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칙1) 충국사의 이음새 없는 탑〔忠國無縫〕
(본칙)
숙종(肅宗 : 이는 본래 代宗인데 잘못된 것이다)황제가 혜충국사(?~775)에게 물었다.
“스님께서 돌아가신 후 필요한 물건은 무엇입니까?”
-미리 긁고 나서 가렵기를 기다린다. 흉내 내고 자빠졌네. 점잖은 늙은이가 이러한 행동거지를 하다니……. 동쪽을 서쪽이라 해서는 안 된다.
국사는 말하였다.
“노승에게 무봉탑(無縫塔)을 만들어 주십시오.”
-붙들어둘 수 없군.
“스님께서는 탑의 모양을 말씀해 주십시오.”
-한 번 잘 내질렀다.
국사가 한참 동안 말없이 있다가
“알았습니까?”라고 하니,
-감옥에 갇혀 있더니 알음알이만 키우는군. 곧 동쪽을 서쪽이라 하고 남쪽을 북쪽이라 하는군. 턱이 떨어져 아무 말도 못 하고야 말았네.
황제는 말하였다.
“모르겠습니다.”
-다행히도 몰랐구나. 당시에 다시 한 번 내질러 입이 쩍 얼어붙어 찍소리 못하게 했더라면 조금은 나았을걸…….
“저에게는 법을 부촉한 제자 탐원(耽源)이 있었는데 이 일을 알고 있습니다. 조서를 내려 그에게 묻도록 하십시오.”
-다행히도 선상을 뒤엎어버리지 않았구나. 왜 그에게 본분소식을 길러주는 먹이를 주지 않았을까? 사람을 속이지 말아라! 한 수 물려준다.
국사가 입적한 뒤
-안타깝다. 과연 저울 눈금을 잘못 읽었구나.
황제는 조서를 내려 탐원에게 물었다.
“이 뜻이 무엇입니까?”
-그 애비에 그 아들이다. (제일의제가 아닌) 제이․제삼에 떨어지리라.
“상주(湘州)의 남쪽, 담주(潭州)의 북쪽입니다.”
-붙들려 해도 안 된다. 둘둘 셋셋 짝지어 무엇 하려는고? 이쪽도 아니고 저지권도 아니구나.
설두스님은 착어하였다.
“한 손바닥으로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
-한 봉사가 여러 봉사를 이끄는군. 예상했던 대로 말을 따라 알음알이를 내는구나. 삿되고 악한 것을 좇아서 무엇 하려고.
거기에는 황금이 있어 온 나라에 가득하구나.”
-위는 하늘 아래는 땅, 어디에도 이러한 소식은 없다. 이는 어느 누구의 경지에 해당하는 일일까?
설두스님은 착어하였다.
“산처럼 생긴 (쓸모없는) 주장자로다.
-꺾어버렸다. 남의 흉내를 내는군.
그림자 없는 나무 아래에는 함께 타는 배가 떴다.”
-조사가 죽었구려. 스님은 무슨 말을 하는가?
설두스님은 착어하였다.
“바다는 잠잠하고 강은 맑도다.
-큰 파도가 저 멀리 아득하고 흰 물결은 하늘까지 넘실거린다. 그래도 조금 멀었다.
유리전(瑠璃殿 : 서방 정토의 궁전)위에는 아는 이 없구나.“
-쯧쯧!
설두스님은 착어하였다.
“이것으로 내 말은 끝이다.”
-도적이 떠난 뒤에 활을 당겼군. 아직도 말소리가 귓전에 맴돈다.
(평창)
숙종․대종은 모두가 현종(玄宗 : 685~762)의 자손인데 태자로 있을 때 항상 참선하기를 좋아하였다. 나라에 큰 도적(안녹산)의 난리로 현종이 서촉 땅으로 피난하였다. 당(唐)나라의 원도읍 장안(長安)은 안록산에게 점령 당하여 그후에 다시 낙양(洛陽)으로 도읍을 정하고, 숙종이 섭정(攝政)을 했다.
이때에 충국사는 등주(鄧州) 백애산(白崖山) 암자에 주석하였는데, 지금의 향엄도량(香嚴道埸)이 바로 그곳이다. 40년간 산에서 내려오지 않았으며, 그의 도행(道行)은 서울까지 명성이 자자하였다. 임금은 상원(上元) 2년에 중사(中使)에게 칙명을 내려 내전(內殿)에 입시(入侍)케 하고, 스승으로 모셔 매우 존경하였다.
