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칙 경청의 껍질을 깨고 나옴〔鏡淸唻啄〕
(수시)
도란 지름길이 없고 그 자리에 들어서기가 매우 힘들고, 법이란 보고들을 수 없으며 말과 생각과는 멀리 떨어져 있다. 만일 가시덤불 숲을 뚫고 불조(佛祖)라는 속박마저도 풀어 젖히고 은밀한 경지를 얻는다면, 모든 하늘이 꽃을 바치려 해도 바칠 길이 없고, 외도가 남몰래 엿보려 해도 엿볼 문이 없을 것이며, 종일토록 행하여도 일찍이 행했다 할 것이 없고 종일토록 말하여도 일찍이 말했다 할 바 없다. 그리하여 자유자재하여 줄탁(唻啄)의 기틀을 펴고, 죽이고 살리는〔殺活〕칼을 쓸 수 있게 된다.
설령 이와 같아도, 모름지기 그것은 방편문〔建化門〕가운데에서 한 번은 추켜올렸다가 한 번은 깎아 내렸다 하는 것임을 안다면, 그래도 조금은 나은 편이다. 그러나 본분의 일에는 전혀 아무런 관계가 없다. 무엇이 본분의 일인가? 본칙의 거량을 살펴보아라.
(본칙)
어떤 스님이 경청(866~937)스님에게 물었다.
“학인(學人)이 줄(啐 : 병아리가 달걀 안에서 나오려고 쪼는 것)을 하겠으니, 스님께서는 탁(啄 : 병아리가 나오려고 쪼아댈 적에 어미닭이 맞춰 달걀을 쪼아주는 것)을 하여주십시오.”
-바람이 없는데 파랑을 일으켜 무엇할려고? 그대는 허다한 견해로써 무엇 하려는가?
“살아날 수 있겠는가?”
-내질렀구나. 모자를 사고 나서 머리 크기를 재는 꼴이군. 잘못을 가지고 잘못으로 나아간다. 절대로 이래서는 안 될텐데…….
“살아나지 못한다면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받을 것입니다.”
-서로 누를 끼쳤다. (그런 놈이) 천지에 그득하군. 이 외골수야!
경청스님은 말하였다.
“역시 형편없는 놈이로구나.”
-그럼 그렇지. 꺼져라! 봐줘서는 안 된다.
(평창)
경청스님은 설봉(雪峰)스님의 법을 이어받았으니, 본인(本人)․현사(玄沙)․소산(疎山)․태원 부(太原浮) 등과 같은 시대의 인물이다. 처음 설봉스님을 뵙고 종지를 얻은 뒤 항상 줄탁(啐啄)의 기연으로 후학을 일깨우니 근기에 딱딱 맞추어 설법을 하였다. 그는 대중 법문에서 이르기를 “무릇 수행하는 사람이라면 줄탁동시(啐啄同時)의 안목을 갖추고 줄탁동시의 작용이 있어야만이 바야흐로 납승(衲僧)이라 일컬을 수 있다. 이는 마치 어미닭이 쪼려 하면 병아리도 쪼지 않을 수 없고, 병아리가 쪼려고 하면 어미닭도 쪼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다”고 하니, 어떤 스님이 문득 앞으로 나와 물었다.
“어미닭이 쪼고 병아리가 쪼면 화상의 경지에서는 무엇이 되겠습니까?”
“좋은 소식이다.”
“반대로 병아리가 빨고 어미닭이 쪼면 학인의 경지에서는 무엇이 되겠습니까?”
“본래의 면목(面目)이 드러나지.”
이 때문에 경청스님의 문하에서는 줄탁의 기연이 있게 되었다. 이 스님 또한 그의 문하생인지라, 그 집안의 일을 알고 있었기에 이처럼 물은 것이다. “학인이 줄(啐)할 터이니 스님께서는 탁(啄)을 해주십시오”라는 이야기를 동산스님의 문하에서는, 현상적인 것을 빌려 기틀을 밝힌 것〔借事明機〕이라고 한다. 그러나 어찌 병아리가 쪼면 어미닭이 쪼아주는 것처럼 자연히 동시에 딱 맞아떨어지는 것이 있으리요.
경청스님 또한 훌륭하였다. 이른바 손과 발이 서로 맞고 마음의 눈이 서로를 척 알아보았다고 할 만하다. 그러므로 “살아날 수 있겠느냐?”고 대꾸하였다. 그러나 그 스님 또한 훌륭했다. 기연을 �출 줄을 알고서 한 구절에 빈(賓)․주(主)와 조(照)․용(用)과 살(殺)․활(活)을 갖추었다. 스님이 “살아나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비웃음을 받을 것이다”고 하자, 경청스님은 “역시 형편없는 놈이다”고 하여 함께 진흙과 물 속으로 들어갔으니, 경청스님의 솜씨가 참으로 거칠다 할 것이다. 이 스님이 이 정도의 질문을 할 줄 알면서도 무엇 때문에 “역시 형편없는 놈이라”고 말하였을까? 그러므로 작가의 안목은 모름지기 이와 같아야 한다. 마치 전광석화(電光石火)와 같아서 (경청스님의 경지에) 도달했건 못 했건 몸을 잃고 목숨을 뺏기게 되는 것이다. 만약 이와 같다면 곧 경청스님이 “역시 형편없는 놈이라”고 말했던 뜻을 알아차릴 것이다.
