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해석분(解釋分) Interpretation
이미 입의분(立義分)을 설명하였으니 다음에는 해석분(解釋分)을 설명하겠다.
해석분에 세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셋인가?
첫째는 현시정의(顯示正義)요,
둘째는 대치사집(對治邪執)이며,
셋째는 분별발취도상(分別發趣道相)이다.
已說立義分,次說解釋分。解釋分有三種:云何為三?一者、顯示正義;二者、對治邪執;三者、分別發趣道相。
The part on outline has been given; next the part on interpretation of the principle of Mahayana will be given. It consists of three chapters: (1) Revelation of the True Meaning; (2) Correction of Evil Attachments; (3) Analysis of the Types of Aspiration for Enlightenment.
(1) 정의(正義)를 현시(顯示)함 Revelation of True Meaning
① 먼저 뜻을 풀이함
A.법장문(法章門)을 해석함 one Mind and Its Two Aspects
현시정의(顯示正義). 일심법(一心法)에 의하여 두 가지 문이 있으니, 무엇이 둘인가?
첫째는 심진여문(心眞如門)이요,
둘째는 심생멸문(心生滅門)이니,
이 두 가지 문이 모두 각각 일체의 법을 총괄하고 있다.
이 뜻이 무엇인가?
이 두 문이 서로 여의지 않기 때문이다.
顯示正義者,依一心法有二種門:云何為二?一者、心真如門,二者、心生滅門;是二種門,皆各總攝一切法。此義云何?以是二門不相離故。
The revelation of the true meaning of the principle of Mahayana can be achieved by unfolding the doctrine that the principle of one Mind has two aspects. one is the aspect of Mind in terms of the Absolute (tathata; Suchness), and the other is the aspect of Mind in terms of phenomena (samsara; birth and death). Each of these two aspects embraces all states of existence. Why? Because these two aspects are mutually inclusive.
a.진여문(眞如門) Mind in Terms of the Absolute
심진여(心眞如)란 바로 일법계(一法界)중의 대총상(大總相) 법문(法門)인 체(體)이니,
이른바 심성이 생기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지만 일체의 모든 법이 오직 망념(妄念)에 의하여 차별이 있으니,
만약 망념을 여의면 일체의 경계상(境界相)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일체의 법이 본래부터 언설상(言說相)을 여의었으며 명자상(名字相)을 여의었으며 심연상(心緣相)을 여의어서,
결국 평등하게 되고, 변하거나 달라지는 것도 없으며 파괴할 수도 없는 것이어서 오직 일심(一心)일 뿐인 것이니,
그러므로 진여라 이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체의 언설(言說)은 임시적인 이름일 뿐 실체가 없는 것이요,
다만 망념을 따른 것이어서 그 실체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진여라 말한 것도 상(相)이 없으니 이는 언설(言說)의 궁극은 말에 의하여 말을 버리는 것임을 이르는 것이다.
이 진여의 체는 버릴 만한 것이 없으니 일체의 법이 모두 다 참이기 때문이며,
또한 주장할 만한 것이 없으니 일체의 법이 모두 똑같기 때문이다.
그러니 일체의 법은 말할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기 때문에 진여라고 이름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心真如者,即是一法界大總相法門體,所謂:心性不生不滅。一切諸法,唯依妄念而有差別,若離心念,則無一切境界之相。是故一切法,從本已來,離言說相,離名字相,離心緣相,畢竟平等,無有變異,不可破壞。唯是一心,故名真如。以一切言說,假名無實,但隨妄念,不可得故;言真如者,亦無有相。謂言說之極,因言遣言,此真如體,無有可遣,以一切法悉皆真故。亦無可立,以一切法皆同如故。當知一切法不可說、不可念故,名為真如。
The Mind in terms of the Absolute is the one World of Reality (dharmadhatu) and the essence of all phases of existence in their totality. That which is called "the essential nature of the Mind" is unborn and is imperishable. It is only through illusions that all things come to be differentiated. If one is freed from illusions, then to him there will be no appearances (lakshana) of objects regarded as absolutely independent existences; therefore all things from the beginning transcend all forms of verbalization, description, and conceptualization and are, in the final analysis, undifferentiated, free from alteration, and indestructible. They are only of the one Mind; hence the name Suchness. All explanations by words are provisional and without validity, for they are merely used in accordance with illusions and are incapable of denoting Suchness. The term Suchness likewise has no attributes which can be verbally specified. The term Suchness is, so to speak, the limit of verbalization wherein a word is used to put an end to words. But the essence of Suchness itself cannot be put an end to, for all things in their Absolute aspect are real; nor is there anything which needs to be pointed out as real, for all things are equally in the state of Suchness. It should be understood that all things are incapable of being verbally explained or thought of; hence the name Suchness.