일찍이 황제에게 위 없는 도〔無上道〕를 연설하였으며, 스님이 조정에서 물러날 때 황제가 몸소 수레에 올라 전송을 하자, 조정의 신하 모두는 노여운 기색을 띠면서 그 옳지 못함을 아뢰었다. 그러나 국사는 타심통(他心通)을 갖추고 있었으므로 먼저 황제를 배알하고 말하였다. “제가 제석천(帝釋天) 곁에 있으면서 내려다보니 좁쌀 뿌린 듯이 천자가 많은데, 그 흥망이 마치 번갯빛이 번뜩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자 황제는 더욱 정중히 공경하였다. 대종이 즉위하자 다시 광택사(光宅寺)로 맞이하니, 16년간 주석하면서 근기에 따라 설법하다가, 대력(大歷) 10년에 입적하였다.
산남부(山南府)의 청좌산(靑銼山)스님은 지난날 충국사와 함께 수행했었다. 국사는 일찍이 황제에게 아뢰어, 그에게 조서를 내리도록 하여 세 차례 불렀으나 그는 오지 않고 항상 국사에게 “명예를 탐하고 이(利)를 좋아하며 속세에 연연한다”고 꾸짖었다.
국사는 그들 부자의 세 조정에서 국사가 되었으며, 그들 부자가 한결같이 모두 참선하였다. 「전등록(傳燈錄)」에 의거하여 고증해보면 본칙은 대종이 질문한 것이며, 국사에게 “무엇이 십신조어사(十身調御士)입니까?”라고 물은 것은 숙종의 질문이었다.
국사가 세상 인연을 마치고 열반에 들면서 대종을 하직하자, 대종이 “국사께서 돌아가신 뒤에 필요한 물건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니, 이는 으레 있는 상투적인 물음인데, 이 늙은이는 바람이 없는데 풍파를 일으키면서 “노승에게 무봉탑을 만들어주십시오”라고 말했다. 말해보라, 백일청천에 이처럼 하여 무엇하겠는가? 그리고 탑을 만들면 그만이지 무엇 때문에 “무봉탑을 만들어 달라”고 말했을까? 대종 또한 참으로 작가 선지식이다. 그에게 한 번 내질러 말하기를, “스님께서 탑의 모양을 말씀해주시오”하자, 국사는 한참 동안 말없이 있다가 “아시겠습니까?”고 말하니, 꽤나 기괴하다 하겠다. 이것이 가장 참구하기 어려운 것이다. 국사는 볼 만하게 그에게 한 번 내질리더니 턱이 떨어진 듯이 아무 소리 못 하고 말았다. 비록 그렇다지만 이 늙은이가 아니었다면 하마터면 놀림당할 뻔했다. 사람들이 “국사가 말하지 않은 것이 바로 탑의 모양이다”고 말들을 하나, 이처럼 이해한다면 달마의 종지는 싹 쓸려 깡그리 사라져버린 것이다. 만일 한참 동안 말없는 것이 탑의 모양이라 말한다면 벙어리라야 마땅히 선(禪)을 할 줄 알 것이다.
왜 듣지 못했느냐? 외도가 부처님께 묻기를 “말이 있는 것도 묻지 않고, 말이 없는 것도 묻질 않겠습니다”하자, 세존께서는 한참 동안 말없이 계셨다. 그러자 외도는 예배하고 찬탄하였다. “세존이시어. 대자대비로 저의 미혹의 구름을 열어주시어, 저로 하여금 도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외도가 떠난 뒤에 아난(阿難)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외도가 무엇을 깨쳤기에 ‘들어가게 하셨다’고 말했습니까?”
“세상의 훌륭한 말이 채찍의 그림자만 보고서도 달리는 것과 같다.”
많은 사람들은 말없이 한참 동안 앉아 있는 곳에서 이해하려고 한다. 이는 무슨 근거가 있겠는가? 오조선사(五祖先師)께서는 이를 염(拈)하였다.
“앞면은 진주마노(珍珠瑪瑙), 뒷면은 마노진주(瑪瑙珍珠), 동쪽은 관음(觀音)․세지(勢至) 보살이오, 서쪽은 문수․보현보살이다. 그 중간에 하나의 깃발이 바람에 휘날리어 펄럭펄럭 거린다.”
국사가 “알았습니까?”고 하자, 황제는 “모르겠습니다”고 하였는데, 그래도 조금 나은 편이다.