그리하여 남원(南院)스님이 대중 법문에서
“여러 총림에서는 줄탁동시의 안목을 갖추었을 뿐, 줄탁동시의 작용은 갖추지 못했다”고 하자, 어떤 스님이 나오더니
“무엇이 줄탁동시의 작용입니까?”하고 묻자, 남원스님이 말하였다.
“작가 선지식이라면 줄탁을 하지 않는다. 줄탁을 한다면 동시에 죽게 된다.”
“학인에게 의심이 있습니다.”
“어떤 것이 그대가 의심하는 점인가?”
“죽었습니다”라고 하자, 남원스님이 갑자기 몽둥이로 쳤으나 그 스님이 수긍하지 않으므로 그를 쫓아내버렸다. 그 스님이 뒤에 운문스님의 회하에 이르러 앞에 있었던 대화를 말하였더니, 한 스님이 말하였다.
“남원스님의 방망이가 부러졌습니까?”
그는 이 말에 환히 깨쳤다. 말해보라, 핵심이 어디에 있었는가?
그 스님이 되돌아와 남원스님을 뵈려 했지만 남원스님은 이미 죽은 뒤였다. 이에 풍혈(風穴 : 896~973)스님을 뵙고 절을 올렸더니 풍혈스님은 말하였다.
“당시에 선사(先師 : 남원스님)께 줄탁동시를 물었던 스님이 아니더냐?”
“그렇습니다.”
“그대는 그때 어떻게 이해했느냐?”
“저는 처음엔 마치 등불의 그림자 속에서 걷는 것과 같았습니다.”
말해보라, 이는 무슨 도리인가를. 이 스님이 말한 것이라고는 모두 “저는 처음엔 마치 등불의 그림자 속에서 걷는 것과 같았다”는 것뿐인데, 무엇 때문에 풍혈스님이 바로 “그대가 알았구나”라고 말했을까?
훗날 취암(翠巖)스님은 이에 대해서 “남원스님이 (장량처럼) 비록 장막 안에서 계획을 세워 천 리 밖의 승부를 결판짓는 솜씨가 있다고는 하지만 너른 땅에 알아보는 사람이 적은 것을 어찌하랴”라고 염(拈)하였으며, 풍혈스님은 “남원스님이 당시에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가 등줄기를 후려쳐서 그가 어떻게 하는가를 보았어야 했다”고 염하였다. 이 공안을 알아차린다면 경청스님이 이 스님을 어떻게 인도했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그가 말한 “형편없는 놈”이라는 소리를 면할 수 있을까? 이 때문에 설두스님은 그가 말한 “형편없는 놈”을 좋아하여 송을 하였다.
(송)
옛 부처는 가풍이 있어
-말소리가 아직도 귓전에 맴돈다. 천고의 본보기로다. 석가 노인을 비방하지 말아라!
(제자를 위해) 거량하다가 깎아 내림을 당했네.
-콧구멍이 어찌 산승의 손아귀에 있느냐? 형법대로라면 열세 대를 때려야 하지만 여덟 대만으로 봐주겠다. 그대는 어떻게 하려는가? 한 수 물려주리라. (원오스님은) 후려쳤다.
새끼가 어미가 서로 모르는데
-서로 몰랐는데 어찌 줄탁이 있을까? 원래부터 그렇다.
어느 누가 함께 줄탁을 할 수 있을까?
-산산히 부서졌구나. 노파심이 간절하다. 착각하지 말라.
쪼았다. 알아차렸다.
-무슨 말이냐? 들째번(방편문)에 떨어졌군.
아직도 껍질 속에 있도다.
-무엇 때문에 나오지 않느냐?
거듭 얻어맞았으니
-잘못했다. (원오스님은) 후려쳤다. 두 번 거듭된 잘못이라. 아니 세 겹 네 겹이로군.
천하의 납승들이 부질없이 겉모습만 더듬네.
-봐줬다. 꼭 거량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도 겉모습이라도 더듬을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있다 해도 역시 형편없는 놈이다. 천고 만고에 새까맣게 많구나. 도랑을 메우고 골짜기를 막을 정도로 많은 사람 중에서도 그것을 아는 사람이 없다.