묻기를,
“만약 이와 같은 뜻이라면 모든 중생들이 어떻게 수순(隨順)하여야 정관(正觀)에 들어가게 될 수 있는가?”
답하기를,
“만약 일체의 법이 설명되기는 하나 설명할 수도, 설명할 만한 것도 없으며, 생각되기는 하나 역시 생각할 수도 생각할 만한 것도 없는 줄 안다면 이를 수순(隨順)이라고 하며, 만약 생각을 여읜다면 정관(正觀)에 들어가게 된다고 하는 것이다.”
問曰:若如是義者,諸眾生等,云何隨順,而能得入?答曰:若知一切法,雖說無有能說可說,雖念亦無能念可念,是名隨順。若離於念,名為得入。
Question: If such is the meaning of the principle of Mahayana, how is it possible for men to conform themselves to and enter into it? Answer: If they understand that, concerning all things, though they are spoken of, there is neither that which speaks, nor that which can be spoken of, and though they are thought of, there is neither that which thinks, nor that which can be thought of, then they are said to have conformed to it. And when they are freed from their thoughts, they are said to have entered into it.
다시 이 진여란 언설에 의하여 분별함에 있어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여실공(如實空)이니 필경에는 실체를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요,
둘째는 여실불공(如實不空)이니 그 자체에 번뇌 없는 본성의 공덕을 구족(具足)하고 있기 때문이다.
復次,此真如者,依言說分別,有二種義。云何為二?一者、如實空,以能究竟顯實故;二者、如實不空,以有自體具足無漏性功德故。
여실공(如實空) Truly Empty
공(空)이라고 말하는 것은 본래부터 일체의 염법(染法)과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니,
이는 일체법의 차별되는 모양을 여읨을 말한 것이다.
왜냐하면 허망(虛妄)한 심념(心念)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여의 자성(自性)은 모양이 있는 것도 아니요 모양이 없는 것도 아니며,
모양이 있지 않은 것도 아니요 모양이 없지 않은 것도 아니며,
유(有)․무(無)를 함께 갖춘 모양도 아닌 것을 알아야 하며,
또한 같은 모양도 아니요 다른 모양도 아니며,
같은 모양이 아닌 것도 아니요 다른 모양이 아닌 것도 아니며,
같고 다른 모양을 함께 갖춘 것도 아닌 것을 알아야 한다.
이리하여 전체적으로 말하자면 일체의 중생이 망심(妄心)이 있음으로 해서 생각할 때마다 분별하여 다 진여와 상응하지 않기 때문에 공(空)이라 말하지만,
만약 망심을 떠나면 실로 공이라 할 것도 없기 때문이다.
所言空者,從本已來,一切染法不相應故。謂離一切法差別之相,以無虛妄心念故。當知真如自性,非有相,非無相,非非有相,非非無相,非有無俱相、非一相,非異相,非非一相,非非異相,非一異俱相。乃至總說,依一切眾生,以有妄心,念念分別,皆不相應,故說為空。若離妄心,實無可空故。
Suchness is empty because from the beginning it has never been related to any defiled states of existence, it is free from all marks of individual distinction of things, and it has nothing to do with thoughts conceived by a deluded mind. It should be understood that the essential nature of Suchness is neither with marks nor without marks; neither not with marks nor not without marks; nor is it both with and without marks simultaneously; it is neither with a single mark nor with different marks; neither not with a single mark nor not with different marks; nor is it both with a single and with different marks simultaneously. In short, since all unenlightened men discriminate with their deluded minds from moment to moment, they are alienated from Suchness; hence, the definition "empty"; but once they are free from their deluded minds, they will find that there is nothing to be negated.
