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모습의 부처님
16-3-40 問 若一切衆生 卽心是佛者 則諸佛 何假三祇百劫 積功累德方成. 答 爲復學一乘實法 爲復趣五性權機. 此論自證法門 非述化儀方便. 且楞伽經說有四佛 一化佛 二報生佛 三如如佛 四智慧佛 隨機赴感 名之爲化 酬其往因 名之爲報 本覺顯照 名爲智慧 理體無二 故曰如如.
문 : 만약 일체중생의 마음 그대로가 부처라면 모든 부처님이 무엇 때문에 삼아승지나 백겁의 오랜 세월 공덕을 쌓고 나서야 성불하는 것입니까.
답 : 일승(一乘)의 참다운 법을 배울 것인가, 아니면 중생의 근기에 따라 차별한 오성(五性)의1) 수준에 맞는 방편에 나아갈 것인가. 여기서는 스스로 깨달아 증득할 법문을 논하는 것이니, 여러 가지 모습과 의식으로 중생을 교화한 방편을 서술하는 것이 아니다.
ꡔ능가경ꡕ에서는 다음과 같이 네 분의 부처님이 있다고 설한다.
첫 번째는 중생의 근기에 따라 감응하는 부처님으로서 화불(化佛)이라 한다. 두 번째는 지나간 인연의 과보로 나타나는 부처님으로서 보생불(報生佛)이라 한다. 세 번째는 본래의 깨달음이 드러나 비추는 것으로서 지혜불(智慧佛)이라 한다. 네 번째는 이치와 바탕이 둘이 아니므로서 여여불(如如佛)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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華嚴經明十種佛 所謂 於安住世間 成正覺佛 無著見 願佛 出生見 業報佛 深信見 住持佛 隨順見 涅槃佛 深入見 法界佛 普至見 心佛 安住見 三昧佛 無量無依見 本性佛 明了見 隨樂佛 普授見.
ꡔ화엄경ꡕ에서는 다음과 같은 열 종류의 부처님을 밝혀 놓았다.
첫 번째는 세간에 머무르며 바른 깨달음을 성취하는 정각불(正覺佛)로 집착이 없는 데서 볼 수 있는 부처님이다. 두 번째는 원불(願佛)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원력으로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볼 수 있는 부처님이다.
세 번째는 업보불(業報佛)로 인과를 받아들이는 깊은 신심에서 볼 수 있는 부처님이다. 네 번째는 주지불(住持佛)로 참다운 이치에 수순하여 볼 수 있는 부처님이다.
다섯 번째는 열반불(涅槃佛)로 깊은 깨달음에 들어가서 볼 수 있는 부처님이다. 여섯 번째는 법계불(法界佛)로 널리 가는 곳마다 볼 수 있는 부처님이다.
일곱 번째는 심불(心佛)로 자기 마음에 안주하는 데에서 볼 수 있는 부처님이다. 여덟 번째는 삼매불(三昧佛)로서 삼매 속에 한량없는 부처님이 나타나므로 다른 곳에 의지함 없이 볼 수 있는 부처님이다.
아홉 번째는 본성불(本性佛)로서 본래의 성품이 명료함으로 볼 수 있는 부처님이다. 열 번째는 수락불(隨樂佛)로 널리 중생에게 즐거움을 주는 데서 볼 수 있는 부처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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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 佛總具十身 一衆生身 二國土身 三業報身 四聲聞身 五緣覺身 六菩薩身 七如來身 八智身 九法身 十虛空身. 若別依五敎 隨敎不定. 一小乘敎 有二身佛 一生身 二法身. 二大乘初敎 有三身佛 一法身 二應身 三化身. 三終敎 有四身佛 一理性身 二法身 三報身 四應化身. 四頓敎 唯一佛身 一實性佛. 五一乘圓敎 有十身佛.
또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열 종류의 몸을 총체적으로 갖추고 있다.
첫 번째는 중생의 몸으로 나타나는 중생신이다. 두 번째는 국토로 나타나는 국토신이다. 세 번째는 업보로 나타나는 업보신이다. 네 번째는 성문으로 나타나는 성문신이다. 다섯 번째는 연각으로 나타나는 연각신이다. 여섯 번째는 보살로 나타나는 보살신이다. 일곱 번째는 여래로 나타나는 여래신이다. 여덟 번째는 지혜로 나타나는 지신(智身)이다. 아홉 번째는 법계로 나타나는 법신이다. 열 번째는 허공으로 나타나는 허공신이다.
만약 따로 오교(五敎)에 의지한다면 가르침에 따라서 내용이 일정하지 않다.
