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碧巖錄)

제33칙 자복의 일원상〔資福圓相〕

通達無我法者 2008. 3. 3. 09:35
 

 

 

제33칙 자복의 일원상〔資福圓相〕


(수시)

동서를 분별하지 않고 남북을 구분하지 않아, 아침부터 저녁나절까지 저녁부터 아침나절까지 무심하니, 이러면 그가 졸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어느 때는 눈빛이 유성(流星)처럼 빛나기도 하니, 이러면 그가 성성(惺惺)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느 때는 남쪽을 북쪽이라고 하기도 한다. 말해보라. 이는 마음이 있는〔有心〕것일까? 없는〔無心〕것일까? 도인〔道人〕일까, 범인〔凡人〕일까? 여기에서 뛰어넘어야만 비로소 귀착점을 알아, 옛사람은 이러하기도 저러하기도 했음을 알 것이다. 말해보라, 이는 어떠한 상황인가? 본칙을 거량해보리라.


(본칙)

상서(尙書) 진조(陳操)가 자복(資福)스님을 떠보러 갔는데, 자복스님은 그가 오는 것을 보고 일원상(一圓相)을 그렸다.

-정령(精靈) 이 정령을 알고 도적이 도적을 안다. 만약 너그러움이 없었다면 이놈을 어떻게 알았겠는가? 금강권(金剛圈)을 알아차리겠느냐?

진조는 말하였다.

“제자가 이렇게 와서 아직 앉지도 않았는데 일원상을 그리시어 어찌하자는 것입니까?”

-오늘 졸고 있는 놈을 만났다. 이 도적놈아.


자복스님이 곧 방장실의 문을 닫아 버렸다.

-도적도 가난한 집은 털지 않는다. (자복스님은) 벌써 그의 함정에 빠져버렸다.


설두스님은 착어하였다.

“진조는 겨우 한쪽 눈만 갖추었다.”

-설두스님은 정수리에 눈을 가지고 있다. 말해보라. 그의 의도는 어디에 있었는가? 일원상을 주었더라면 좋았을 걸. (설두스님의 착어는) 명쾌하군. 용두사미구나. 당시 한 차례 내질러 진조상서가 나아가려 해도 문이 없고 물러가려 해도 길이 없도록 했어야만 했다. 말해보라. 어떻게 내질러야 할까?


(평창)

상서 진조는 배휴(裵休)ㆍ이고(李翶)와 동시대의 사람이다. 그는 스님을 만나면 먼저 재(齋)를 청하여 삼백 냥을 보시한 후 반드시 그를 시험해보았다. 하루는 운문스님이 와서 만나자마자 물었다.

“유교의 서적〔儒書〕에 대해서는 묻지 않겠습니다. 3승 12분교(三乘十二分敎)의 경우에는 나름대로 좌주(座主 : 강사)가 있는데, 선승들이 행각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상서께서는 지금까지 몇 사람에게 이 질문을 하였습니까?”

“바로 지금 처음으로 상좌에게 묻는 것이다.”

“바로 지금은 그만두고 무엇이 교학의 뜻입니까?”

“누런 종이에다 붉은 축(軸)으로 이루어진 경전이 그것입니다.”

“이는 문자언어일 뿐이니 무엇이 교학에서 주장하는 뜻입니까?”

“입으로 말하고자 해도 말이 사라지고 마음으로 좀 궁리하고자 해도 생각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입으로 말하고자 해도 말을 잃어버린 것은 말이 있다고 전제 했기 때문이며, 마음으로 좀 궁리하고자 하여 생각이 사라져버린 것은 망상을 전제로 했기 때문입이다. 무엇이 교학에서 말하는 뜻입니까?”

진조가 대답하지 못하자 운문스님은 말하였다.

“상서께서「법화경」을 본다고 하던데 그렇습니까?”

“네.”

“경(經)에 이르기를 ‘모든 일상생활에서 하는 일이 모두 실제의 모습〔實相〕과 서로 위배(違背)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말해보시오, 비비상천(非非想天)에 지금 몇 사람이나 자리에서 물러났습니까?”

진조가 또다시 말하지 못하자 운문스님이 말하였다.

“상서께서는 가벼이 그러지 마시오. 스님들이 삼경오론(三經五論)을 팽개치고 총림에 들어와 10년, 20년을 지내도 (깨치지 못하고) 어찌하지 못하는데 상서인들 어찌할 수 있겠습니까?”

진조는 절을 올리고 말하였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또 한번을 여러 관리들과 함께 누각에서 여러 스님들이 오는 것을 멀리서 바라보며 한 관원이 말하였다.

“오는 사람들은 모두 참선하는 스님들인가 봅니다.”

진조는 말하였다.

“그렇지 않다.”

“어떻게 아닌 줄을 아십니까?”

“가까이 다가오면 그대에게 판별해주겠다.”

스님들이 누각 앞에 이르렀을 때 진조는 갑자기 “학인스님들!” 하고 불렀다. 스님들이 머리르 쳐들자 상서는 여러 관원들에게 말하였다.

“이래도 내 말을 믿지 못하겠느냐?”

