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심의 도로 여래가 간다
23-8-68 問 絶待眞心 本無名相 云何成佛 又作異生. 云隨順世法 立此假名 又 因何法而得成立. 答 實際理中 本無凡聖可得 以一切衆生 迷無性理. 以無性故 不覺起妄 於眞空中 妄立名相. 故名爲凡. 了名相空 復稱爲聖. 凡聖之號 因五法成 猶如幻化 名相非眞. 且如幻以術成 形因業有. 術業俱假 形幻同空. 但有迷悟之名 本無凡聖之體. 五法者 瑜伽論云 一名 二相 三妄想 四正智 五眞如.
문 : 일체의 경계가 끊어진 참마음은 본래 이름과 모습이 없는데, 어떻게 부처님이 되거나 또는 중생이 된다고 하십니까. 만약 세상의 법을 수순하여 이런 가명(假名)을 세운 것이라면 또한 어떤 법으로 인하여 이런 내용이 성립할 수 있는 것입니까.
답 : 진실한 이치 가운데에는 본래 얻을 만한 범부나 성인이 없으나, 일체중생이 결정된 성품이 없다는 이치에 미혹하기 때문이다. 결정된 성품이 없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망념을 일으켜서 진공(眞空) 가운데 허망하게 이름과 모양을 세우므로 범부라 한다. 그러나 이름과 모양이 공(空)하다는 사실을 요지하면 다시 성인이라 한다.
범부나 성인의 호칭은 다섯 가지 법으로 인하여 성립하니, 이것은 마치 허깨비와 같아서 이름과 모습이 진실하지 않다. 마치 허깨비가 술법으로 만들어지는 것과 같이 중생의 형태도 업으로 인하여 있는 것이다. 술법과 중생의 업이 모두 거짓이라면 그것으로 생겨나는 중생의 모습과 허깨비도 똑같이 공한 것이다. 단지 깨달았다거나 미혹하다는 개념만 있을 뿐 본래가 범부나 성인의 어떤 바탕도 없다. 다섯 가지 법은 ꡔ유가론ꡕ에서 명칭과 모습과 망상과 바른 지혜와 진여라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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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釋云. 名相妄想三法成凡 正智眞如成聖. 名相妄想者 是凡夫法 名相二法 是凡夫境 妄想一法 是凡夫六識. 迷事緣境而起 故名妄想. 經偈云 不了心及緣 則生二妄想. 正智眞如者 是聖人法. 正智是聖人對治金剛緣 修無漏斷惑智 亦名能覺智. 眞如是聖人心中 所證之理. 眞如是體 正智是用. 異者未曾異 同者未曾同. 同者是眞如 異者是正智. 正智常用 故障生滅 眞如常體 故無生滅. 體用無礙 法界不思議眞實義也.
옛날에 이것을 해석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명칭과 모습과 망상이라는 세 가지 법은 범부를 만들고, 바른 지혜와 진여는 성인을 만든다. 명칭과 모습은 범부의 경계이며 망상은 범부의 육식(六識)을 말하니, 명칭과 모습과 망상은 범부의 법이다. 현상에 미혹하여 경계에 반연해서 분별이 일어나므로 망상이라 한다. 이것을 경의 게송에서는 “마음과 경계를 알지 못하면 곧 명칭과 모습인 분별 경계와 분별 주관인 육식(六識)의 두 가지 망상이 생긴다”고 하였다.
