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체법이 도량이다
14-12-37 如悟入宗鏡中 成佛不離一念. 若前念是凡 後念是聖 此猶別敎所收. 今不動無明 全成正覺故 華嚴論云 如將寶位 直授凡庸 如夜夢千秋 覺已隨滅. 傅大士白梁武帝云 今欲將如意寶珠 淸淨解脫 照徹十方 光色微妙 難可思議 意欲施於人主 若受者 疾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故知 若一念決定信受者 不間刹那 便登覺位. 如維摩經云 維摩詰言 然汝等便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是卽出家 是卽具足.
만일 종경에 깨달아 들어가면 부처님이 되는 것도 한 생각을 벗어나지 않는다. 만약 앞의 생각이 범부인데 뒤의 생각이 성인이라면 이것은 별교에서 주장하는 것과 같다.
지금 무명을 움직이지 않고 온전히 정각을 이루기 때문에, 이것을 ꡔ화엄론ꡕ에서 “왕위를 백성에게 바로 주는 것과 같고, 꿈 속의 천년 세월이 잠을 깨어 사라진 것과 같다”고 말한 것이다. 또 부대사는 양무제에게 “지금 여의보주인 청정해탈로서 시방세계를 확철하게 비추니, 광명의 색깔이 미묘하고 훌륭하여 참으로 생각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이 여의보주를 황제에게 드리고자 하오니, 만약 이것을 받으시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빠르게 얻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만약 한 생각에 결정하여 믿고 받아들인 자는 찰나를 두지 않고 문득 깨달음에 올라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ꡔ유마경ꡕ에서 유마 거사가 “너희들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는 자체가 곧 출가이며,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구족한다”고 말한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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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 法華經 云. 爾時龍女 有一寶珠 價直三千大千世界 持以上佛 佛卽受之. 龍女謂智積菩薩尊者舍利弗言 我獻寶珠 世尊納受 是事疾不.1) 答言甚疾. 女言 以汝神力 觀我成佛 復速於此. 故知 一切含生 心珠朗耀 理無前後 明昧隨機.
또한 ꡔ법화경ꡕ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말하였다.
그 때 용녀에게 삼천대천세계에 버금가는 가치가 있는 보배구슬이 하나 있었는데, 용녀가 이 구슬을 가지고 부처님께 공양하자, 부처님께서 받아들이셨다. 용녀는 지적보살 존자사리불에게 말하였다.
용녀 : 내가 세존께 구슬을 올리니, 세존께서 받으셨습니다. 이 행동이 빠르다고 생각하십니까.
존자 : 참으로 빠릅니다.
용녀 : 당신의 신통력으로 내가 성불하는 것을 관(觀)한다면, 이것보다 더 빠를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체중생의 마음은 밝고 환하여 마음의 이치에 전후가 없으나, 밝거나 어둡게 나타남은 중생의 근기에 따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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或因鬪而隱膚中 對明鏡而顯現 或因遊而沈水底 在安徐而得之 或處輪王髻中 建大功而受賜 或繫貧人衣裏 惺智願而猶存 宗鏡明文 同證於此. 如是信者 究竟無餘 卽是一念知一切法是道場 成就一切智故. 據此 諸聖開示 心佛了然. 設有抱疑退屈之者 雖未信受 若成佛之理 未曾暫虧. 如人不識眞金 認爲銅鐵 銅鐵但有虛名 金性未曾暫變. 如今執者 不知本是 卻謂今非 亦匪昔迷而方始悟.
