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碧巖錄)

제17칙 향림의 조사께서 오신 뜻〔香林西來〕

通達無我法者 2008. 3. 3. 07:49
 

 

 

제17칙 향림의 조사께서 오신 뜻〔香林西來〕


(수시)

(자기를 속박하는)못을 끊고 무쇠를 자르면 비로소 본분종사(本分宗師)가 될 수 있으나 화살을 피하고 칼을 비킨다면 어떻게 팔방으로 통달한 작가 선지식이 될 수 있겠는가? 침으로 찔러도 들어갈 틈이 없는 자리는 그만두고라도 (드넓어) 흰 물결이 하늘까지 닿을 때는 어찌해야 하겠는가? 본칙의 거량을 살펴보아라.


(본칙)

어느 스님이 향림스님에게 물었다.

“무엇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많은 사람이 의심하고 있구나. 아직도 이러한 얘기가 남아 있는가?


향림스님이 말하였다.

“오랜동안 앉아 있노라니 피곤하구나.”

-물고기가 헤엄치니 흙탕물이 일고 새가 나니 깃털이 떨어진다. 개주둥이 닥쳐라! 작가의 안목이구나. 저울추를 톱으로 켜는 정도로 솜씨가 훌륭하다.


(평창)

향림(908~987)스님이 “오랜동안 앉아 있노라니 피곤하다”고 했는데, 알겠느냐? 알 수 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이러니 저러니 말로) 다투지 않겠지만, 알지 못한다면 엎드려 판결 처분을 들어라. 옛사람은 행각함에 벗을 사귀어, 함께 수행하는 도반(道伴)을 맺어 풀을 헤치고 조사의 가풍을 바라보았었다.

이때에 운문(864~949)스님은 광동의 남쪽지방에서 널리 교화했었는데, 향림스님은 멀리 서촉(西蜀) 지방에서 오니 아호(鵝湖)․경청(鏡淸 : 866~937)스님과 같은 시대였다. 먼저 호남(湖南)의 보자(報慈)스님을 참방하였고, 그 뒤에야 운문스님의 회하에 이르러 18년 동안 시자(侍者)를 하였다. 운문스님의 처소에서 몸소 체득하고 친히 들었으니 그가 깨달은 시기가 늦기는 했지만 참으로 그릇이 크다.

운문스님의 곁에서 18년간 기거하는 동안, 운문스님은 항상 “원시자(遠侍者)야”라고 부를 뿐이였다. 향림스님이 “예”하고 대답하기만 하면 운문스님은 “무엇인고”라고 하였다. 향림스님이 당시에 말로써 자기의 견해를 말씀드리고 알음알이를 써봤으나, 끝내 계합되지 못했다. 어느 날 갑자기 “제가 알았습니다”라고 하자 운문스님이 말하였다. “왜 향상(向上)을 말하지 않느냐?” 그리하여 또다시 3년을 더 머물렀다. 운문스님은 방장실에서 찾아오는 이들에게 대기(大機)의 변론을 하곤 했는데 대부분이 원시자가 그때그때마다 알아듣도록 깨달음을 얻게 하기 위함이었다. 운문스님이 했던 한 말 한 구절은 모두 원시자가 간수해 두었다.

향림스님은 그 뒤 촉(蜀) 땅으로 돌아가 처음에는 도강(導江) 수정궁(水晶宮 : 西川 迎詳寺의 天王院)에서 주지를 하다가, 뒤이어 청성(靑城) 향림사(香林寺)의 주지가 되었다. 지문 광조(智門光祚)스님은 본디 절강(浙江) 땅 사람으로 향림스님의 도력이 성하다는 말을 듣고 일부러 촉 땅으로 들어가 참례하였다. 지문 광조스님은 곧 설두스님의 스승이다. 운문스님이 제접한 사람이 수없이 많았으나 당대에 도를 행한 자로서는 오직 향림일파만이 가장 성대하였을 뿐이다. 그는 사천(泗川) 땅으로 돌아가 향림원(香林院)에서 40년간 주석하다가 80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그는 일찍이 이르기를 “내가 40년 만에야 비로소 한결같은 상태를 이루었다”라고 하였다.

대체로 대중 법문에서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행각하며 선지식을 참방하려면 안목을 지니고서 모름지기 검고 흰 것을 분간하여 깊고 얕음을 살펴봐야만 된다. 무엇보다 먼저 반드시 뜻을 세워야 한다. 석가 노인도 수행의 인지(因地)에 계실 때 나타내신 한마디 말, 한 생각이 모두 입지(立志)였었다.”

뒤에 어떤 스님이 “무엇이 (조사) 실내의 한 등불입니까?”라고 묻자, 향림스님은 말하였다.

“세 사람이 증명하면 거북도 자라가 된다.”

“무엇이 가사 밑의 일입니까?”

“섣달의 불이 산을 태운다.”

