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당집(祖堂集)

일숙각(一宿覺) 화상

通達無我法者 2008. 3. 10. 10:25
 

 

 

일숙각(一宿覺) 화상

  

  6조의 법을 이었고, 온주(溫州)에서 살았다. 선사의 휘(諱)는 현각(玄覺)이요 자는 도명(道明)이며, 속성은 대씨(戴氏)이며, 온주(溫州)의 영가현(永嘉縣) 사람이다. 내외의 경전을 널리 통달하고, 밭갈지 않고 먹으며 누에를 치지 않고 입으니, 그의 평생의 공업(功業)은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는 것이었다.

  일찍이 온주의 개원사(開元寺)에 있으면서 편모에게 효순하고, 더하여 누이까지 있어 두 사람의 시봉을 하니, 온 절과 마을 사람들이 모두 그를 비방하였다. 

  어느 날 어머니가 별세하여 상복을 입고서도 누이를 버리지 못하니, 더욱 사람들의 비방을 받았으나 그는 전혀 그러한 눈치를 채지 못했다.

  어느 날 복도에 신책(神策)이라는 선사가 지나가고 있었는데, 나이는 60 여 세였다. 이들 오누이가 발[簾] 밖으로 그 노숙(老宿)을 보자 누이가 말했다.

  "저 노숙을 방으로 청해서 차를 대접해도 되겠소."

  동생이 얼른 나가서 노숙(老宿)을 청했더니, 노숙은 들어오지 않으려다가 그 스님의 간절한 청에 못 이겨 허락하였다.

  노숙이 방으로 들어오자, 여인이 나와 맞으면서 말했다.

  "제 동생이 노스님을 모시는 예의가 경솔한 것 같으나 허물치 마십시오."

  그리고는 노숙과 함께 자리를 마주하여 앉고, 동생도 앉으라 하여 세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던 끝에 노숙은 그 스님의 기상이 다른 사람들과 다름을 느

  

  끼고, 또 그 누이도 대장부의 기개가 있음을 느껴 그 스님에게 권했다.

  "부모와 형제에 효순하는 일도 한 가지 길이며 불법의 이치를 밝히기는 했으나 스승의 인가를 얻지 못했구나. 과거의 부처님들도 성인과 성인이 서로 전하시고 부처와 부처가 서로 인가하였으니 석가여래께서도 연등불의 수기(授記)를 받으셨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연히 퇴전된다. 남방에 큰 스승이 있으시니, 혜능(慧能) 선사이시다. 그리로 가서 예배하고 스승으로 섬기라."

  스님(영가)이 대답했다.

  "엊그제 어머니께서 별세하시고 홀로 있는 누이 하나뿐이어서 아무도 보살필 이가 없거늘 어찌 버리고 떠나겠습니까?"

  이 때 누이가 아우에게 말했다.

  "동생, 내 걱정은 말고 혼자 떠나시오. 나는 혼자 몸이지만 의지해 머무를 곳이 있을 터이니, 그저 떠나기만 하소."

  동생 스님은 이로부터 짐을 꾸려 놓고, 주지에게 가서 앞의 일을 자세히 이야기하니 주지가 말했다.

  "사형에게 그러한 선심이 있으시면 나도 몸소 가지는 못하지만 좋은 인연만은 함께 지읍시다. 사형은 마음놓고 떠나기만 하시고 누님은 걱정을 마시오. 나도 성격이 효순합니다. 그저 여기까지 불러다 주기나 하시오."

  그 스님이 주지의 분부대로 낱낱이 처리하고, 누이를 불러 주지의 방으로 데려다 주어 안배를 마치고는 떠나 버렸다.

  그 때 그 스님의 나이는 31세였다. 걷고 걸어 시흥현(始興縣) 조계산(曹溪山)에 이르니, 때마침 대사가 상당하여 있었다. 석장을 들고 올라가 선상을 세 번 돌고는 우뚝 서 있으니, 6조가 물었다.

  "대저 사문은 삼천위의(三千威儀)와 팔만세행(八萬細行)을 갖추어서 행과 행이 이지러짐이 없어야 사문이라 하는데, 대덕은 어디서 왔기에 도도히 아만(我慢)을 부리는가?"

  스님이 대답했다.

  "나고 죽음의 일이 크고, 무상함이 너무나 빠릅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남[生]이 없음을 체득해 본디 빠르지 않은 도리를 터득

  

  하지 않는가?"

  "체득에는 본래 남이 없고, 터득함에는 빠름이 없습니다."

  "그대는 남이 없는 뜻을 매우 잘 알고 있도다."

  "남이 없음에 어찌 뜻이 있겠습니까?"

  "뜻이 없다면 누가 분별할 수 있겠는가?"

"분별하는 것, 역시 뜻이 아닙니다."

  "그렇다. 옳은 말이다."

  이 때 천여 명의 대중이 모두 깜짝 놀랐다. 선사(영가)는 다시 동랑(東廊)으로 가서 석장을 걸어 놓고 위의를 갖추어 상당하여 정중히 절하고 잠자코 눈을 들어 두 눈이 마주치게 하고는 바로 나가, 곧장 승당(僧堂)으로 가서 대중을 찾아뵙고는 다시 올라와서 조사께 하직을 고하니, 조사가 말했다.

  "대덕은 어디서 왔기에 서둘러 돌아가는가?"

  선사가 대답했다.

  "본래 움직이지 않았거늘, 어찌 빠름이 있겠습니까?"

  "움직임이 아닌 줄을 누가 아느냐?"

  "스님 스스로가 분별을 냅니다."

  조사가 한 번에 뛰어내려 등을 어루만지면서 말했다.

  "장하다, 옳은 말이다. 손에 무기[武]를 들었구나. 하룻밤만 묵어가라."

  이튿날 조사에게 하직을 고하니 조사가 대중을 거느리고 그를 전송하는데, 그가 열 걸음쯤 걸어나와 석장을 세 차례 구르고 말했다.

  "조계를 한 차례 만난 뒤로는 생사와는 전혀 상관없음을 분명히 알았노라."

  선사가 본고장으로 돌아오니, 그의 소문은 먼저 와서 퍼져 있었으니, 부사의한 사람이라 하였다. 그에게 다녀간 이가 무수하며, 공양한 이가 하나 둘이 아니었다. 이로부터 있었던 그의 모든 노래와 게송은 모두가 그의 누이가 수집한 것이었다. 

  

  선사는 선천(先天) 2년 10월 17일에 입적하였으니, 춘추는 39세였다. 시호는 무상(無相) 대사라 하사되었고, 탑호(塔號)는 정광(淨光)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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