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추회요(冥樞會要)

119. 무생(無生)과 무불생(無不生)

通達無我法者 2008. 3. 5. 14:21
 

무생(無生)과 무불생(無不生)

 

37-14-119  華嚴疏云 生之無生 眞性湛然 無生之生 業果宛然. 是知 若卽念存有念 卽是常見 離生求無生 卽是斷見 皆不達實相 無生無滅之理. 若正了無生 則無生無不生 豈定執有生無生之二見乎. 所以云 誰無念誰無生 若實無生無不生 喚取機關木人問 求佛施功早晩成.



ꡔ화엄소ꡕ에서 “생겨나는 곳에서 생겨남이 없으니 참다운 성품이 담연하고, 생겨남이 없는 곳에서 생겨나니 업의 과보가 완연하다”고 하였다. 이것으로 만약 생각 그 자체가 생각 상태로 존재하고 있다면 상견이며, 생겨남을 떠나 생겨날 것이 없음을 구한다면 단견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니, 이것은 모두 실상(實相)의 생멸이 없는 이치를 통달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만약 바로 생겨남이 없다는 이치를 요달하면 곧 생겨날 것도 생겨나지 않을 것도 없는 것인데, 어찌 생겨난다거나 생겨나지 않는다는 상대적 두 가지 견해를 정하여 집착할 것인가. 그러므로 영가 스님은 ꡔ증도가ꡕ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무엇이 무념이고 무생이던가

   무생으로 모든 것이 생겨나도다

   움직이는 나무 인형 물어 보게나

   부처되려 공 베풀면 성취되는가.


若以息念歸無念 如同寒木死灰 與木人何別. 豈有成佛之期耶. 斯乃尙未知卽念而無念 寧知一念頓圓乎.



만약 생각을 그냥 쉼으로서 아무 생각이 없는 곳에 돌아가려 한다면 이것은 마치 마른 나무 토막이나 죽은 재와 같을 것이니, 생명이 없는 나무 인형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여기에 어찌 부처님이 될 수 있는 기약이 있겠는가. 이것은 오히려 생각 그대로가 무념(無念)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함이니, 어찌 일념(一念)에 단박 원만해지는 것을 알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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