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의 깨달음이 아니다
15-11-39 淸涼華嚴疏 曰.1) 經云 了知境界 如幻如夢 如影如響 亦如變化. 若諸菩薩 能與如是觀行相應 於諸法中 不生二解 一切佛法疾得現前 初發心時 卽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知一切法卽心自性 成就慧身 不由他悟者 夫初心爲始 正覺爲終 何以初心便成正覺. 故云 知一切法 卽心自性故 覺法自性 卽名爲佛故. 經頌云 佛心豈有他 正覺覺世間 斯良證也.
청량 스님의 ꡔ화엄경소ꡕ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말하였다.
ꡔ화엄경ꡕ에서 “모든 경계가 허깨비와 같고 꿈과 같으며, 그림자와 같고 메아리와 같으며, 또한 변화하는 것과 같다고 환하게 알아야 한다. 만약 이와 같이 모든 보살이 관(觀)하는 수행에 상응할 수 있다면 모든 법 가운데 차별하는 견해를 내지 않아서 일체 모든 부처님의 법이 빠르게 눈 앞에 나타날 것이다. 처음 발심할 때에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 일체 모든 법이 곧 마음의 자성임을 알아 지혜의 몸을 성취하리니, 이 깨달음은 다른 사람의 깨달음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무릇 처음 공부하는 마음을 낸다는 것은 시작이며 바른 깨달음은 끝인데, 어떻게 처음의 마음에서 바로 정각을 이루는 것인가. 그래서 말하기를, 일체 모든 법이 곧 마음의 자성임을 안다고 하며, 모든 법의 자성을 깨친 자체를 이름하여 부처님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의 게송에서 “부처님 마음이 어찌 다른 곳에 있겠는가. 바른 깨달음으로 세간을 깨닫는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좋은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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斯則 發者 是開發之發 非發起之發也. 何謂現前之相. 夫佛智非深 情迷謂遠 情亡智現 則一體非遙. 旣言 知一切法 卽心自性 則知 此心卽一切法性. 今理現自心 卽心之性 已備無邊之德矣. 成就慧身者 上觀法盡也. 正法當興 今諸見亡也. 佛智爰起 覺心則理現 理現則智圓. 若鏡淨明生 非前非後 非新非故 寂照湛然. 不由他悟者 成上慧身 卽無師自然智也.
이러하니 초발심(初發心)에서 말하는 발(發)은 열어 제쳐 드러낸다는 발(發)이지, 시작한다는 발기(發起)의 발(發)이 아니다.
무엇을 눈 앞에 나타나는 모습이라 하는가. 무릇 부처님의 지혜가 깊이 숨어 있는 것이 아닌데도 중생이 알음알이에 미혹하여 멀리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중생의 알음알이가 사라지고 지혜가 나타나면 전체가 곧 하나이니 부처님의 지혜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일체 모든 법 자체가 마음의 자성인 줄 안다’고 하는 것은 곧 이 마음 자체가 일체 모든 법의 성품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지금 이치가 자기의 마음에 나타나는 것이 곧 마음의 성품으로서 한량없는 공덕을 갖춘 것이다.
‘지혜의 몸을 성취했다’고 함은 위에서 모든 법이 다 사라짐을 관(觀)하는 것이다. 바른 법이 일어난 이 자리에 지금 모든 삿된 견해가 사라지는 것이다. 부처님의 지혜가 일어나 마음을 깨달으니 이치가 나타나고, 이치가 나타나니 지혜가 원만해지는 것이다. 만약 거울의 밝은 면이 깨끗하게 드러나면 이것은 먼저도 뒤도 아니면서, 새 것도 옛 것도 아닌 것으로 모든 경계를 공적하게 비추며 담연한 것이다.
