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문경훈(緇門警訓)

송문제집조재론불교 宋文帝集朝宰論佛敎

通達無我法者 2008. 3. 17. 18:20
 

 

 

 

 

송문제집조재론불교 宋文帝集朝宰論佛敎 

 

文帝, 卽宋.高祖第三子也. 聰睿英博, 雅稱「令達」. 在位三十年, 嘗以暇日, 從容而顧問侍中何尙之‧吏部羊玄保曰: 「朕, 少來讀經不多, 比日彌復無暇. 三世因果, 未辨措懷, 而復不敢立異者, 正以卿輩時秀, 率所敬信也. 范泰‧謝靈運常言: ????六經典文, 本在濟俗爲政.[1] 必求性靈眞奧, 豈得不以佛理爲指南耶????? 近見顔延之《折達性論》[2]‧宗炳《難白黑論》,[3] 深明佛法, 尤爲名理, 並足開獎人意. 若使率土之濱, 皆敦此化, 則朕坐致太平矣, 夫復何事?」 尙之對曰: 「悠悠之徒, 多不信法. 以臣庸弊, 更荷褒拂, 非所敢當之, 至如前代群英則不負明詔矣. 中朝[4]已遠, 難復盡知, 渡江以來, 則[5]王導‧周顗‧庾亮‧謝濛‧謝尙‧郄超‧王坦‧王恭‧王謐‧郭文擧‧謝敷‧戴逵‧許詢及亡高祖兄弟及王元琳昆季‧范汪‧孫綽‧張玄‧殷顗等, 或宰輔之冠盖, 或人倫之羽儀, 或置情天人之際, 或抗跡烟霞之表,[6] 並禀志歸依, 措心歸信. 其間比對, 則蘭‧護‧開‧潛‧深‧遁‧崇‧邃,[7] 皆亞迹黃中,[8] 或不測之人也. 慧遠法師嘗云: ????釋氏之化, 無所不可. 適道固自敎源, 濟俗亦爲要務.???? 竊尋此說, 有契理要. 若使家家奉戒, 則罪息刑淸, 陛下所謂坐致泰平, 誠如聖旨.」 羊玄保進曰: 「此談, 皆天人之際, 豈臣所宜預? 竊謂秦‧楚論强兵之事, 孫‧吳盡呑倂之術, 將無取於此也.」 帝曰: 「此非戰國之具, 良如卿言.」 尙之對曰: 「夫禮隱逸則戰士怠, 貴仁德則兵氣衰. 若以孫‧吳爲志, 苟在呑噬, 亦無取堯‧舜之道, 豈惟釋敎而已哉!」 帝曰: 「釋門有卿, 亦猶孔門之有季路, 所謂惡言不入於耳也.」 自是, 文帝致意佛經, 及見嚴‧觀諸僧,[9] 輒論道義, 屢延殿會, 躬御地筵, 同僧列飯. 時有沙門竺道生者, 秀其群品, 英義獨拔, 帝重之. 嘗述生頓悟義, 僧等皆設巨難, 帝曰: 「若使逝者可興, 豈爲諸卿所屈?」[10] 時, 顔延之著《離識論》, 帝命嚴法師, 辨其同異, 往返終日, 笑曰: 「卿等今日, 無愧支‧許之談也.」[11] 

문제는 송 고조의 셋째 아들이다. 총명하고 슬기로우며 영특하고 해박하여 ‘영달令達’이라 아칭雅稱되었다. 재위 30년 되는 해, 일찍이 한가한 날을 틈타 조용히 시중 하상지와 이부 양현보에게 의견을 물어 말하기를 「짐은 어려서부터 읽은 경전이 많지 않은데 근자에 더욱더 틈이 없도다. 삼세의 인과는 아직 분명히 하여 마음에 품어두지 못하고 있으나 다시 감히 이견을 세우지 않는 것은 바로 경과 같은 이 시대에 빼어난 인물들이 따르며 공경하고 믿는 바이기 때문이다. 범태와 사령운이 항상 말하기를 ????육경의 전적은 본디 세속을 구제하고 정치를 위하는데 그 뜻이 있습니다. 반드시 성품과 신령의 참되고 오묘함을 구하고자 하면 어찌 불교의 이치로써 지침을 삼지 않는 것입니까????? 하였다. 얼마 전에 안연지의《절달성론》과 종병의《난백흑론》을 보니 불법을 깊이 있게 밝혀 놓았는데 더욱이 명가의 이론이 됨직하여 아울러 사람들의 뜻을 족히 깨우쳐 장려할 만하였다. 만일 온 천하로 하여금 모두 이 교화에 돈독하게끔 한다면 곧 짐은 앉아서 태평에 이를 것이니 무릇 다시 무슨 일이 있겠는가?」 하였다. 