불여실공(不如實空) Truly Nonempty
불공(不空)이라 말하는 것은 이미 법체가 공(空)하여 허망함이 없음을 나타냈기 때문에 바로 이는 진심(眞心)이며,
이 진심은 항상하여 변하지 않고 정법(淨法)이 만족하기 때문에 불공(不空)이라 이름한다.
그러나 또한 취할만한 상(相)이 없으니,
망념을 여읜 경계는 오직 증득함으로써만 상응하기 때문이다.
所言不空者,已顯法體空無妄故,即是真心;常恆不變,淨法滿足,則名不空。亦無有相可取,以離念境界,唯證相應故。
Since it has been made clear that the essence of all things is empty, i.e., devoid of illusions, the true Mind is eternal, permanent, immutable, pure, and self-sufficient; therefore, it is called "nonempty". And also there is no trace of particular marks to be noted in it, as it is the sphere that transcends thoughts and is in harmony with enlightenment alone.
b.생멸문(生滅門) The Mind in Terms of Phenomena
가. 널리 풀이함
ㄱ)심생멸(心生滅) The Storehouse Consciousness
심생멸(心生滅)이란 여래장에 의하므로 생멸심이 있는 것이니,
이른바 불생불멸(不生不滅)이 생멸과 더불어 화합하여,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닌 것을 이름하여 아라야식(阿藜耶識)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식(識)에 두 가지 뜻이 있어서 일체법을 포괄하며, 일체법을 낼 수 있는 것이다.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각(覺)의 뜻이고, 둘째는 불각(不覺)의 뜻이다.
心生滅者,依如來藏,故有生滅心。所謂不生不滅,與生滅和合,非一非異,名為阿梨耶識。此識有二種義,能攝一切法,生一切法。云何為二?一者、覺義,二者、不覺義。
The Mind as phenomena (samsara) is grounded on the Tathagata-garbha. What is called the Storehouse Consciousness is that in which "neither birth nor death (nirvana)" diffuses harmoniously with "birth and death (samsara)", and yet in which both are neither identical nor different. This Consciousness has two aspects which embrace all states of existence and create all states of existence. They are: (a) the aspect of enlightenment, and (b) the aspect of nonenlightenment.
* 각의(覺義) The Aspect of Enlightenment
각(覺)의 뜻이라고 하는 것은 심체(心體)가 망념을 여읜 것을 말함이니,
망념을 여읜 상(相)이란 허공계(虛空界)와 같아서 두루하지 않는 바가 없어 법계일상(法界一相)이며 바로 여래의 평등한 법신이니,
이 법신에 의하여 본각(本覺)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어째서인가?
본각의 뜻이란 시각(始覺)의 뜻에 대하여 말한 것이니 시각이란 바로 본각과 같기 때문이며,
시각의 뜻은 본각에 의하기 때문에 불각(不覺)이 있으며 불각에 의하므로 시각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所言覺義者,謂心體離念。離念相者,等虛空界,無所不遍,法界一相;即是如來平等法身。依此法身,說名本覺。何以故?本覺義者,對始覺義說。以始覺者,即同本覺。始覺義者,依本覺故,而有不覺,依不覺故,說有始覺。
The essence of Mind is free from thoughts. The characteristic of that which is free from thoughts is analogous to that of the sphere of empty space that pervades everywhere. The one without any second, i.e. the absolute aspect of the World of Reality (dharmadhatu) is none other than the undifferentiated Dharmakaya, the "Essence-body" of the Tathagata. Since the essence of Mind is grounded on the Dharmakaya, it is to be called the original enlightenment. Why? Because "original enlightenment" indicates the essence of Mind (a priori) in contradistinction to the essence of Mind in the process of actualization of enlightenment; the process of actualization of enlightenment is none other than the process of integrating the identity with the original enlightenment. Grounded on the original enlightenment is nonenlightenment. And because of nonenlightenment, the process of actualization of enlightenment can be spoken of.
또 심원(心源)을 깨달았기 때문에 구경각(究竟覺)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며,
심원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구경각이 아닌 것이다.
又以覺心源故,名究竟覺;不覺心源故,非究竟覺。
Now, to be fully enlightened to the fountainhead of Mind is called the final enlightenment; and not to be enlightened to the fountainhead of Mind, nonfinal enlightenment.