말해보라, 여기에서 “모르겠습니다”고 한 것과 무제(武帝)가 “모르겠습니다”고 대답한 것이 같은지, 다른지를? 비록 비슷하기는 하나 같지는 않다.
국사가 “저에게는 법을 부촉한 제자 탐원이 있는데 이 일을 알고 있으니 조서를 내려 그에게 묻도록 하십시오”라고 한 데 대해, 설두스님은 염송하기를 “한 손바닥으로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라 했다.
대중이 “모른다”고 했던 것은 그만두더라도 탐원은 알았을까? 다만 그저 “스님께서는 탑의 모양을 말씀해 주십시오”라는 말을 했을 뿐이다. 온 누리 사람들은 어찌할 수가 없다.
오조 법연스님께서 염하였다.
“그대는 한 나라의 국사인데 무엇 때문에 말해주지 않고 제자에게 떠미루었는가?”
국사가 입적한 뒤 황제는 탐원에게 조서를 내려 “그 뜻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탐원이 (혜충)국사의 입장이 되어 어설픈 중국어로 이러쿵저러쿵 떠벌렸다. 그러나 (설두스님은) 자연스럽게 국사의 말씀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만 한 송〔祖庭事苑出齊時〕으로
상주의 남쪽 담주의 북쪽,
그 가운데 황금이 있어 온 나라에 가득하구나.
그림자 없는 나무 밑에는 ‘함께 타는 배’가 떴고
유리전 위에는 아는 사람 없다.
라고 하였다.
탐원스님의 이름은 응진(應眞)이며, 국사의 처소에서 시자(侍者)를 하였으며, 그후 길주(吉州) 탐원사(耽源寺)에 주석하였다. 그때 앙산(仰山)스님이 찾아와 탐원스님을 참방하였는데, 탐원스님은 입이 무겁고 성품이 사나워 범접하지 못했다. 앙산스님은 앞서 성공(性空)선사를 참방하였는데, 어떤 스님이 성공에게 물었다.
“무엇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천 길이나 깊은 우물 속에 사람이 빠져 있는데 한 치의 새끼줄도 사용하지 않고서 그 사람을 건져낼 수 있다면 그대에게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을 답하여주리라.”
“요즈음 호남지방의 창화상(暢和尙)께서도 학인을 제접한다고 이런 말 저런 말을 하더군요.”
이에 성공이 사미(沙彌 : 당시 앙산이 있었다)를 불러
“이 죽은 시체를 끌어내거라!”고 하였다.
앙산스님이 그 뒤 이를 거량하여 탐원스님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여야 우물 속에 빠진 사람을 나오게 할 수 있습니까?”
“쯧쯧! 어리석은 놈아, 누가 우물 속에 있느냐?”
앙산스님은 그래도 깨닫지 못하고, 그후 위산스님에게 물었더니, 위산스님이 “혜적(慧寂)아”하고 부르자, 앙산스님이 “네!”하고 대답을 하니,
위산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이미 (우물 속에서)나왔다.”
앙산스님이 이로 말미암아 크게 깨치고 말하였다.
“나는 탐원스님의 처소에서 본체〔體〕를 얻었고, 위산스님의 처소에서 작용〔用〕을 얻었다.”
이 하나의 송에 대한 그릇된 이해가 적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잘못 알고서 “상주(湘州)는 상견(相見)이며 담주(潭州)는 담론(譚論)이고, 그 중간에 무봉탑이 있다. 그래서 ‘거기에 황금이 있어 온 나라에 가득하다’고 말했다. 황제와 국사가 서로 대답한 것이 바로 ‘그림자 없는 나무 밑에는 함께 타는 배가 떴고’인데 황제가 이를 알지 못하므로 마침내 이르기를 ‘유리전 위에 아는 사람없다’고 말하였다”고들 한다. 어떤 사람은 “상(湘)은 상주(湘州)의 남쪽, 담(潭)은 담주(潭州)의 북쪽이니, ‘그 중간에 황금이 온 나라에 가득하다’ 한 것은 관가(官家)를 풍자한 것이다”하고서, 눈을 껌벅거리며 뒤돌아보고 “이것이 무봉탑이다”고 말한다. 이런 견해는 정견(情見)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니, 설두스님이 하신 네 차례의 착어를 또한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요즈음 사람들은 옛사람의 뜻을 전혀 모른다고 하겠다.