하상지가 대답하여 이르기를 「유유자적하는 무리들은 흔히 법도를 믿지 않습니다. 신의 용렬함과 피폐함으로써 다시 포양襃揚하고 보필함을 떠맡았으나 감히 감당할 바는 아니옵고, 만약 앞 시대의 군웅들이라면 곧 밝으신 조서를 저버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중조中朝는 이미 요원하여 모두 아는 것은 어렵습니다만 장강을 건너온 이래 곧 왕도 주의 유량 사몽 사상 극초 왕탄 왕공 왕밀 곽문거 사부 대규 허순 및 돌아가신 고조의 형제와 왕원림의 형 및 동생과 범왕 손작 장현 은의 등이 혹은 재상의 재목으로, 혹은 인륜의 의표로서, 혹은 뜻을 하늘사람의 영역에 두고, 혹은 노을 밖에 자취를 남겼으니, 모두가 뜻을 받들어 돌아가 의지하였고 마음을 두어 귀의하여 믿었습니다. 그 사이에 견주어 짝 할 수 있는 이들로는 곧 우법란과 축법호와 우법개와 축도잠 및 법심(→康僧淵)과 지둔과 축법숭과 우도수 등인데, 모두 행적이 황중黃中에 버금가며 혹은 예측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혜원법사가 일찍이 말하기를 ????석가의 교화는 가능하지 않은 바가 없습니다. 도에 나아감에 진실로 가르침의 근원으로부터 하며, 세속을 제도하는 일 역시 요긴하게 힘 쓸 일로 여기고 있습니다???? 하였는데 이 말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치의 요점과 계합하는 바가 있습니다. 만약 집집마다 계를 받들도록 한다면 곧 죄는 쉬어들고 형벌은 맑아질 것이니 폐하께서는 일컫는 바 처럼 앉아서 태평에 이르게 될 것이므로 진실로 성지聖旨와 같다 할 것입니다」 하였다. 

양현보가 나아가 이르기를 「이러한 얘기는 모두 하늘사람의 영역임에 어찌 신臣이 마땅히 간여할 바이겠습니까? 가만히 생각건대 진나라와 초나라는 군사를 강성하게 하는 일 만을 논의하였고 손자와 오자는 삼켜 아우르는 술책에만 진력을 다하였으니 아마도 여기에서는 취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제께서 말하기를 「이는 전쟁하는 나라의 도구가 아니니 참으로 경의 말과 같도다」 하였다. 

하상지가 대답하여 이르기를 「무릇 은둔자들을 예우하면 곧 전사들이 태만해지고 어짊과 덕을 귀하게 여기면 곧 병사들의 기운이 쇠퇴해진다 하였습니다. 만약 손자와 오자의 술책으로 뜻을 삼아 씹어 삼키는데 진력한다면 역시 요순의 도 또한 취할 것이 없거니와 어찌 한갓 석가의 가르침일 따름이겠습니까」 하니 제께서 말하기를 「석가의 문중에 경이 있음은 마치 공자의 문중에 계로가 있음과 같을지니, 소위 악한 말이란 것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하였다. 

이로부터 문제는 불경에 뜻을 두었으며, 혜엄과 혜관 등 모든 승려들을 보게 되자 번번이 도의 뜻을 논하였으며 누차 궁전에서의 모임을 베풀고는 몸소 바닥의 대자리로 나아가 승려와 같은 반열에서 공양하였다. 이 때 사문 축도생이란 자가 있어 그 무리 가운데에서 빼어나고 영명하며 의로와 홀로 특출하기에 제께서 그를 중히 여겼다. 일찍이 축도생의 돈오頓悟한 뜻을 찬술하였는데 승려들이 모두 크게 비난하거늘 제께서 말하기를 「만약 죽은 자를 다시 일어나게 할 수 있다면 어찌 여러 경들에게 굽힐 바가 되겠는가」 하였다. 이 때에 안연지가《이식론》을 지으니 제께서 엄법사에게 명하여 그 같고 다름을 가리게 하고는 종일토록 [문답이] 오가게 하고는 웃어 가로되 「경 등은 오늘에 지둔과 허순의 담론에 부끄러움이 없도다」 하였다. 

【1】句. 

【2】衡陽太守何承天與惠琳比狎, 著《達性論》, 詆訶釋敎, 永嘉太守顔延之作《折達性論》, 往復再三, 乃止. 

【3】沙門惠琳假服僧衣, 而毁其法, 著《白黑論》, 太子舍人宗少文信法者也, 作《難白黑論》以難之. 

【4】西晋. 

【5】劉聰滅兩晋入據洛陽, 司馬睿渡江而都建康, 故曰渡江. 

【6】《弘明集》具云: 「王‧周, 宰輔之冠盖; 庾‧謝, 人倫之羽儀; 郄及三王, 或號體絶, 或稱獨步; 郭‧謝‧戴‧許, 置情天人之際, 抗跡烟霞之表; 亡高祖兄弟, 以情識軌世; 王元琳昆季, 以才華冠朝. 其餘, 靡不時俊.」 

【7】蘭, 于法蘭, 高陽人, 道振三河, 名流四遠. 護, 竺法護. 開, 于法開, 蘭公從弟也, 善講諸經, 尤精醫術, 謝安‧王文度, 悉以友善. 潛, 竺道潛, 字法深, 理致深遠, 風鑑淸高. 深, 時有名法深者, 亦以「英俊」稱. 遁, 支遁, 字道林, 與謝太傳‧王右軍, 共結方外交. 崇, 法崇, 敏而好學, 又以「戒律」見稱. 邃, 道邃, 燉煌人, 風鑑淸高, 內外該博, 法護常稱: 「邃有古人風, 爲大法棟梁.」 

【8】《文言》云: 「君子黃中通理, 正位居體, 美在其中.」 

【9】慧嚴, 豫州.范氏子, 羅什法師門人; 慧觀, 淸河.崔氏子, 十歲以博見知名, 亦羅什門人. 