바른 지혜와 진여는 성인의 법이다. 바른 지혜는 성인이 삿됨을 타파하여 정법을 드러내는 금강의 인연으로 무루법(無漏法)를 닦아 미혹을 끊는 지혜로서 능각지(能覺智)라고도 한다. 진여는 성인의 마음에서 증득될 대상으로서의 이(理)다. 진여는 바탕이며 바른 지혜는 작용이다. 진여의 움직임으로 바른 지혜가 달라 보이지만 진여의 입장에서는 일찍이 달라진 적이 없으며, 본 바탕에서는 진여로서 같지만 작용하는 바른 지혜의 입장에서는 일찍이 같아 본 적이 없다. 하나로서 같다고 하는 것은 진여이며 작용으로서 다르다고 하는 것은 바른 지혜다. 바른 지혜가 항상 작용하므로 생멸을 장애하며, 진여로서 항상 바탕을 이루고 있으므로 생멸이 없는 것이다. 진여의 바탕과 바른 지혜의 작용이 서로 걸림 없으니 법계가 부사의한 진실한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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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 凡夫心惑 不達名相空故 妄計爲有. 迷有不空 名之爲妄 從妄起心 名之爲想. 正智者 覺知名相本來空寂. 以知空故 妄想自息 息妄歸眞 顯理分明 正智現前. 不立名相故 名正智. 經偈云 了心及境界 妄想不復生. 眞如者 卽此正智心性眞故 卽名眞如. 故知 但是一法無中執有成凡 達有本空成聖. 不唯五法 乃至恆沙義出無邊 理恆一道. 此唯心之道 卽是如來行處 步步履法空故 亦是摩訶衍處 念念無所得故.
또한 범부의 마음이 미혹하여 이름과 모습이 공(空)함을 요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허망한 생각으로 있다고 한다. 있음이 공(空)하지 않다고 잘못 생각하면 망(妄)이라 하고, 망에서 일으키는 마음을 상(想)이라 하는 것이다.
바른 지혜는 이름과 모습이 본래 공적함을 깨달아 아는 것이다. 본래 공적한 것임을 알기 때문에 망상이 스스로 쉬어지고, 망상이 쉬어져서 진여로 돌아가니 이치가 분명하게 드러나고 바른 지혜가 눈 앞에 나타난다. 이름과 모습을 세우지 않기 때문에 바른 지혜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것을 경의 게송에서는 “마음과 경계를 요지하니, 다시 망상이 생기지 않았다”고 하였다.
진여라는 것은 곧 바른 지혜를 쓰는 마음의 성품이 참하고 여여하므로 진여라고 이름한다. 그러므로 알아야 할 것이니 단지 한 가지 법도 없는 가운데에서 어떤 법이 있다고 집착하면 범부가 되고, 있음도 본래 공함을 알아 차리면 성인이 되는 것이다.
오직 다섯 가지 법뿐만 아니라 항하사 모래알 만큼의 많은 이치가 끝이 없이 나오나 이치는 항상 하나의 도다. 오직 마음이라는 이 도가 곧 여래가 가는 곳이니 걸음 하나하나가 법이 공한 자리를 밟기 때문이며, 또한 대승(大乘)이 살아 움직이는 곳이니 생각 하나하나에 얻을 바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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問 云何說入此宗鏡 一念相應 見道速疾 超過劫量. 答 實有斯理 世況可知. 若不直下 頓悟自心功德圓滿 卽於心外妄求 徒經劫數. 若能內照 如船遇便風 一念圓成 所作無滯. 故知 不遇宗鏡之風 有爲行船 終不能速度生死之波 直至涅槃之岸. 有茲大利 廣集無勞 唯囑後賢 轉相傳授.
문 : 어떻게 이 종경에 들어가면 일념에 상응하여 빠르게 도를 보고 영겁의 시간을 뛰어넘는다고 설하시는 것입니까.
답 : 진실로 이러한 이치가 있건만 세간의 이치로 비유하여 알 수가 있겠는가. 만약 자기의 마음을 바로 돈오하여 공덕이 원만하지 못하다면 곧 마음 밖에서 허망하게 도를 구하리니, 부질없이 영겁의 시간을 보낼 것이다. 그러나 만약 안으로 관조함이 배가 바람을 만난 듯이 순조롭다면 한 생각에 도를 원만 성취하리니, 하는 일에 걸림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종경이란 바람을 만나지 못하면 그 배에 탄 중생은 끝내 생사의 파도를 빠르게 건너 열반의 언덕에 바로 도달할 수 없음을 알 것이다. 종경에 이런 커다란 이익이 있으므로 널리 다른 곳에 많은 자료를 모으려 힘쓸 것이 없으니, 오직 뒷날의 현명한 사람이 이 법을 서로 전하기를 부촉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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