(평창)
“옛 부처는 가풍이 있었다”라고 하여 설두스님은 한 구절로 송을 끝내버렸다. 대개 머리를 내밀어 엿보아도 곁에 얼씬도 할 수 없다. 만일 가까운 곁에 이르렀다 해도 아득히 멀다. 머리를 내밀어 엿보았다 하면 벌써 천박해진 것이다. 설령 종횡무진 하여도 조금도 힘들일 필요는 없다. 설두스님의 “옛 부처님에게는 가풍이 있다”는 말은, 요즈음이 이렇다는 것이 아니다.
석가 노인은 처음 탄생하자마자 한 손으로는 하늘을 가리키고, 한 손으로는 땅을 가리키며, 눈으로는 사방을 돌아보면서 “천상천하에 나 홀로 존귀하다”고 말씀하셨다. 이에 운문스님은 “내가 그 당시에 그걸 보았더라면 한 방망이로 쳐죽여서 개가 먹도록 던져주어 오로지 천하의 태평을 도모했을 것이다”고 하였다. 이처럼 해야지만 바야흐로 잘 응수하는 것이라 하리라.
그러나 줄탁의 기연은 모두가 옛 부처의 가풍인 것이다.
이 도를 통달한 자는 한 주먹으로 황학루(黃鶴樓)를 거꾸러뜨리고 한 발길로 앵무주(鸚鵡洲)를 걷어차 버리리라. 이는 큰 불더미와도 같아서 가까이하면 얼굴을 데이고, 태아(太阿)의 보검과도 같아서 머뭇거리면 목숨을 잃게 된다. 이는 오직 투철하게 벗어나 완전한 해탈을 얻은 자만이 이럴 수 있다. 혹 근본에 혼미하여 언구에 막혔다면 이같은 말을 지어내려 해도 결코 할 수 없을 것이다.
“(제자를 위해) 거량을 하다가 깎아 내림을 당했다”는 것은 한 손님〔賓〕과 한 주인〔主〕이 일문일답을 하면서 문답하는 곳에서 깎아내림〔貶剝〕을 당했으므로, 이를 “거량을 하다가 깎아내림을 당했다”고 말한 것이다. 설두스님은 이 일을 깊이 알았기에 두 구절로 송을 끝낸 셈이다.
이 뒤로부터는 자비로 수준을 낮추어 그대를 위하여 설명해준 것이다. “어미와 새끼가 서로 모르는데 어느 누가 줄탁의 기연을 함께 할 수 있을까”라는 말은, 어미가 쪼아준다 해도 새끼가 쪼지 못하고, 새끼가 쫀다 해도 어미가 쪼아주지 못하니, 각각 서로를 모르는 상태에서는 줄탁을 하더라도 동시에 줄탁을 할 주체가 어디에 있겠는가라는 것이다. 만일 이렇게 이해한다면 설두스님의 마지막 말씀을 뛰어넘으려 해도 벗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듣지 못했는가, 향엄(香嚴)스님의 말을. 즉, “새끼가 쪼고 어미가 쪼아대니 새끼는 껍질이 없다고 느낀다. 새끼와 어미가 모두 껍질이 없다고 여겨 기연에 감응함이 어긋나지 않는다. 같은 길을 가는 사람끼리 노래부르지만 현묘한 길은 홀로 걷는다.”
설두스님은 자비로 몹시 수준을 낮추어 언어문자를 써서 이르기를 “쪼았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경청스님이 대답한 “살아날 수 있겠느냐?”라는 구절을 노래한 것이다.
“알아차렸다!”라고 한 것은 이 스님이 “살아나지 못한다면 사람에게 비웃음을 받을 것이다”고 말한 것을 노래한 것이다. 무엇 때문에 설두스님은 “아직도 껍데기 속에 있다”고 말했을까? 설두스님이 돌 부딪치는 불빛 속에서 흑백을 구별하고 번개치는 기틀 속에서 실마리를 분별한 것이다.
경청스님은 또한 “형편없는 놈”이라고 말했는데, 설두스님은 “거듭 얻어맞았다”고 했으니 이렇게 힐난한 것은 조금은 옳다고 하겠다.
경청스님은 또한 “형편없는 놈”이라 했는데, 경청스님은 사람의 눈동자를 바꾸어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 불러도 되겠느냐? 이 구절이 “아직도 껍데기 속에 있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이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도대체 뭐가 같단 말인가? 만약 알아차릴 수 있다면 천하를 두루 돌아 행각하면서 은혜에 보답할 자격이 있으리라. 산승이 이처럼 말한 것 또한 “형편없는 놈”에 해당한다.
“천하의 납승은 부질없이 겉모습만 더듬는다”고 하였는데, 어느 누가 겉모습을 더듬는 놈이 아니겠는가? 여기에 이르러서는 설두스님은 더더욱 천하 납승들에게 누를 끼쳤다.
말해보라, 경청스님의 어느 점이 이 스님을 제접했던 곳인가? 천하의 납승들이 뛰어본들 벗어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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