말해보라, “상주의 남쪽 담주의 북쪽”을 그대는 어떻게 이해할 것이며, “중간에 황금이 있어 온 나라에 가득하다”는 것은 그대는 어떻게 이해할 것이며, “그림자 없는 나무 아래 함께 타는 배가 떴다”는 것은 그대는 어떻게 이해할 것이며, “유리전 위에 아는 사람 없다”는 것 또한 그대는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를 알아차리기만 한다면 참으로 언제나 늘 경쾌하리라.
“상주의 남쪽 담주의 북쪽”에 대해 설두스님은 “한 손바닥만으로는 소리가 울리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이는 부득이하여 그대에게 설명해준 것이다. “그 중간에 황금이 있어 온 나라에 가득하다”는 데 대해 설두스님은 착어하기를 “산처럼 생긴 주장자다”라고 하였다. 옛사람(장경 혜릉스님)이 말하기를 “주장자를 식별할 수 있다면 참학(參學)을 끝마친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림자 없는 나무 아래 함께 타는 배가 떴다”에 대해 설두스님은 “바다가 잠잠하고 강물은 맑다”고 하니, 이는 일시에 활짝 문을 열어 놓아 팔방이 영롱하다 하겠다. “유리전 위에 아는 사람 없다”는데 대해 설두스님은 “내 할 말은 모두 다했다”고 하였는데, 이는 단박에 모두 그대에게 말해버린 것이다. 참으로 알아차리기 어렵지만 알아차려야만 한다. 그저 눈꼽만큼이라도 잘못 알면 말을 따라서 알음알이를 낼뿐이다.
맨 끝에 이르러서 “내 할 말은 모두 다했다”고 말하였으니, 그래도 조금 멀었다. 설두스님은 분명히 단박에 말해버리고, 뒤에서는 무봉탑에 대해서만 송했을 것이다.
(송)
무봉탑(無縫塔 : 솔기없는 탑)은
-솔기가 이렇게 많은데 무슨 소리냐!
보기 어렵다.
-육안으로 보지 못한다. 눈멀었구나.
맑은 연못엔 푸른 용이 살지 못한다.
-보았느냐? 큰 파도가 아득하고 아득한데 푸른 용이 어느 곳에 살겠느냐?
여기에서는 찾더라도 찾을 수 없다.
충충이 우뚝하고
-헛것을 보지 말라. 헛것을 보아 무엇할려고!
광채는 둥글둥글.
-온 몸이 눈이로다. (광채가) 여기 번쩍 저기 번쩍. 삼삼오오 짝을 지어 옛 길을 가며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뒤따라오는구나.
천고 만고에 (우리들을 위해) 보여주는구나.
-보았느냐? 눈먼 놈이 어찌 보리요? (설두)스님은 보셨나요?
(평창)
설두스님이 첫머리에서 “무봉탑은 보기 어렵다”고 하니, 비록 사심 없이 오롯이 드러내 보였으나 볼려고 하면 도리어 어렵다. 설두스님은 자비가 각별하여, 다시 그대에게 말하기를 “맑은 연못에는 푸른 용이 살수가 없다”고 하였다. 은사이신 오조스님께서는 “나는 설두스님이 송고(頌古)하신 이 한 권 중에서 ‘맑은 연못에는 푸른 용이 살 수가 없다’는 한 구절이 가장 마음에 든다”고 하니, 그래도 조금은 나은 편이다.
많은 사람들은 국사가 한참 동안 말없이 있었던 곳에서 살림살이를 하는데 이처럼 이해한다면 모두 잘못된 것이다.
듣지 못하였느냐? “와룡(臥龍)은 고인 물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와룡이 없는 곳엔 달빛 어린 파도가 맑고, 있는 곳엔 바람이 불지 않아도 물결이 안다”는 말을. 또한 “와룡은 푸른 연못이 맑아질까 미리 두려워한다”하기도 하였다. 만일 이러한 놈이라면 설령 큰 파도가 아득하고 아득하여 흰 물결이 하늘까지 넘실거린다 해도 그 속에 도사리고 있지 않는다.
설두스님은 이에 이르러 송을 마치고, 맨 끝에서 상당한 안목으로 하나의 무봉탑을 세우더니 바로 뒤이어 말하였다. “충층이 우뚝하고 광채는 둥글둥글. 천고 만고에 사람들에게 보여주는구나”하였는데, 그대는 어떻게 보는가? 바로 지금은 어느 곳에 있을까? 설령 그대가 분명하게 볼 수 있다 해도 또한 연구에 얽매어 그릇치지 말라.
1)제18칙에는 〔수시〕가 없다.
'벽암록(碧巖錄)'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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