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성이 청정한 마음
34-11-111 寶藏論云 知有有壞 知無無敗 眞知之知 有無不計 旣不計有無 卽自性無分別之知. 是以 此眞心自體之知 卽無緣心 不假作意 任運常知 非涉有無 永超能所. 水南和尙云 卽體之用 曰知 卽用之體 爲寂 如卽燈之時 卽是光 卽光之時 卽是燈 燈爲體 光爲用 無二而二也. 又云 知之一字 衆妙之門 如是開示靈知之心 卽是眞性與佛無異. 故名顯示眞心卽性敎 全同禪門第三直顯心性之宗.
ꡔ보장론ꡕ에서 “유(有)를 알면 유가 허물어지고 무(無)를 알면 무가 허물어지나, 참으로 아는 앎은 유와 무를 계교 사량하지 않는 것이다. 이미 유와 무를 계교하지 않는다면 그 자체가 자성의 분별이 없는 앎이다”라고 하였다.
이런 까닭에 이 참마음 스스로의 바탕인 앎은 곧 반연이 없는 마음이니, 알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항상 아는 앎이며, 유와 무를 섭렵하는 것이 아니면서 영원히 능(能)․소(所)를 초월하는 것이다.
이것을 수남 화상은 “진여의 바탕 자체에서 작용하는 것을 앎이라 하고, 진여가 작용하는 자체 그대로의 바탕이 공적한 것이 된다. 이것은 마치 등불과 불빛의 관계에서 등불이라는 바탕 자체가 작용할 때에는 불빛이나, 불빛의 작용 그대로가 등불인 것과 같다. 등불은 체(體)가 되고 불빛은 용(用)이 되는 것이니, 둘이 아니면서 둘이다”라고 말하였다. 또 “앎이란 한 글자는 묘한 온갖 이치가 드나드는 문이다. 이와 같이 신령스럽게 아는 마음을 열어 보이는 자체가 참다운 성품으로 부처님의 성품과 더불어 다를 것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것을 현시진심즉성교(顯示眞心卽性敎)라 이름하였으니, 선문(禪門)에서 말하는 세 번째의 직현심성종(直顯心性宗)과 완전히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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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西域傳心1) 多兼經論 無二途也. 但以此方 迷心執文 以名爲體 故達磨善巧 揀文傳心. 標擧其名[心是名也] 黙示其體[知是心也]. 喩以壁觀 令絶諸緣 絶諸緣時 問 斷滅否.2) 答 雖絶諸念 亦不斷滅. 問 以何證驗 云不斷滅. 答 了了自知 言不可及.
그러므로 서역에서 전하는 마음과 많은 경론에서 주장하는 것이 서로 다른 길이 아니다. 단지 이쪽 사람들이 마음에 대해서 미혹하고 문자에 집착하여서 명자를 가지고 바탕을 삼기 때문에, 달마는 훌륭한 방편을 써서 문장을 추려 마음을 전하였고, 그 이름을 게시하여[ 마음이 명자다] 그 바탕을 묵묵히 보여 주었다[ 앎이 마음이다]. 달마는 이것을 좌선하는 것으로써 모든 반연을 끊도록 비유하였고, 혜가가 모든 인연을 끊었을 때에 달마는 다음과 같이 질문하였다.
달마 : 모든 망념을 끊었는가.
혜가 : 비록 모든 망념을 끊었더라도 또한 단멸은 아닙니다.
달마 : 무엇을 증득하고 경험했기에 단멸이 아니라고 말하는가.
혜가 : 분명하고 분명하여서 스스로 알 뿐, 말로 미칠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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師卽印云 只此是自性淸淨心 更勿疑也. 若所答不契 卽但遮諸非 更令觀察 畢竟不與他先言知字. 直待他自悟方驗眞實 是親證其體然後 印之 令絶餘疑. 故云 黙傳心印. 所言黙者 唯黙知字 非總不言. 六代相傳 皆如此也. 至荷澤時 他宗競起 欲求黙契 不遇機緣 又 思惟達磨懸絲之記.[達磨云 我法 第六代後 命若懸絲]
달마 : (곧 인가하여 말하기를) 다만 이것이 곧 자성이 청정한 마음이니, 다시 의심하지 말라.
만약 혜가 스님의 대답이 도(道)에 계합되지 않았다면 곧 달마 스님은 단지 모든 잘못을 차단하여서 다시 마음을 관찰하도록 하여, 필경 그에게 앞에서 이야기한 ‘앎’을 인가하여 주지 않았을 것이다. 바로 그가 스스로 깨달아서 바야흐로 진실을 경험하는 것을 기다리니, 이는 진실의 바탕을 친히 증득한 연후에야 인가하여 다른 의심을 끊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묵연히 마음의 깨달음을 전한다고 하는 것이다. ‘묵연히’라고 말하는 것은 오직 ‘묵연히 안다’는 것으로서, 조금도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육대(六代)에 걸쳐서 마음의 깨달음을 서로 전한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 하택의 시절에 이르러 자기 주장만을 하는 다른 종파들이 다투어 일어났고, 묵연히 도(道)에 계합하고자 하였으나 그럴 자격이 있는 인연을 만나지 못했으며, 또 달마 스님이 예언하신 ‘종지(宗旨)가 실에 매달린 것처럼 위태롭다’고 하였던 말씀을 생각하게 되었다[달마 스님은 “나의 법이 육대(六代)에 걸쳐 전해진 후에, 그 명(命)이 가는 실 끝에 매달린 것과 같다”고 하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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恐宗旨滅絶 遂言 知之一字 衆妙之門. 問 悟此心已 如何修之 還依初說相敎中 令坐禪否.3) 答 若惛沈厚重 難可策發 掉擧猛利 不可抑伏. 貪嗔熾盛 觸境難制者 卽用前敎中種種方便 隨病調伏. 若煩惱微薄 慧解明利 卽依本宗一行三昧.
그러므로 종지가 끊겨서 없어질까 걱정되어 마침내 하택은 “앎이란 한 글자는 온갖 묘(妙)한 이치가 드나드는 문이다”는 말을 하게 된 것이다
문 : 이 마음을 깨달았다면 어떻게 수행해야 합니까. 처음에 말씀하신 설상교(說相敎)에 의지해 좌선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까.
답 : 만약 혼침이 두텁고 무거워 공부하는 마음을 내기 어렵고, 생각이 산만하여 흐트러짐이 심하다면 억눌러 조복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탐내고 성냄이 치성하여 경계에 부딪쳤을 때 통제하기 어려운 사람은 곧 앞의 가르침에서 말한 여러 가지 방편을 사용하여 병에 따라 적절하게 조복받을 것이다. 그러나 번뇌가 적어 지혜와 이해력이 밝고 예리하다면 곧 수행하는 방법을 본종(本宗)의 일행삼매(一行三昧)에 의지하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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