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碧巖錄)

제35칙 앞도 삼삼 뒤도 삼삼〔前三三後三三〕

通達無我法者 2008. 3. 3. 09:40
 

 

 

제35칙 앞도 삼삼 뒤도 삼삼〔前三三後三三〕


(수시)

용과 뱀을 구별하고 옥과 돌을 가리며, 흰 것과 검은 것을 구별하고 의심을 결단하는 데에, 만일 이마 위에 일척안이 없거나 팔꿈치 아래 호신부(護身符)가 없으면 언제나 첫머리부터 빗나가 버린다. 그저 지금 보고 듣는 것에 어둡지 않고, 성색(聲色)에 순수하며 참다우니, 말해보라, 이는 검은 것인지 흰 것인지, 굽은 것인지 곧은 것인지를. 여기에 이르러서는 어떻게 결판을 내야 할까?


(본칙)

문수가 무착(無著)에게 물었다.

“요즈음 어디에 있다 왔느냐?”

-묻지 않을 수 없구나. 이러한 소식도 있었구나.


“남방에서 왔습니다.”

-번뇌의 굴속에서 나왔구나. 하필이면 눈썹 위에서 짐을 올려놓느냐. 허공은 원래 방위가 없는데    어떻게 남방이 있겠느냐.


“남방에서는 불법을 어떻게 수행하느냐?”

-다른 사람에게 물었다면 큰일 날 뻔했다. 이런 말을 입에 담다니…….


“말법시대의 비구가 계율을 조금 받드는 정도입니다.”

-알찬 사람이란 얻기 어렵다.


“대중이 얼마나 되는가?”

-당시에 한 번 소리지르고 내질러 거꾸러뜨려야 했다.


“삼백 명 또는 오백 명 정도입니다.”

-모조리 여우의 정령들이다. 과연 잘못을 저질렀군.


무착이 도리어 문수에게 물었다.

“여기에서는 어떻게 수행하는지요?”

-내질렀다. 창끝을 돌려대는구나.


“범부와 성인이 함께 있고 용과 뱀이 뒤섞여 있다.”

-완전히 졌다. 정신없이 허우적거린다.


“대중이 얼마나 되는지요?”

-나에게 화두를 돌려다오. 그래도 용서해줄 수는 없지.“


“앞도 삼삼〔前三三〕, 뒤도 삼삼〔後三三〕이지.”

-이랬다 저랬다 하는군. 말해보라, 얼마나 될까? (너무 많아) 천수대비(千手大悲)로서도 셈할 수 없다.


(평창)

무착이 오대산을 유람하는 도중 황량하고 외딴 곳에 이르렀다. 문수는 하나의 절을 화현(化現)시켜 그를 맞이하여 자고 가도록 했다. 그리고서는 이렇게 물었다.

“요즈음 어디에 있다 왔느냐?”

“남방에서 왔습니다.”

“남방에서는 불법을 어떻게 수행하더냐?”

“말법시대의 비구가 계율을 조금 받드는 정도입니다.”

“대중은 얼마나 되는가?”

“삼백 명 또는 오백 명 정도입니다.”

무착이 도리어 문수에게 물었다.

“여기에서는 불법을 어떻게 수행하는지요?”

“범부와 성인이 함께 있고 용과 뱀이 뒤섞여 있다.”

“대중이 얼마나 됩니까?”

“앞도 삼삼, 뒤도 삼삼이지.”

(그 뒤) 차를 마신 후 문수는 파리(玻璃) 찻잔을 들고서 말하였다.

“남방에서도 이런 물건이 있느냐?”

“없습니다.”

“평소 무엇으로 차를 마시느냐?”

무착이 아무 말도 못했다. 그리고는 하직하고 떠나려 했다. 문수는 균제동자(均提童子)에게 문 밖까지 전송해주도록 하였다. 무착은 동자에게 물었다.

“조금 전에 ‘앞도 삼삼, 뒤도 삼삼’이라고 말하였는데, 얼마나 되는가?”

“대덕이여.”

무착이 대답을 하자, 동자는 말하였다.

“‘이것’은 얼마나 됩니까?”

무착은 또 물었다.

“여기가 무슨 절인가?”

동자가 금강력사(金剛力士)의 뒤를 가르켰다. 무착이 머리를 돌리는 찰나에 동자와 화현으로 나타난 절까지 하나도 보이지 않고 오로지 텅 빈 산골짜기만 있을 뿐이었다. 그곳을 후세에 금강굴(金剛窟)이라고 불렀다.

그후 어떤 스님이 풍혈(風穴)스님에게 물었다.

“누가 청량산(淸凉山 : 오대산의 別稱)의 진짜 주인1)입니까?”

“무착의 질문에 한마디도 대답 못 하고, 지금껏 노숙(露宿)하며 떠도는 스님이다.”

투철히 참구하여 무심하게 실제의 경지를 밟고자 한다면 무착의 언구(言句)에서 알아야 한다. 그러면 자연히 확탕(鑊湯)․노탄(爐炭)의 지옥에서도 뜨겁지 않고, 차가운 얼음 위에서도 추위를 느끼지 않는다. 만일 투철히 참구해 홀로 높이 금강왕 보검(金剛王寶劍)처럼 준엄하려면 문수의 말에서 알아야 한다. 그러면 자연히 물로 떠내려 보내지도 못하고 바람으로 날려보내지도 못한다.