첫 번째의 소승교에서는 두 가지 몸의 부처님이 있으니, 몸으로 나타나는 부처님과 법으로 나타나는 부처님이다. 두 번째의 대승초교에서는 세 가지 몸의 부처님이 있으니, 법신불과 응신불과 화신불이다. 세 번째의 종교(終敎)에서는 네 가지 몸의 부처님이 있으니, 이치의 성품으로서 나타나는 부처님과 법신불과 보신불과 응화신불이다. 네 번째의 돈교에서는 오직 한 분의 부처님만 있으니, 하나의 진실한 성품인 부처님이다. 다섯 번째의 일승원교에서는 열 분의 부처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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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 約性成佛 五敎差別不同. 小乘 唯悉達一人 爲佛性. 初敎 半成半不成 以有性無性分故 爲佛. 終敎 凡有心者 當得作佛 除草木等. 頓敎 無佛無性 離言說相 爲佛. 圓敎 無所不有佛性 以三種世間 皆是爲佛. 若三種世間 皆是爲佛者 則內外心境 無非佛矣. 又 約心成佛 小乘 以善心修所得 爲佛. 初敎 心性爲佛.
또한 결정된 성품을 기준으로 하여서 부처님이 되는 것에 오교(五敎)의 주장이 다음과 같이 다르다.
소승교에서는 ‘오직 싣달타 한 사람만이 부처가 될 수 있는 성품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대승초교에서는 ‘반은 성불하고 나머지 반은 성불하지 못한다’고 주장하니, 이것은 ‘불성이 있는가 없는가’로 나누어서 부처님이 될 수 있는가를 따지기 때문이다. 대승종교에서는 마음이 있는 것은 당연히 성불한다고 주장하나, 풀이나 나무 등의 무정물은 제외한다. 대승돈교에서는 부처도 자성도 없다고 주장하여, 언어로서 설명하는 것을 벗어나 있는 것이 부처라고 한다. 대승원교에서는 어떠한 곳에도 불성(佛性)이 있지 않은 곳은 없다고 주장하니, 기세간․중생세간․지정각세간 모두가 부처님이기 때문이다. 만약 세 종류의 세간이 모두 부처가 된다고 하면 마음과 경계가 부처님 아닌 것이 없다.
또 마음을 기준으로 하여서 부처님이 되는 것은 다음과 같이 있다.
소승교에서는 ‘착한 마음을 닦아서 얻어지는 것’으로 부처님을 삼는다. 대승초교에서는 ‘마음의 성품’으로 부처님을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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終敎 以心相性泯 爲佛. 頓敎 心本不生 爲佛. 圓敎 以心無礙無盡 爲佛. 又 天台明四敎佛 一藏敎佛 二通敎佛 三別敎佛 四圓敎佛. 若以如如佛心佛本性佛 誰人不具 若以國土身法身虛空身 何法不圓 則處處而皆是寶坊 丘陵誰立 念念而咸成正覺 妄想何分. 如盲者不睹光明 非朝陽夕魄之過咎. 似小乘不聞圓頓 豈佛心妙旨之親疎. 但以法弱 由於根微.
대승종교에서는 ‘마음의 상(相)과 성(性)이 사라지는 것’으로 부처님을 삼는다. 대승돈교에서는 ‘마음이 본래 생겨나지 않는 것’으로 부처님을 삼는다. 대승원교에서는 ‘마음을 쓰는 데에 걸림이 없고 다함이 없는 것’으로 부처님을 삼는다.
또 천태사교에서는2) 부처님을 장교(藏敎)의 부처님과 통교(通敎)의 부처님과 별교(別敎)의 부처님과 원교(圓敎)의 부처님으로 밝히고 있다.
만약 여여한 부처님과 마음의 부처님과 본래의 성품인 부처님이라면 어느 누가 부처님을 갖추고 있지 않겠으며, 국토신과 법신과 허공신이라면 어떤 법이 원만하지 않겠는가. 곧 처처가 모두 부처님이 계시는 곳이니, 어느 누가 부처님 처소를 따로 장만할 것인가. 생각 하나하나가 모두 깨달음을 이루는 것이니, 망상이 어떻게 생겨나겠는가. 이것은 마치 눈이 먼 자가 광명을 보지 못함이 아침 햇빛이나 저녁 달빛의 허물이 아닌 것과 같다. 소승이 대승원교와 대승돈교의 가르침을 듣지 않는 것이, 어찌 부처님 마음의 오묘한 종지에 멀고 가까움이 있어 그렇겠는가. 이것은 단지 불법이 약해지고 중생의 근기가 미약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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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廣在乎量大 淺機自感 妙有證作無常 薄福所宜 珍寶化爲瓦礫 空迷己眼 錯認他身. 分實際以千差 致化儀之百變.
도(道)가 온 우주에 꽉 차 있는데도 천박한 근기로 감응하여 묘유(妙有)를 무상(無常)이라 알고, 박복한 소치로 진귀한 보배를 기왓장이나 자갈로 만들며, 부질없이 자기 안목에 미혹하여 달리 부처가 있다고 잘못 아는 것이다.
하나의 진리를 천차만별로 나눔으로써 근기에 맞추어 중생을 교화하는 의식과 방편이 여러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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