【10】按《通》載, 宋.文帝卽位九年, 法師道生著《頓悟成佛》等論, 明年正月, 隱几而化. 十二年, 帝詔求沙門能述生法師頓悟義者, 刺吏庾登之以法瑗‧僧弼等聞焉, 召對顧問, 瑗伸辨詳明, 尙之歎曰: 「意謂生公之後, 微言永絶, 今復聞象外之談, 所謂天未喪斯文也.」 

【11】支遁‧許詢共在會稽山, 每論道, 莫不歡欣. 

【1】글귀이다. 

【2】형양태수 하승천이 혜림과 더불어 어깨를 견주고 가까이 지내며《달성론》을 지어 석가의 가르침을 꾸짖어 나무라니, 영가태수 안연지가《절달성론》을 지어 두세 번 오가더니 이에 [하승천의 비방이] 그쳤다. 

【3】사문 혜림이 거짓으로 승복으로 입고 불법을 허물며《백흑론》을 지으니, 태자사인 종소문은 불법을 믿는 자였는데《난백흑론》을 지어 그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4】서진이다. 

【5】유총이 兩晋[→西晋]을 멸하고 낙양에 들어가 자리하자 사마예는 장강을 건너 건강에 도읍 하였던 까닭에 ‘강을 건넜다’고 말한 것이다. 

【6】《홍명집》에서 갖추어 일컫기를 「왕도와 주의는 재상의 재목이며, 유량과 사몽은 인륜의 의표이며, 극초와 왕탄‧왕공‧왕밀은 혹은 體絶이라 불려지고 혹은 獨步라 일컬어지며, 곽문거와 사부와 대규와 허순은 뜻을 하늘사람의 영역에 두고 노을 밖에 자취를 남겼으며, 돌아가신 고조의 형제는 情識으로써 세상에서 본보기가 되었으며, 왕원림의 형과 동생은 才華로써 조정에서 관직을 살았다. 그 나머지도 한 시기의 준재가 아님이 없다」 하였다. 

【7】蘭은 우법란으로 고양 사람인데 도력을 三河지역에 떨치니 이름이 사방의 먼 곳까지 퍼져 갔다. 護는 축법호이다. 開는 우법개로서 우법란의 사촌 아우인데 모든 경전을 잘 강론하였고 더욱이 의술에 정통하였으며 사안 및 왕문도 등이 모두 벗으로서 친하게 지냈다. 潛은 축도잠으로 자는 법심이며 이치가 심원하였고 기풍이 청아하고도 고상하였다. 深은 당시에 법심이라 이름하는 자가 있었으니, 역시 英俊하였다고 일컬어졌다. 遁은 지둔으로 자는 도림이며 사태부 및 왕우군과 더불어 세속의 테두리에서 벗어난 교류를 함께 맺고 있었다. 崇은 법숭으로 민첩하면서도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또한 戒律로써 일컬어지기도 하였다. 邃는 도수로서 돈황 사람인데 기풍이 청아하고도 고상하며 안팎으로 해박하여 법호가 항상 일컫기를 「도수는 옛사람의 기풍이 있어 큰 법의 동량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8】《주역》의 문언에서 말하였다. 「군자가 黃中으로 이치를 통달하고 올바른 자리가 그 몸에 있으니 아름다움이 그 가운데 있다.」 

【9】혜엄은 예주 범씨의 아들로서 구마라습법사의 문인이며, 혜관은 청하 최씨의 아들로서 10살 때 박식한 견해로 이름이 알려졌으며 역시 구마라습의 문인이다. 

【10】《통감》에 기재된 것에 의하면 송 문제 즉위 9년에 법사 도생이《돈오성불》등의 논서를 저술하더니 다음 해 정월에 안석에 의지한 채 임종하였다. 12년에 황제가 조서를 내려 사문 가운데 도생법사가 밝힌 돈오의 뜻을 능히 서술할 자를 찾았더니 자사 유등지가 법원과 승려 필 등을 거론하여 아뢰는지라 불러들여 질문을 해 보니 법원이 생각을 폄에 상세하고도 분명하여 상지가 찬탄하며 이르기를 「생각건대 도생법사 이후 미묘한 언어는 영영 단절되었으리라 여겼더니 이제 다시 뜻밖의 담론을 들으니 소위 하늘이 아직 이 글을 버리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리다」 하였다. 

【11】지둔과 허순이 함께 회계산에 있으며 매번 道를 논하면서 마음으로 기뻐하지 않음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