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간록(林間錄)

15. 임제스님의 삼현삼요와 「참동계」

通達無我法者 2008. 3. 12. 20:31

 

 

 

임제 의현(臨濟義玄: ?~867)스님은 말하였다.

   “대체로 불법을 거론할 때에는 모름지기 한 귀절[一句]에 ‘삼현(三玄)’*을 갖춰야 하고 일현(一玄)에 ‘삼요(三要)’를 갖춰야 한다.”

   현(玄)과 요(要)의 말씀을 여러 납자들은 까마득히 몰랐지만 분양 무덕(汾陽無德:947~1024, 汾陽善昭)스님만은 그 뜻을 깨닫고 게를 지어 밝혔다.

 

   ‘삼현’ ‘삼요’ 그 이치 알기 어려우니

   뜻 알고 말 잊어야 쉽사리 도와 가까워지리

   ‘일구’에 명명백백 삼라만상 포함하니

   구월구일 중양절에 국화가 새롭구나.

 

   三玄三要事難分    得旨忘言道易親

   一句明明該萬象    重陽九日菊花新

 

   그런데 임제종에서만 ‘삼현’을 즐겨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석두 희천(石頭希遷)스님의 「참동계(參同契)」에도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다.  「참동계」를 깊이 살펴보니, 다만 '현(玄)'자와 '요(要)'자를 '명(明)'자와 '암(暗)'자로 바꾸어 썼을 뿐 별 다를 바 없으며, 「참동계」의 문장은 40여 귀절에 불과하지만 ‘명(明)과 암(暗)’의 논지가 그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책 첫머리에 표방하기를,

 

   신령한 원천은 밝고[明] 깨끗한데

   여러 갈래 지류는 끝없이 어둡게[暗] 흐르도다.

 

   靈源明皎潔    枝派暗流注

 

하고서 이 뜻을 받아서

 

   어둠[暗]은 상(上)과 중(中)에 부합되고

   밝음[明]은 맑고 탁함을 밝인다.

 

   暗會上中言    明明淸濁句

 

하였다.   이것은 어둠도 반드시 상과 중으로 나누어야 하고, 밝음도 반드시 맑음과 탁함으로 밝혀야 한다는 뜻이니 ‘체중현(體中玄)’을 밝힘이다.

   또한 종지와 뜻을 나타낸 부분에서는

 

   근본과 지말은 반드시 종(宗)으로 돌아가야 하고

   높고 낮은 이들은 자기네 언어를 써야 한다.

 

   本末須貴宗    尊卑用其語

 

하였다.   그러므로 아래에서 ‘명(明)’과 ‘암(暗)’에 대한 ‘구(句)’를 계속해서 자세히 밝혔으니 이는 ‘구중현(句中玄)’을 밝힘이다.

   맨 끝부분에서

 

   참학하는 사람들이여

   부디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마오.

 

   謹白參玄人    光陰莫虛度

 

하였으니 수행자가 일상생활에서 시기를 잃지 않으면 참으로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라 한 것으로 이는 ‘의중현(意中玄)’에 해당한다.

   법안(法眼)스님은 여기에 주석을 붙였는데 모든 학인들은 그것을 높이 받들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 주석에서 삼법(三法)을 구분하지 않고 다만 ‘체중현(體中玄)’의 뜻만을 해석하여 석두스님의 본의를 상실한 점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이후주(李後主)는 ‘밝음 속에 어둠이 있다[明中有暗:「참동계」중의 한 구]’는 귀절의 주석인 “현황(玄黃:천지, 본체)이 참이 아닌데 흑백(黑白:일월, 작용)이 무슨 허물이 있겠나?” 한 대목을 읽다가 마침내 도를 깨쳤다 한다.   이는 ‘구중현(句中玄)’이 ‘체중현(體中玄)’임을 깨달은 것이다.

   안능엄(安楞嚴)스님이 「수능엄경」의 구두점을 버린 데에도 밝은 점[明處]이 있다 하겠으나 나는 납자들이 그의 뜻에 부화뇌동(附和雷同)하게 될까 두렵다.

   선문의 오묘한 종지에 대하여 오늘날 총림에서는 전혀 입을 벌리지 못하는데 큰스님들은 날로 떠나가시고, 후학 소생들만이 날마다 시끌벅쩍 떠들어댈 뿐 다시는 분명히 아는 사람이 없기에, 여기에 예전 큰스님들께서 가르쳐 주신 큰 법의 종지를 기록하여 뜻있는 후학을 기다리고자 한다.

   이 세상의 가르침의 체제는 소리[音聞]로 근기에 응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밝은 선지식은 말을 빌어 그 제자의 지혜[智用]을 튀워주는 법이다.   이렇듯 말로 말을 부정하고[因言遣言] 이치로 이치를 가려내나 오묘하고 밝은 마음은[妙精圓明] 한번도 끊어진 적이 없었다.   이를 ‘유주진여(流主眞如)’라 하며, 이는 분양스님이 말한 ‘일구에 명명백백 삼라만상을 포함한다[一句明明該萬象]’라는 뜻이다.

   이 이치를 깨달은 자는 신통하게 알지만, 그렇지 못하면 말끝[語下]에서 죽게 된다.   그러므로, 근기에 맞게 쓸 때면 모두 굴[窠臼]속에서 벗어나 그림자와 발자취에 얽매이지 않는다.   이것이 ‘말이 있는 가운데 말이 없는 것’으로서 분양스님이 말한 ‘구월구일 중양절에 국화가 새롭구나’라는 것이다.

   ‘삼현(三玄)’을 마련한 뜻은 본래 병을 없애려는 데 있으므로 법을 깨치려는 자는 그 뜻을 아는 것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뜻을 알면 쓸쓸하고 막힘이 없는 텅빈 곳에서 인연따라 자유자재 운용하리니 이를 ‘때를 잃지 않음이라’ 하며, 분양스님이 말한 ‘뜻 알고 말 잊어야 쉽사리 도와 가까워지리[得旨忘言道易親]’인 것이다.

   고탑주(古塔主:薦福承古, 雲居道膺의 塔에 살았다)는 이 도를 즐겨 강론하였다.   그러나 ‘삼현’을 논할 때는 말로써 전할 수 있었지만 ‘삼요’를 논할 때에는 말 없는 그것마저도 용납될 수 없었다.   ‘일현(一玄)’ 가운데 ‘삼요(三要)’가 갖춰져 있으니, ‘현’과 ‘요’의 도리를 스스로 깨친 자가 아니면 어찌 이를 거론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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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현(三玄) : 깨달아야 할 궁극적인 경지, 즉 본체를 체중현(體中玄), 그것을 깨우쳐 주기 위해 쓰는

   일전어(一轉語)를 구중현(句中玄), 살아 움직이는[活潑潑地] 경계로 앞서의 자취를 떨어내주는 것을

   의중현(意中玄, 또는 玄中玄)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