‘다른 사람의 깨달음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은 지혜의 몸을 성취함이 곧 스승의 도움 없이 스스로 아는 자연스런 지혜임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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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 不由他悟是自覺也 知一切法是覺他也 成就慧身爲覺滿也. 成就慧身 必資理發 見夫心性 豈更有也. 若見有他 安稱爲悟. 旣曰心性 自亦不存 寂而能知 名爲正覺. 故法華經云 爲一大事因緣故 出現於世 開示悟入佛之知見. 夫一者 卽古今不易之一道 大者 是凡聖之心體. 故十方諸佛 爲此一大事 出現於世 皆令衆生 於自心中 開此知見. 若立種種差別 是衆生知見 若融歸一道 是二乘知見 若一亦非一 是菩薩知見.
또한 ‘다른 사람의 깨달음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의 깨달음이고, ‘일체 모든 법을 안다’는 것은 다른 대상의 실체를 깨닫는 것이며, ‘지혜의 몸을 성취한다’는 것은 스스로 깨닫고 다른 대상의 실체를 깨달아 깨달음이 원만해진 것이다. 지혜의 몸을 성취하는 것은 반드시 이치를 도와 발현하니, 무릇 마음의 성품을 보는 것이 어찌 다른 곳에 있겠는가. 만약 다른 곳에 있는 것을 본다면 이것을 어찌 깨달음이라 하겠는가. 이미 마음의 성품이라고 말하여도 본래가 또한 있지 않은 것이니, 공적하면서도 일체를 알 수 있는 이것을 이름하여 바른 깨달음이라 한다.
그러므로 ꡔ법화경ꡕ에서 “부처님이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위하여 세상에 출현해서 불지견(佛知見)을 개시오입(開示悟入)한다”고 하였다. 일대사인연에서의 일(一)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하나의 도(道)를 말하며, 대(大)는 범부와 성인이 갖고 있는 본질적 마음의 바탕이다. 그러므로 시방세계 모든 부처님은 이 일대사(一大事)로 세상에 출현하여 모두 중생으로 하여금 자기 마음에서 이러한 지견(知見)을 열게 하신 것이다. 만약 여러 가지 차별을 일으킨다면 중생의 지견이고, 중생의 지견을 모아 원융한 하나의 도(道)로 돌아간다면 이승의 지견이며, 하나이면서 또한 하나가 아니라면 보살의 지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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若佛知見者 當一念 心開之時 如千日並照 不俟更言 卽是祖師西來 卽是諸佛普現. 故云 念念釋迦出世 步步彌勒下生 何處 於自心外 別求祖佛. 則知 衆生佛智本自具足. 若欲起心別求 卽成遍計之性 故六祖云 本性自有般若之智 自用智慧觀照 不假文字. 若如是者 何用更立文字. 今爲未知者 假以文字指歸 令見自性. 若發明時 卽是豁然 還得本心 於本心中 無法不了.
만약 부처님의 지견이라면 한 생각이 있는 그 자리가 마음이 열리는 때다. 이것은 마치 천 개의 태양이 일제히 비추는 것과도 같아 다른 말이 필요치 않으니 곧 달마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이며, 시방세계의 모든 부처님이 두루 나타나신 것이다.
그러므로 “생각 하나하나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시고, 걸음걸음에 미륵 부처님이 내려오신 것인데, 어느 곳에서 자기 마음 이외에 달리 조사와 부처를 구할 것인가”라고 말하였다. 이것으로 중생이 부처님의 지혜를 본래 구족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만약 마음을 일으켜 달리 조사와 부처를 구하려 한다면 곧 중생의 집착이 되니, 그러므로 육조 스님은 “본래의 성품에 반야 지혜를 갖추어 이 지혜를 사용하여 관조하는 것이니, 문자의 개념을 빌리지 않는다”고 하였다.
만약 이와 같다면 어찌 여기에서 다시 문자를 쓸 것인가. 지금 아직 이런 이치를 알지 못하는 자를 위하여 문자를 가지고 돌아갈 곳을 가리켜 그들의 자성을 보도록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마음의 빛이 툭 트여 본래의 마음에 돌아간다면 본래의 마음 가운데 알지 못할 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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