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칙 남전의 뜰에 핀 꽃〔南泉庭化〕
(수시)
쉬고 또 쉬어버리니 무쇠나무〔鐵樹〕에 꽃이 핀다. (그런 사람이) 있느냐, 있느냐? 총명한 녀석이라도 벌써 손해를 본다. 설사 종횡무진 자재하여도 그는 콧구멍(급소)이 뚫릴 것이다. 말해보라, 까다로운 곳이 어디에 있는가를. 거량해보리라.
(본칙)
육긍대부(陸亘大夫)가 남전(南泉)스님과 대화를 하는 즈음, 육긍대부가 말하였다.
“조법사(肇法師)는 ‘천지는 나와 한 뿌리며, 만물은 나와 한 몸이라’고 하였는데, 매우 이해하기 어렵군요.”
-귀신의 굴 속에서 살림살이를 하는군. 그림의 떡으로 주린 배를 채우지 못한다. 이는 (번뇌의) 풀 속에서 헤아림이로다.
남전스님이 뜨락에 핀 꽃을 가리키며
-무슨 말을 하는가? 쯧쯧, 경전에는 경전의 스승이 있고, 논(論)․서(書)에는 논을 잘하는 스승이 있으니, 산승의 일과는 상관이 없다. 쯧쯧! 대장부가 대뜸 일전어(一轉語 : 상황을 뒤집어놓는 한마디)를 했더라면 남전스님을 절단냈을 뿐 아니라, 천하의 납승들까지 기운이 빠졌을 것이다.
대부를 부르더니, “요즘 사람들은 이 한 포기의 꽃을 마치 꿈결에 보는 것과 같이 하느니라”라고 했다.
-원앙 지수는 보여주되, 금바늘은 사람에게 주지 말라. 잠꼬대하지 말라. 노란 꾀꼬리가 (꽃의 아름다움에 끌려) 버들가지에 내렸다.
(평창)
육긍대부는 남전스님을 오래 참례하였다. 평소 이치의 세계에 마음을 두고 깊이 「조론(肇論)」을 연구하였다. 하루는 앉아 있다가 이 두 구절이 의심스러워 물은 것이다.
“조법사(肇法師)의 말에 ‘천지는 나와 한 뿌리며 만물은 나와 한 몸이라’고 하였는데 매우 이해하기 어렵군요.”
조법사는 후진(後晋) 시대의 고승으로서 도생(道生)․도융(道融)․도예(道叡) 스님과 함께 구마라집(鳩摩羅什) 문하의 사철(四哲)로 일컬어진다.
어린 시절엔 「장자」와 「노자」를 탐독하고 그 뒤 고본(古本) 「유마경(維摩經」을 베껴쓰다가 깨친 바 있어 「장자」와 「노자」에는 참된 진리가 없음을 알고, 여러 경전을 종합하여 네 편의 논문을 저술하였다.
「장자」․ 「노자」에서는 천지란 큰 형체를 갖고, 나의 형체도 또한 그와 같아, 모두 허무(虛無)의 한가운데서 태어났다고 한다. 「장자」의 대의는 만물이란 본질적으로 똑같다〔齊物〕는 것을 논했을 뿐이지만, 조공(肇公)의 대의는 만물의 자성이란 모두가 자기에게로 귀결된다는 점을 논하였다.
듣지 못하였느냐? 「반야무명론」에서는 “지극한 사람「至人」은 텅텅 비어 형상이 없어서 만물이란 나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 없다. 만물을 모두 모아 자기로 삼는 자가 어찌 성인뿐이겠는가?”라고 하였다. 신(神)․사람․현인․성인이 각기 다르지만 모두가 같은 성품과 같은 바탕을 지녔다.
옛사람(덕산 연밀스님)의 말에 “온 건곤의 대지가 나 하나에 갖추어져 있을 뿐이다. 추우면 온 천지가 모두 춥고, 무더우면 온 천지가 모두 무더우며, 있으면 온 천지에 널리 있고 없으면 온 천지에 전혀 없으며, 옳으면 천지가 모두 옳고, 그릇되면 온 천지가 모두 그릇된다”고 하였으며, 법안(法眼)스님은 “그는 그가 그이고, 나는 내가 나이다. 동서남북이 모두 옳다고 하건 옳지 않다고 하건, 다만 나만이 옳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천상천하에 나 홀로 존귀할 뿐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석두(石頭)스님은 「조론」을 보다가 “만물을 모두 모아 자기로 삼는다”는 구절에 이르러 크게 깨치고 그 뒤 「참동계(參同契)」를 저술하였는데, 그 또한 이 뜻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의 이같은 물음을 살펴보건대, 말해보라, 무슨 뿌리가 같으며 어느 바탕과 같은가를. 이쯤 되면 기특하다고 할 만하다. 이는 여느 사람들이 하늘은 높고 땅은 두텁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과 같은가?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일이 있었을까? 육긍대부의 이러한 물음은 매우 기특하기는 하지만 교학의 이치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만일 교학의 이치를 지극한 법「極則」이라 한다면, 세존께서는 무엇 때문에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꽃을 들어 보이셨으며, 또한 달마조사는 왜 서쪽에서 왔겠는가?
