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추회요(冥樞會要)

139. 법이 다르나 일심을 나타내

通達無我法者 2008. 3. 5. 15:02
 

법이 다르나 일심을 나타내

 

41-10-139  今立第一心法 能變識有三 一第八異熟識變  二第七思量識變 三第六了別境識變. 旣唯識變 我法皆虛 因此二空故 契會玄旨. 以我空故 煩惱障斷 以法空故 所知障消. 煩惱障斷故 證眞解脫 所知障斷故 獲大菩提. 然後 行滿因門 心冥果海 則境識俱寂 唯一眞空. 問 從上宗乘 唯令絶學 單刀直入 敎外別傳 何假智慧多聞 廣論性相 言繁理隱 水動珠昏.



지금 먼저 마음의 법을 세움에 변할 수 있는 식에 세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제팔식인 이숙식(異熟識)이 변하는 것이고, 둘째는 제칠식인 사량식(思量識)이 변하는 것이며, 셋째는 제육식인 요별경식(了別境識)이 변하는 것이다. 이미 오직 식만 변하는 것으로서 아()와 법() 모두에 실체가 없으니, 아와 법이 공()함으로 인해 깊고 오묘한 종지에 계합하는 것이다. 아가 공하므로 번뇌장이 끊어지고, 법이 공하므로 소지장이 사라진다. 번뇌장이 끊어지므로 참다운 해탈을 증득하고, 소지장이 끊어지므로 커다란 깨달음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런 연후에 행이 인문(因門)에 원만하고 마음이 과해(果海)에 명합(冥合)하니, 경계와 식이 함께 공적하여 오직 하나의 참다운 공일 따름이다.


문 : 최고의 가르침은 오직 배움을 끊도록 하는 것으로서 단도직입(單刀直入) 교외별전(敎外別傳)인데 어찌 지혜와 다문(多聞)으로 널리 성()과 상()을 논하는 방편을 빌리십니까. 말이 번거로우면 이치가 숨고, 물이 흔들리면 구슬 빛이 흐려지는 법입니다.

答 顯宗破執 權拂學路討論 達旨融通 非離文字解脫. 法華經云 若有利根 智慧明了 多聞强識 乃可爲說.1) 大凡參玄之士 須具二眼 一己眼明宗 二智眼辯惑. 所以 禪宗云 單明自己 不了目前 如此之人 只具一眼. 理孤事寡 終不圓通 隻翼單輪 豈能飛運. 若執只要單刀直入 不須廣參者2) 則善財初見妙德 發明之後 不合遍參法界.



답 : 종지를 드러내고 집착을 타파하기 위해 배움에서 일어난 시비를 방편으로 떨어내고자 한 것이니, 원융하게 종지를 통달함은 문자를 벗어나 해탈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ꡔ법화경ꡕ에서 “만약 예리한 근기가 있어 지혜가 명료하고 많이 안다면 법을 설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대개 깊은 종지를 참구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두 가지 안목을 갖추어야 하니, 첫째는 자기의 안목으로 종지를 밝히는 것이며, 둘째는 지혜의 안목으로 미혹을 분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종에서는 “혼자서 자기 공부만 알고 눈 앞의 현실을 요지하지 못한 이와 같은 사람은 단지 외눈박이 불구자와 같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치에 치우쳐 현실에 적응을 못하면 끝내 이(理)와 사(事)가 원만하게 융통하지 못하니, 날개 하나와 수레바퀴 하나로써 어찌 하늘을 날며 물건을 운반할 수 있겠는가. 만약 다만 단도직입(單刀直入)만을 집착하여 널리 보고 배울 필요가 없다 한다면 선재 동자가 처음 묘덕을 만나서 마음이 트인 후에 두루 법계를 다니며 보고 배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알라. 처음과 끝의 마음이 평등하고 이치와 행이 동시니라.

故知 初後心等 理行同時. 所以 善財至彌勒 佛果圓後 知指再見初友文殊.3) 如先德云 文殊之妙智 宛是初心 普賢之玄門 曾無別體 是則 理事冥齊於一旨 本末匪越於刹那 曷乃守一疑諸 頓迷法界 捨此取彼 宰割虛空. 又 若以智慧爲非 則大智文殊不應稱法王之子 若以多聞是過 則無聞比丘不合作地獄之人. 應須以智慧合其多聞 終不執詮而認指 以多聞而廣其智慧 免成孤陋而面牆.



그래서 선재가 미륵을 친견하여 불과(佛果)가 원만해진 뒤에야, 처음의 선지식인 문수를 다시 만나도록 가리킨 뜻을 안 것이다. 이것은 마치 옛 스님이 “문수의 오묘한 지혜는 완연한 초심(初心)으로 보현의 깊은 도리와 일찍이 다른 바탕이 없었다”고 한 것과 같다. 이것은 이()와 사()가 하나의 종지에서 심오하게 일치하며, 근본과 지말이 찰나를 뛰어넘지 않는 것이니 어찌 하나를 지키면서 모든 것을 의심하여 대번에 법계에 미혹하고, 이것을 버리고 저것을 취하여 마음대로 허공을 재단할 것인가.

또 만약 지혜로 잘못되는 것이라면 대지문수는 응당 법왕자라 부르지 않아야 하며, 만약 다문(多聞)으로 허물이 된다면 무문 비구는4) 지옥에 떨어지지 않아야 할 것이다. 마땅히 지혜로 다문(多聞)에 계합하여야 끝내 말의 논리에 집착하지 않고 그것이 가리키는 종지를 알 것이며, 다문(多聞)으로 지혜를 넓혀야 담벼락을 마주한 고루함을 면할 것이다.