예로부터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에 대한 답변은 매우 많으나, 오직 향림스님의 이 일칙(一則)이 온 세상 사람의 혀를 옴짝달싹 못 하게 하고, 그대들이 헤아리며 이러니 저러니 말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어떤 스님이 “무엇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라고 묻자, 향림스님이 “오랜동안 앉아 있노라니 피곤하구나”라고 말하였다.

이는 (인위적으로 꾸민) 맛이 아닌 진국이다. 이처럼 꾸밈없는 말이 사람의 입을 꽉 틀어막아 그대들이 조잘대지 못하게 했다. 이는 단박에 알아차려야 한다. 그러나 만일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절대로 알음알이로 알려 해서는 안 된다. 향림스님은 일찍이 작가 선지식을 만났었기에 운문스님의 솜씨가 있어 운문 삼구(三句)의 체제와 가락이 있었다.

사람들은 흔히 잘못 알고서 “조사가 서쪽에서 오시어 9년간 면벽(面壁)을 했으니, 어찌 ‘오랜동안 앉아 있어 피로하지’ 않았겠느냐?”고 하지만 여기에 무슨 근거가 있겠는가? 이는 저 고인이 얻은 완전하게 자유자재로운 경지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저들은 실제의 경지를 터득하여 불법에 대한 잡다한 알음알이나 설명이 없고, 모든 상황마다 알맞게 활용했다. 이른바 “법은 법에 따라 행하고 법을 펴기 위한 법당(法幢)은 이르는 곳마다 세운다”라는 것이다. 설두스님은 바람 부는 방향에 따라 불을 불며 곁에서 한 수도 아닌 반 수 정도 가르쳐준 것이다.

(송)

한 사람 두 사람 천만 사람이여!

-무엇 때문에 법령대로 처단하지 않는고? 수없이 많구나. 한 떼거리인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굴레를 벗고 무거운 짐을 부렸구나.

-오늘부터는 응당 말끔하여 해맑으리. 결판을 냈느냐?

왼쪽으로 돌고 오른쪽으로 돌며 뒤를 따르니

-아직 내려놓지 못했군. 뿌옇고 가물거리는구나. (원오스님은) 후려쳤다.


자호(紫胡)스님은 유철마(劉鐵磨)를 때릴 수밖에 없었구려.

-산승은 주장자를 꺾어버리고 결코 이 법령을 따르지 않겠다. 도저히 떠난 뒤에 활을 당겼군. (원오스님은) 후려쳤다. 위험하다.

(평창)

설두스님은 대뜸 전광석화처럼 내질러 그대에게 드러내 보여 주었으니, 말을 듣자마자 알아차려야 될 것이다. 역시 참으로 그 집안의 자손이었으므로 이처럼 말할 수 있다. 만일 곧바로 이처럼 이해할 수 있다면 참으로 기특하다 하겠다.

“한 사람 두 사람 천만 사람이여! 굴레를 벗고 무거운 짐을 부렸다”는 것은, 말끔하여 그지없이 해맑아 생사에 오염되지 않고 성인이니 범부니 하는 알음알이에 속박 당하지 않고 위로는 불조를 우러러보지도 않고 아래로는 자기 자신마저도 버리는 것이다. 하나같이 향림․설두스님과 똑같다. 어찌 천만 사람에 그치겠는가. 온 대지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이같으며, 과거의 부처는 물론 미래의 부처도 모두 이와 같다.

만약 언구를 가지고 알음알이로 이해하려 한다면 곧 “자호(紫胡)스님은 유철마(劉鐵磨)를 때려야만 했다”와 똑 닮으리라. 실로 말로써 이러니 저러니 하면 그 소리 들리자마자 후려쳐야한다.

자호스님이 남전(南泉)스님을 참례하였는데, 조주(趙州)․잠대충(岑大蟲)과 더불어 동기였다. 때에 유철마가 위산(潙山)아래에 암자를 짓고 있었는데, 여러 총림에서 아무도 그를 어찌하지 못했었다. 하루는 자호스님이 멀리서 방문하여 “소문난 맷돌〔鐵磨〕스님 아니신가요?”라고 말하자, 유철마는 말하였다.

“외람됩니다.”

“맷돌은 오른쪽으로 도는가? 왼쪽으로 도는가?”

“스님께서는 전도망상 떨지 마십시오.”

자호스님은 그 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쳐버렸다.

향림스님이 어떤 스님이 한 “무엇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이냐”는 물음에 “오랜동안 앉아 있노라니 피곤하다”고 말하였다. 만일 이처럼 이해한다면 왼쪽으로 돌고 오른쪽으로 돌면서 뒤를 따를 것이다.

말해보라, 설두스님이 이처럼 송을 한 뜻은 무엇인가를. 괜히 일삼지 말아야〔無事〕한다. 자, 여러분 거량해보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