혹은 다툼으로 인하여 몸 속에 숨어 있다가 밝은 거울을 대면하여 나타나기도 하며, 혹은 물에서 놀다가 물에 빠뜨리면 물살이 잔잔한 곳에서 찾기도 하며, 혹은 전륜왕의 상투 속에 있다가 큰 공을 세워 하사받기도 하며, 혹은 술 취한 가난한 사람의 옷 속에 묶여 있다가 술에서 깨어나면 지혜로 찾아지도록 보존되기도 하니, 종경의 기록 속에 나타나는 분명한 의도가 똑같이 이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믿는 자는 구경에 남김없이 한 생각 자체에서 일체 모든 법이 도량인 줄 아니, 일체를 아는 지혜를 성취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에 근거하여 모든 성인은 마음의 부처님을 확연하게 열어 보였다. 설사 의심을 품고 도에서 물러나는 자가 비록 이것을 믿고 받아들이지 못하더라도 부처를 이루는 이치는 일찍이 잠시도 어그러진 적이 없었다.
이것은 마치 순금을 모르고 동이나 철로 알았더라도, 동이나 철은 단지 헛된 명칭일 뿐 순금의 성품은 일찍이 잠시도 변한 적이 없는 것과 같다. 이것은 지금 한쪽을 집착하는 자가 근본이 본래 모두 옳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여 도리어 지금 잘못됐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으나, 사실을 알고 보면 이것 또한 예전의 미혹함을 지금 비로소 깨닫는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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如上廣引 委曲證明 只爲卽生死中 有不思議性 於塵勞內 具大菩提身. 以障重之人 聞皆不信 甘稱絶分 唯言 我是凡夫 旣不能承紹佛乘. 弘持法器 遂乃一向順衆生之業 背覺合塵 生死之海彌深 煩惱之籠轉密. 所以 遍集祖佛言敎 頓釋群疑 令於言下發明 直見無生自性 方知與佛無異 萬法本同 始信眞詮有玆深益. 問 六祖云 善惡都莫思量 自然得入心體 洞山和尙云 學得佛邊事 猶是錯用心 今何廣論 成佛之旨.
위와 같이 널리 많은 사례를 인용하여 자세하게 증명하는 것은, 다만 생사 자체 가운데에 부사의한 성품이 있어 티끌 번뇌 속에 커다란 깨달음이 구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업장이 두터운 사람은 이런 법문을 듣고도 모두가 이를 믿지 못해서 쉽게 그런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여 오로지 말하기를 “나는 범부로서 이미 부처님의 가르침을 계승할 수 없다”라고 한다. 자신이 일체 모든 법을 지닌 법기(法器)인데도 마침내 중생의 업을 한결같이 수순하여 깨달음을 등지고 번뇌에 들어가니, 생사의 바다가 더욱 깊어지며 번뇌의 굴레가 더욱 치밀해진다.
그러므로 널리 부처님과 조사 스님의 가르침을 모아서 중생의 모든 의심을 단번에 풀고 말이 떨어지는 자리에서 바로 무생(無生)의 자성(自性)을 보게 해야 바야흐로 자신이 부처님과 더불어 다름이 없고 만법의 근본이 같음을 아니, 비로소 참다운 가르침 속에 이렇게 깊은 이익이 있음을 믿는다.
문 : 육조 스님은 “선이나 악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으면 자연히 마음의 본질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였고, 동산 스님은 “부처님의 자취를 배우면 오히려 마음을 잘못 쓴다”고 하였는데, 지금 어찌 광범위하게 성불의 뜻을 논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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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 今宗鏡錄 正論斯義. 以心冥性佛 理合眞空 豈於心外妄求 隨他勝境. 如華嚴記 云. 若達眞空 尙不造善 豈況惡乎. 若邪說空 謂豁達無物 或言無礙 不妨造惡. 若眞知空 善順於理 恐生動亂 尙不起心慕善 惡背於理 以順妄情 豈當可造. 若云無礙不礙造惡 何不無礙不礙修善而斷惡耶. 厭修善法 尙恐有著心 恣情造惡 何不懼著.
답 : 지금 ꡔ종경록ꡕ에서 바로 이 이치를 논한다. 마음으로써 자성의 부처님과 명합하고 이치로써 참다운 공에 계합하는데, 어찌 마음 밖에 다른 수승한 경계를 허망하게 구할 것인가. 이것은 ꡔ화엄기ꡕ에서 말한 다음 내용과 같다.