所以云 有智無行 國之師 有行無智 國之用 有智有行 國之寶 無智無行 國之賊. 是以 智應須學 行應須修 闕智則爲道之讎 無行乃國之賊. 當知 名相關鎖 非智鑰而難開 情想勾牽5) 匪慧刀而莫斷. 應須責躬省已 策發進修. 是以 履圓通之人 豈墮絶言之見. 發菩提之者 不生斷滅之心. 若能直了自心 卽是單刀直入 最爲省要. 以一解千從 攝法無餘故 亦是敎外別傳 離此別無奇特.



그러므로 “지혜가 있고 행이 없다면 나라의 스승이나, 행이 있고 지혜가 없다면 나라의 심부름꾼이다. 또한 지혜가 있으면서 행도 있다면 나라의 보배이나 지혜가 없으면서 행도 없다면 나라의 도적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지혜로 응당 배워야 하며 행으로 응당 닦아야 할 것이니, 지혜가 빠지면 도를 닦는 데에 천추의 한이 되고, 행이 없으면 나라의 도적이 되는 것이다. 마땅히 알라. 명자와 모양에 갇혀 있는 사람은 지혜의 열쇠가 아니면 열기 어려우며, 감정과 분별심으로 얽혀 있는 이는 지혜의 칼이 아니면 끊을 수 없으니, 응당 자신을 살펴 책망하고 독려하여 닦아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원만하게 통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어찌 말을 끊는다는 견해에 떨어지겠는가. 깨달음을 일으켜 가는 사람은 단멸하는 마음을 내지 않는 것이다. 만약 바로 자기의 마음을 알 수 있다면 이것이 곧 단도직입(單刀直入)이라, 가장 요긴하게 살펴야 할 곳이다. 하나를 앎으로써 천 가지가 알아져 어떠한 법도 남김없이 거두어들이니 또한 이것이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 이것을 떠나 달리 기특한 것이 없다.


又 此宗鏡大意 以妙悟見諦爲期 不取依通齊文作解. 法旣眞實 行須契同 唯在心知 不俟言說. 爲未了者 亦不絶言 究竟相應 終須親省. 此是十方諸佛 同證同說 古今不易 一際法門. 如經云 我不見有一佛國土 其中如來 不說此法. 是以 佛佛道同 心心理合. 故知 離宗鏡外 無法可說 以凡有言敎 俱不出平等性故 終無有二. 所以 經云 如大師子 殺香象時 皆盡其力 殺兎亦爾 不生輕想 諸佛如來 亦復如是 爲諸菩薩及一闡提 演說法時 功用無二.



또 이 종경의 대의는 오묘하게 깨달아 진리를 보는 것으로 기약을 삼으니, 다른 힘에 의지하여 통하거나 문장에 맞추어 이해할 것이 아니다. 법이 이미 진실하니, 행도 법에 계합하여 같아야 한다. 오직 마음으로 아는 것이 있을 뿐 설명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이 뜻을 아직 모르는 자를 위하여 또한 말을 끊지는 않으나, 구경에 상응하여 끝내는 몸소 살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시방세계의 모든 부처님이 같이 증득하고 같이 설하신 것으로 예나 지금이나 바뀌지 않는 하나의 법문이다. 이것은 마치 경에서 “나는 어떠한 불국토라도 그 가운데 계신 여래가 이 법을 설하지 않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고 한 것과 같다. 이 때문에 부처님과 부처님의 도()가 같고, 마음과 마음의 이치가 계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알라. 종경을 떠난 다른 곳에서는 설할 만한 어떠한 법도 없다. 무릇 깨달은 이의 말과 가르침은 모두 평등한 성품을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끝내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에서는 “커다란 사자가 코끼리를 죽일 때 모든 힘을 다하는 것처럼 토끼를 죽일 때에도 그 힘을 다하여 가벼운 생각을 내지 않는다. 모든 부처님과 여래도 또한 이와 같아서 모든 보살과 어리석은 사람을 위하여 법을 설할 때에도, 쓰는 공능은 두 가지가 없다”고 하였다.

仰唯聖旨 鑒誡昭然 豈可於平等至敎之中 起差別解耶 於一眞衆生界中 生勝劣見耶. 若入宗鏡之中 自免斯咎. 今所錄者 一一皆是 古佛聖敎. 於無量億劫 捨無數身命 普爲一切衆生 求此難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法 付囑諸大菩薩. 爲末代求無上菩提之人 千途異說 共顯一心. 云何負恩 不生信受.



오직 부처님의 뜻을 우러러 보면 가르침의 근본이 밝고 분명한데, 어찌 평등하고 지극한 가르침에서 차별하는 견해를 일으킬 수 있겠으며, 하나로서 전체가 진리인 중생계에서 수승하고 하열하다는 견해를 낼 수가 있겠는가.

만약 종경에 들어간다면 스스로 이러한 허물에 빠짐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기록되는 하나하나가 모두 옛 부처님의 성스런 가르침이다. 이것은 옛 부처님께서 무량억겁의 세월 동안 무수한 생명을 버려가며 널리 일체중생을 위하여 이 얻기 어려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을 구하여 모든 대보살에게 부촉하신 것이다. 말세에 최고의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을 위하여 여러 가지 방편으로 설명하는 방식이 다르나 똑같이 하나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은혜를 저버리고 종경을 믿어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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