남전스님은 납승의 급소로 아픈 곳을 끄집어내어 그의 집착을 타파해주었다. 뜨락에 핀 꽃을 가리키며 대부를 부르면서, “요즈음 사람들은 이 한 포기의 꽃을 마치 꿈결처럼 본다”고 하였다. 이는 마치 만 길 벼랑 위에서 사람을 떨어뜨려 목숨을 잃어버리게 하는 것과 같다. 그대들이 아무것도 아닌데서 거꾸러진다면 미륵 부처님이 하생(下生)한다 해도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는 꿈속에서 꿈을 깨려 해도 깨지 못하다가 곁의 사람이 부르는 소리에 깨어나는 것과 같은 일이다.
남전스님의 안목이 바르지 못했다면, 분명 그에게 휘말렸을 것이다. 남전스님의 이러한 말을 살펴보면 매우 이해하기 어렵다. 만약 안목이 살아 움직이는 자가 듣는다면, 으뜸가는 제호(醍醐)의 맛과 같겠지만, 죽은 자가 듣는다면 도리어 독약이 될 것이다.
옛사람의 말에 “만일 사(事)의 측면에서 이해하면 상정(常情)에 떨어지고, 생각〔意根〕으로 헤아리면 끝내 찾을 수 없다”고 하였다. 암두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는 향상인(向上人)의 살림살이이다. 눈 앞에 조금만 내보였는데도 번갯불이 스치는 것과 같다.”
남전스님의 본뜻 또한 이와 똑같다. 호랑이를 사로잡고 용과 뱀을 가려낼 줄 아는 솜씨가 있었다. 여기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스스로가 알아야 한다. 듣지 못하였느냐? 끝없이 초월하는 길 〔向上一路〕은 일천 성인이 전하지 못했는데, 배우는 이들이 애쓰는 꼴은 마치 물 속에 어린 달그림자를 잡으려는 원숭이와 같다는 말을.
설두스님의 송을 살펴보도록 하라.
(송)
듣고 보고 느끼고 아는 것이 따로따로가 아니고,
-삼라만상이란 한 법도 없다. 산산조각이 나버렸구나. 안․이․비․설․신․의가 모두 구멍 없는 철추로다.
산과 물의 경관이 거울 속에 있지 않다.
-나의 여기에 이러한 것은 없다. 긴 것은 긴 대로, 짧은 것은 짧은 대로, 푸른 것은 푸른 대로, 누런 것은 누런대로……. 그대들은 어디에서 볼 것인가?
서리 내린 하늘에 달은 지고 밤은 깊은데
-그대들을 끌고서 (번뇌의) 풀 속으로 들어가버렸군. 온 세계에 감출 수는 없다. 절대 귀신의 굴 속에 머무르려 하지 말라.
누구와 함께 하랴, 맑은 연못에 차갑게 비치는 그림자를.
-(그럴 사람이) 있느냐, 있느냐? 한 침상에서 잠자지 않았다면 이불 밑이 뚫렸음을 어떻게 알까? 근심에 젖은 사람은 근심하는 사람에게 말하지 말라. 근심하는 사람에게 말하면 근심만 더하게 할 뿐이다.
(평창)
남전스님이 잠꼬대를 조금 했더니 설두스님은 큰 잠꼬대하네. 꿈을 꾸긴 했지만 좋은 꿈이었구나. 앞에서는 모두가 같다고 하더니만 여기에서는 같지 않다고 말하네. “듣고 보고 느끼고 아는 것이 따로따로가 아니며, 산과 물의 경관이 거울 속에 있지 않다”고 하였다. 만일 거울 속에 있는 산하를 구경한 뒤에야 깨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거울이라는 것을 여의치 못한 것이다. 산하대지와 초목총림을 거울로써 비춰보지 말라. 거울로써 비춰보면 바로 두 개가 되는 것이다. 오로지 산은 산, 물은 물로서, 모든 법이 법의 제자리에 안주하고, 세간의 모습이 항상 그대로 있을 뿐이다.
“산하의 경관이 거울 속에 있지 않다”고 하였는데, 말해보라, 무엇으로 비춰봐야 할까? 알겠느냐? 이렇게 되자 “서리 내린 하늘에 달은 지고 밤은 깊은 데”로 향하였다. 여기서는 그대와 함께 하였지만, ‘저쪽’은 그대 스스로가 헤아려야 한다. 설두스님이 본분의 일〔本分事〕로써 사람을 지도하였음을 알겠느냐?
“누구와 함께 하랴, 맑은 연못에 차갑게 비치는 그림자를”하였는데 이는 스스로 비춰봄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과 함께 비춰 봄인가? 모름지기 움직이는 마음〔機心〕과 알음알이〔知解〕를 끊은 뒤에야 이러한 경계에 이를 수 있다. 이제는 맑은 연못도 필요치 않으며, 서리 내린 하늘에 달이 지기를 기다릴 필요도 없다. 지금은 어떤 경지일까?
불과원오선사벽암록 권제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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