만약 참다운 공을 통달하면 오히려 착한 일도 짓지 않는데, 어찌 하물며 악한 업을 짓겠는가. 만약 삿되게 공을 설하여 ‘탁 트여 아무 것도 없다’고 한다면 혹 어떤 이는 ‘걸림이 없다’고 하면서 악한 행을 거리낌 없이 저지를 것이다. 그러나 진실로 공을 안다면 선(善)으로 이치에 수순하는 것도 동요와 산란을 일으킬까 두려워해 오히려 마음에 선을 좋아하는 생각도 일으키지 않는다. 하물며 악은 이치에 어긋나고 허망한 정식을 따라가는데, 어찌 악한 업을 지을 수 있겠는가.
만약 ‘장애가 없으니 방해받지 않고 악한 업을 짓는다’고 말한다면 ‘걸림이 없어 선한 업을 닦아도 방해받지 않을 것인데, 어찌 선한 업을 닦아 악한 업을 끊으려 하지 않는가. 좋은 법도 닦기 꺼리는 것은 오히려 좋은 법에 집착하는 마음이 있을까 두려워함에서인데, 멋대로 악한 업을 지으며 어찌 거기에 집착하는 마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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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知邪見惡衆生也 乃至 入理觀佛 猶恐起心 更造惡思 特違至理.2) 故楞伽經 云. 佛告大慧 前聖所知 轉相傳授 妄想無性.3) 菩薩摩訶薩 獨一靜處 自覺觀察 不由於他 離見妄想 上上昇進 入如來地 是名自覺聖智相. 又云 一切無涅槃 無有涅槃佛 無有佛涅槃 遠離覺所覺. 所覺是相 能覺是見 遠離覺所覺 名自覺聖智. 以亡能所處 成佛故.
이로써 삿된 견해가 중생을 나쁘게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것이다. 이치에 수순하여 부처님을 관해도 오히려 부처님을 관한다는 생각을 일으킬까 두려운데, 다시 나쁜 생각을 낸다는 것은 지극한 이치에 너무 어긋난다. 그러므로 ꡔ능가경ꡕ에서 부처님은 대혜 보살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옛날, 성인들이 아는 바를 서로간에 전수함도 허망한 생각으로 결정된 성품이 없다. 보살마하살이 고요한 곳에서 홀로 스스로 깨닫고 관찰하여 다른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본다는 망상을 떠나 공부가 진전하여 여래지(如來地)에 들어감을 이름하여 스스로 깨달은 성스런 지혜의 모습이라 한다. 또 일체에 열반이 없으니 열반한 부처님도 없고, 부처님의 열반도 없어 능각(能覺)과 소각(所覺)을 멀리 여의었다. 소각은 상(相)이고 능각은 견(見)으로서 능각과 소각을 멀리 여읜 것을 이름하여 스스로 깨달은 성스런 지혜라 한다. 능(能)과 소(所)의 상대적 개념이 사라진 곳에서 성불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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夫限量所知 從他外學 欲窮般若海 莫得其源 如於恆河中 投一升鹽 水無鹽味 飮者不覺. 若內照發明 徹法原底 無理不照 無事不該. 如經云 佛言 我住於無念法中 得如是黃金色身三十二相 放大光明 照無餘世界.
한계가 있는 생각으로 바깥에서 배움을 좇아 반야의 바다를 알려는 것은 절대로 그 근원을 얻지 못하니, 마치 항하의 강물에 한 되의 소금을 뿌리는 것과 같다. 물에 짠맛이 없으니 이를 마시는 자가 짠맛을 느낄 수 없다.
만약 자기의 마음을 비추어 깨달아서 법의 근원에 확철하면 어떠한 이치도 비추지 않음이 없고, 어떠한 일도 감싸지 않을 것이 없다.
이것은 경에서 부처님이 “내가 무념법 가운데 머물러 이와 같은 황금색신(黃金色身)의 삼십이상(三十二相)을 얻어, 대광명을 펼치어 일체 모든 세계를 남김없이 비추었다”고 말한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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