느냐?”고 하였다. 운문스님도 이와 같은 사람이라서 훌륭하게 사생을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종사가 사람을 제접하려면 모름지기 이같은 경지에 이르러야만 된다. 곡록목상(曲彔木牀 : 설법하는 의자)에 앉아서 제 스스로 타파하게 내맡겨두고, 스스로 호랑이 수염을 만지도록 하는, 모름지기 그러한 경지에 이르러야만 된다.

일곱 가지 장비를 갖추어야만 생사를 함께 할 수 있다. 높은 자는 억누르고, 낮은 자는 높여주며, 부족한 자에게, 높은 봉우리에 있는 사람을 구제하여 (번뇌의) 거친 풀 속으로 들어가게 하고, 거친 풀에 떨어져 있는 자는 구제하여 높은 봉우리에서 살게 하여야 한다. 그대가 확탕(鑊湯)․노탄(爐炭) 지옥으로 들어가면 나도 함께 확탕․노탄 지옥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것은 실로 별다른게 없고, 다만 그의 끈적끈적한 속박을 풀어주고, 못과 쐐기를 뽑아주며, 채롱〔籠〕을 벗겨버리고 짐을 부려버리게 하는 데 있다.

평전(平田 : 770~843)화상이 한 수의 송을 하였는데 매우 훌륭하다.


신령한 빛이 어둡지 않아

만고에 아름다운 도이니

이 문에 들어와서는

알음알이를 들먹거리지 말라.


“별나고도 별남이여! 일렁일렁, 반짝반짝 물 속에 어린 달이다”하니, 참으로 몸을 벗어날 길이 있으며 사람을 살리는 기틀이 있다. 설두스님이 염송(拈頌)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가서 살 기틀〔生機〕을 밝게 깨달아 어구(語句)를 따르지 못하도록 하였다. 만일 그대가 언어나 문자 따위를 따른다면 바로 이것이 “일렁일렁, 반짝반짝 물 속에 어린 달”이다. 이제 어떻게 하면 평온을 얻을 수 있을까? 한 수 봐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