이 뜻이 무엇인가?
범부 정도의 사람은 먼저의 생각에 악이 일어난 것을 알기 때문에 뒤에 일어나는 생각을 그치게 하여 그 악의 생각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니,
이는 또한 각(覺)이라고 이름을 붙이지만 바로 불각(不覺)이기 때문이다.
이승(二乘)의 관지(觀智)와 초발의보살(初發意菩薩)등 정도의 사람은 생각의 이상(異相)을 깨달아 생각에 이상(異相)이 없으니,
이는 추분별집착상(麤分別執着相)을 버렸기 때문이며,
따라서 상사각(相似覺)이라 이름한다.
법신보살(法身菩薩)등 정도의 사람은 생각의 주상(住相)을 깨달아 생각에 주상이 없으니,
이는 분별추념상(分別麤念相)을 여의었기 때문이며,
따라서 수분각(隨分覺)이라 이름한다.
보살지(菩薩地)가 다한 정도의 사람은 방편을 만족시켜서 일념(一念)이 상응하고 마음이 처음 일어나는 상(相)을 깨달아 마음에 초상(初相)이 없으니,
이는 미세념(微細念)을 멀리 여의었기 때문이며,
심성(心性)을 보게 되어 마음이 곧 상주하니,
이를 구경각(究竟覺)이라고 이름한다.
그러므로 경에서 ‘만약 어떤 중생이 무념(無念)을 볼 수 있다면 곧 불지(佛智)에 향함이 된다’고 말하였다.
此義云何?如凡夫人,覺知前念起惡故,能止後念令其不起。雖復名覺,即是不覺故。如二乘觀智,初發意菩薩等,覺於念異,念無異相。以捨麤分別執著相故,名相似覺。如法身菩薩等,覺於念住,念無住相。以離分別麤念相故,名隨分覺。如菩薩地盡,滿足方便,一念相應,覺心初起,心無初相。以遠離微細念故,得見心性,心即常住,名究竟覺。是故修多羅說:若有眾生能觀無念者,則為向佛智故。
What is the meaning of this? An ordinary man becomes aware that his former thoughts were wrong; then he is able to stop (nirodha) such thoughts from arising again. Although this sometimes may also be called enlightenment, properly it is not enlightenment at all because it is not enlightenment that reaches the fountainhead of Mind. The followers of Hinayana, who have some insight, and those Bodhisattvas who have just been initiated become aware of the changing state (anyathatva) of thoughts and are free from thoughts which are subject to change [such as the existence of a permanent self (atman), etc.]. Since they have forsaken the rudimentary attachments derived from unwarranted speculation (vikalpa), their experience is called enlightenment in appearance. Bodhisattvas who have come to the realization of Dharmakaya become aware of the temporarily abiding state (sthiti) of thoughts and are not arrested by them. Since they are free from their rudimentary false thoughts derived from the speculation that the components of the world are real, their experience is called approximate enlightenment. Those Bodhisattvas who have completed the stages of a Bodhisattva and who have fulfilled the expedient means needed to bring forth the original enlightenment to the fullest extent will experience the oneness with Suchness in an instant; they will become aware of how the inceptions of the deluded thoughts of the mind arise (jati), and will be free from the rise of any deluded thought. Since they are far away even from subtle deluded thoughts, they are able to have an insight into the original nature of Mind. The realization that Mind is eternal is called the final enlightenment. It is, therefore, said in a sutra that if there is a man who is able to perceive that which is beyond thoughts he is advancing toward the Buddha wisdom.
시각(始覺)과 본각(本覺)의 관계
또 마음이 일어난다는 것은 알 만한 초상(初相)이 없는 것이며,
그런데도 초상을 안다고 하는 것은 곧 무념(無念)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므로 일체 중생을 깨달았다고 이름하지 못하는 것은 본래부터 염념이 상속하여 아직 망념을 떠나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니,
이를 무시무명(無始無明)이라 하는 것이다.
만약 망념이 없게 되면 심상(心相)의 생주이멸을 알게 되니 무념(無念)과 같아지기 때문이며 실로 시각의 차별이 없어지게 되니,
왜냐하면 사상(四相)이 동시에 있어서 모두 자립함이 없으며 본래 평등하여 각(覺)과 같기 때문이다.