오로지 운문스님 한 명만은 진조상서가 감파하려 해도 못 했으니, 목주(睦州)스님 밑에서 참선을 하였기 때문이다.

하루는 자복스님을 떠보러 가자 자복스님이 그가 오는 것을 보고 대뜸 일원상을 그려 보였다. 자복스님은 위산스님ㆍ앙산스님 회하의 큰스님이다. 평소 상대가 사는 고장의 경치나 물건〔境致〕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방식으로 사람을 제접하기를 좋아하였다. 진조를 보자마자 일원상을 그려보였지만 진조 또한 작가였으니 어찌할 수 있었겠는가? 그는 속지 않고 스스로 점검하여 말하였다. “제자가 이렇게 아직 앉지도 않았는데, 일원상을 그리시어 어찌하자는 것입니까? 이에 자복스님이 문믈 닫아버렸는데, 이러한 공안을 언어 가운데에서 표적을 분별하고 구절 속에서 기틀을 감춰두었다고 한다.

설두스님은 “진조는 한쪽 눈만을 갖추었을 뿐이다”라고 말하였다. 설두스님이야말로 정수리〔頂門〕에 일척안을 갖춘 분이다. 말해보라, 이 뜻이 어디에 있는가? 이 일원상을 주었어야만 했다. 모두 이와 같이 한다면 납승들이 어떻게 사람을 지도할까? 나는 그대들에게 묻노니, 당시에 그대가 진조였다면 무슨 말을 했어야 설두스님에게 “그대는 한쪽 눈밖에 갖추지 못했다” 라는 말을 듣지 않을 수 있을까? 때문에 설두스님은 이를 뒤집어 송을 하였다.


(송)

둥그런 진주 구르고 옥구슬은 돌돌돌.

-석 자의 주장자로 황하를 휘젓는구나. 모름지기 푸른 눈을 가진 달마여야 할 수 있다. 무쇠로 주조했군.


말에 싣고 나귀에 얹어 철선(鐵船)을 타고는

-이 많은 것을 무얼 하려고? 어찌 한량이 있으랴. 나 원오에게도 좀 보여주지.


온 세상의 일없는 나그네에게 나누어주네.

-필요없다는 사람이 있다.1) 일없는 사람이라면 필요로 하지 않는다. 반드시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큰자라를 낚을 때에는 (낚시를 던지지 말고) 올가미를 던져라.

-왔다갔다 하니 어떻게 던질 수가 없네. 두꺼비가 걸려들면 어떻게 할까? 새우나 조개라면 어떻게 할까? 반드시 자라를 낚아야만 할 것이다.


설두스님은 다시 말하였다.

“천하의 납승이 벗어나지 못하리라.”

-몸이 안에 들어 있다. 한 구덩이에 묻어버려라! (그런 말하는 설두)스님은 빠져나올 수 있겠는가?


(평창)

설두스님은 “둥그런 진주 구르고 옥구슬은 돌돌돌. 말에 싣고 나귀에 얹어 철선을 타고는”이라고 첫머리에 곧바로 송을 하였는데, 이는 일원상을 노래한 것일 뿐이다. 이를 이해할 수 있다면 호랑이에게 뿔이 돋는 것과 같다. ‘이것’은 모름지기 통 밑바닥이 빠지고, 기관(機關 : 덫과 관문)을 다하고, 얻고 잃음과 옳고 그름을 일시에 놓아버려야만 한다. 결코 (이러쿵저러쿵) 도리로 이해하지 않아야 하며, 현묘한 말을 늘어놓아서도 안된다. 그렇다면 결국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 이는 말에 싣고 나귀에 얹어 철선에 올라, 거기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다른 곳에서 이를 나누어주어서는 안되니, 모름지기 온 세상의 일없는 나그네에게 나누어주어야 한다. 그대들의 뱃속에 조그마한 일삼음이라도 있다면 알려고 해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반드시 유사(有事)ㆍ무사(無事)와 위정(違情)ㆍ순경(順境)과 부처와 조사마저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사람이어야 이를 알수 있다. 참구할 만한 선(禪)이 있다거나, 범부ㆍ성인을 헤아리는 생각이 있으면 이를 알려고 해도 알 수 없다. 이를 이미 알았다면, 그가 말한 “큰 자라를 낚을 때는 올가미를 던져야 한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큰 자라를 낚는 데는 올가미가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풍혈(風穴)스님은,


맑은 바다에서 고래 낚는 데는 익숙하더니만

아차, 개구리 걸음으로 진흙벌 속에 허우적거리는구나.


하였으며, 또다시 한 구절을 읊었다.

큰 자라여, 삼신산을 짊어지고 가지 마오.

내 봉래산 정상을 가려 하니……..


설두스님은 다시 말하기를 “천하의 납승들이 벗어나지 못하리라”고 하였다. 만일 큰 자라라면 납승의 견해를 짓지 않을 것이며, 납승이라면 큰 자라의 견해는 짓지 않을 것이다.

 1)유인불안(有人不安) : 당본(唐本)에는 ‘안(安)’자가 ‘요(要)’자로 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요(要)’로 번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