듣지 못하였느냐? 장주(漳州)의 지장(地藏)이 어떤 스님에게 물은 말을.

“요즈음 어디에 있다 왔느냐?”

“남방에서 왔습니다.”

“그곳의 불법은 어떠한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내가 여기에서 밭에 씨앗을 뿌리며 주먹밥을 먹는 것만 하겠느냐?”

말해보라, 이는 문수가 대답했던 곳과 같을까, 다를까? 어떤 사람은 “무착의 대답은 옳지 않고, 문수의 대답에는 용도 있고 뱀도 있으며, 범부도 있고 성인도 있다”고 하나, 이와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또한 “앞도 삼삼, 뒤도 삼삼”을 분명하게 알 수 있겠는가? 앞에 쏜 화살은 그래도 가벼운 편인데, 뒤에 쏜 화살은 깊숙히 박혔다.

말해보라, 얼마나 많은 것인가?

여기에서 깨칠 수 있다면 천 구절, 만 구절이 다만 한 구절일 뿐이다. 이 한 구절 속에서 끊어버리고 잡아둘 수 있다면, 잠깐 사이에 이러한 경계에 이를 것이다.


(송)

일천 봉우리 굽이굽이 쪽빛처럼 푸르른데

-문수를 보았느냐?


문수와 이야기하였다고 그 누가 말할 수 있으리요.

-설령 보현보살이라도 보지 못한다. 빗나갔군.


우습구나, 청량산에는 대중이 얼마나 되느냐고?

-말해보라. 무엇이 우스운가? 이미 말 이전에 있었는걸.


앞도 삼삼, 뒤도 삼삼이로다.

-모쪼록 발 아래를 살피도록 하라. 물렁물렁한 진흙 속에 가시가 있다. 떨어진 건 주발인데 접시가 조각조각 부서졌구나.


(평창)

“일천 봉우리 굽이굽이 쪽빛처럼 푸르른데, 문수와 이야기하였다고 그 누가 말할 수 있으리요”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 어떤 사람은 “이는 설두스님이 거듭해서 염(拈)한 것일 뿐, 송을 한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는 어떤 스님이 법안(法眼)스님에게 물은 경우와 같다.

“무엇이 조계(曹溪) 근원의 한 방울 물입니까?”

“이것이 조계 근원의 한 방울 물이니라.”

또 어떤 스님〔子璿〕이 낭야 각(瑯琊覺)스님에게 물었다.

“본래가 깨끗하거늘 어찌하여 홀연히 산하대지가 생깁니까?”

“본래가 깨끗하거늘 어찌하여 홀연히 산하대지가 생기는가?”

이것들은 결코 그저 거듭해서 염(拈)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애꾸눈 명초 덕겸(明招德謙)스님도 그 뜻에 대해서 노래하였는데, 하늘과 땅을 덮는 기봉이 있었다.

사바세계 두루두루 훌륭한 가람

어디를 보아도 문수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곳이네

그 말에서 부처의 눈을 열 줄 모르고

돌아서서 그저 푸른 산 바위만 바라보네.


“사바세계 두루두루 훌륭한 가람”이란 잡초더미를 절로 화현 시킨 것을 가르킨 것이다. 이는 이른바 권(權)․실(實)을 모두 행하는 기용(機用)이 있다 하겠다.

“어디를 보아도 문수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곳이네. 그 말에서 부처의 눈을 열 줄 모르고, 돌아서서 그저 푸른 산 바위만 바라보네”라고 하였는데, 바로 이럴 경우 문수․보현․관음의 경계라 말할 수 있을까? 그래도 결국 말로만 이러니 저러니 한 것은 아니다. 설두스님은 명초(明招)스님의 것을 고쳐 쓰되 면밀한 점이 있다.

“일천 봉우리 굽이굽이 쪽빛처럼 푸르른데”라고 하였는데, 결코 칼 끝에 손을 다치지 않고, 구절 속에 방편과 실상이 함께 있으며, 이(理)와 사(事)가 있었다 하겠다.

“문수와 이야기하였다고 그 누가 말할 수 있으리요.”라고 하였는데, 하루 밤새껏 이야기하고서도 문수를 몰랐었다. 그후 무착이 오대산에 전좌(典座)로 있었는데, 문수는 늘 죽 끓이는 솥 위에 나타났다가, 무착이 휘두르는 죽을 젓는 주걱에 항상 맞곤 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도적이 떠난 뒤에 활을 당긴 꼴이다. 당시 그가 “남방에서는 불법을 어떻게 수행하느냐”고 말했을 때 바로 등줄기를 한 방망이 갈겼어야 그래도 조금은 괜찮은 편이었을텐데.

“우습구나, 청량산에는 대중이 얼마나 되느냐고?”했는데, 설두스님의 비웃음 속에는 칼이 있다. 이 웃음을 안다면 그가 말한 “앞도 삼삼, 뒤도 삼삼”이라는 뜻을 바로 알게 될 것이다.

 1)청량산정주(淸凉山正主) : 당본(唐本)에는 청량산중주(淸凉山中主)라고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