又心起者,無有初相可知,而言知初相者,即謂無念。是故一切眾生,不名為覺。以從本來念念相續,未曾離念,故說無始無明。若得無念者,則知心相生、住、異、滅;以無念等故,而實無有始覺之異。以四相俱時而有,皆無自立,本來平等,同一覺故。
Though it is said that there is an inception of the rising of deluded thoughts in the mind, there is no inception as such that can be known as being independent of the essence of Mind. And yet to say that the inception of the rising of deluded thoughts is known means that it is known as existing on the ground of that which is beyond thoughts [i.e., the essence of Mind]. Accordingly, all ordinary people are said not to be enlightened because they have had a continuous stream of deluded thoughts and have never been freed from their thoughts; therefore, they are said to be in a beginningless ignorance. If a man gains insight into that which is free from thoughts, then he knows how those thoughts which characterize the mind [i.e., deluded thoughts] arise, abide, change, and cease to be, for he is identical with that which is free from thoughts. But, in reality, no difference exists in the process of the actualization of enlightenment, because the four states [of arising, abiding, etc.] exist simultaneously and each of them is not self-existent; they are originally of one and the same enlightenment [in that they are taking place on the ground of original enlightenment, as its phenomenal aspects].
또한 본각이 염(染)을 따라 분별하여 두 가지의 상(相)을 내지만,
저 본각과 서로 버리거나 여의지 아니하니,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지정상(智淨相)이고,
둘째는 부사의업상(不思議業相)이다.
復次,本覺隨染分別,生二種相,與彼本覺不相捨離。云何為二?一者、智淨相,二者、不思議業相。
And, again, original enlightenment, when analyzed in relation to the defiled state [in the phenomenal order], presents itself as having two attributes. one is the "Purity of Wisdom" and the other is the "Suprarational Functions".
지정상(智淨相) Purity of Wisdom
지정상이 법력의 훈습에 의하여 여실히 수행하여 방편을 만족하기 때문에 화합식상(和合識相)을 깨뜨리고 상속심상(相續心相)을 없애어 법신을 현현(顯現)하여 지혜가 맑고 깨끗하게 됨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 뜻이 무엇인가?
모든 심식(心識)의 상이 다 무명이니, 무명의 상이 본각의 성질을 여의지 않아서 파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파괴할 수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큰 바다의 물이 바람에 의하여 물결이 움직일 때, 물의 모양과 바람의 모양이 서로 떨어지지 않지만,
물은 움직이는 성질이 아닌지라 만일 바람이 그쳐서 없어지면 움직이는 모양(곧 물결)은 곧 없어지나 물의 젖는 성질은 없어지지 않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중생의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도 무명의 바람에 의하여 움직일 때 마음과 무명이 모두 형상이 없어서 서로 떨어지지 않지만,
마음은 움직이는 성질이 아닌지라 만일 무명이 없어지면 상속하는 것이 곧 없어지나 지혜의 본성은 없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智淨相者,謂依法力熏習,如實修行,滿足方便故。破和合識相,滅相續心相,顯現法身,智淳淨故。此義云何?以一切心識之相,皆是無明。無明之相,不離覺性,非可壞,非不可壞;如大海水,因風波動,水相風相,不相捨離,而水非動性;若風止滅,動相則滅,濕性不壞故。如是眾生自性清淨心,因無明風動,心與無明,俱無形相,不相捨離,而心非動性;若無明滅,相續則滅,智性不壞故。
By virtue of the permeation (vasana, perfuming) of the influence of dharma [i.e., the essence of Mind or original enlightenment], a man comes to truly discipline himself and fulfills all expedient means of unfolding enlightenment; as a result, he breaks through the compound consciousness [i.e., the Storehouse Consciousness that contains both enlightenment and nonenlightenment], puts an end to the manifestation of the stream of deluded mind, and manifests the Dharmakaya [i.e., the essence of Mind], for his wisdom (prajna) becomes genuine and pure. What is the meaning of this? All modes (lakshana) of mind and consciousness under the state of nonenlightenment are the products of ignorance. Ignorance does not exist apart from enlightenment; therefore, it cannot be destroyed [because one cannot destroy something which does not really exist], and yet it cannot not be destroyed [insofar as it remains]. This is like the relationship that exists between the water of the ocean [i.e., enlightenment] and its waves [i.e., modes of mind] stirred by the wind [i.e., ignorance]. Water and wind are inseparable; but water is not mobile by nature, and if the wind stops the movement ceases. But the wet nature remains undestroyed. Likewise, man's Mind, pure in its own nature, is stirred by the wind of ignorance. Both Mind and ignorance have no particular forms of their own and they are inseparable. Yet Mind is not mobile by nature, and if ignorance ceases, then the continuity of deluded activities ceases. But the essential nature of wisdom [i.e., the essence of Mind, like the wet nature of the water] remains undestroyed.
부사의업상(不思議業相) Suprarational Functions
부사의업상(不思議業相)이란 것은 지혜가 맑아짐에 의하여 모든 뛰어난 경계를 짓는 것이니 이른바 무량한 공덕의 상이 항상 끊어짐이 없어서,
중생의 근기에 따라 자연히 상응하여 여러 가지로 나타나서 이익을 얻게 하기 때문이다.
不思議業相者,以依智淨,能作一切勝妙境界:所謂無量功德之相,常無斷絕。隨眾生根,自然相應,種種而現,得利益故。
He who has fully uncovered the original enlightenment is capable of creating all manner of excellent conditions because his wisdom is pure. The manifestation of his numberless excellent qualities is incessant; accommodating himself to the capacity of other men he responds spontaneously, reveals himself in manifold ways, and benefits them.
각체상(覺體相) The Characteristics of the Essence of Enlightenment
다음에 각체상(覺體相 : 성정본각의 체가 지니는 상)이란 것은 네 가지의 큰 뜻이 있어서 허공과 같으며, 이는 마치 맑은 거울과도 같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여실공경(如實空鏡)이니,
모든 마음의 경계상을 멀리 여의어서 나타낼 만한 법이 없는지라 각조(覺照)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는 인훈습경(因熏習鏡)이니,
여실불공(如實不空)을 말한다.
일체 세간의 경계가 모두 그 가운데 나타나되 나오지도 않고 들어가지도 아니하며,
잃지도 않고 깨지지도 않아서 일심에 항상 머무르니,
이는 일체법이 곧 진실성이기 때문이며,
또 일체의 염법이 더럽힐 수 없으니 지체(智體)는 움직이지 아니하여 무루(無漏)를 구족하여서 중생을 훈습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법출리경(法出離鏡)이니,
불공법이 번뇌애와 지애를 벗어나고 화합상을 여의어서 깨끗하고 맑고 밝게 되기 때문이다.
네 번째는 연훈습경(緣熏習鏡)이니,
법출리(法出離)에 의하기 때문에 중생의 마음을 두루 비추어서 선근(善根)을 닦도록 하여 (중생의) 생각에 따라 나타내기 때문이다.
復次,覺體相者,有四種大義,與虛空等,猶如淨鏡。云何為四?一者、如實空鏡,遠離一切心境界相,無法可現,非覺照義故。二者、因熏習鏡:謂如實不空。一切世間境界,悉於中現,不出不入,不失不壞,常住一心,以一切法,即真實性故。又一切染法,所不能染,智體不動,具足無漏,熏眾生故。三者、法出離鏡,謂不空法,出煩惱礙、智礙。離和合相,淳淨明故。四者、緣熏習鏡,謂依法出離故,遍照眾生之心,令修善根,隨念示現故。
The characteristics of the essence of enlightenment have four great significances that are identical with those of empty space or that are analogous to those of a bright mirror. First, the essence of enlightenment is like a mirror which is really empty of images. It is free from all marks of objects of the mind and it has nothing to reveal in itself, for it does not reflect any images. Second, it is like a mirror influencing (vasana) all men to advance toward enlightenment. That is to say, it is truly nonempty; appearing in it are all the objects of the world which neither go out nor come in; which are neither lost nor destroyed. It is eternally abiding one Mind. All things appear in it because all things are real. And none of the defiled things are able to defile it, for the essence of wisdom [i.e., original enlightenment] is unaffected by defilements, being furnished with an unsoiled quality and influencing all men to advance toward enlightenment. Third, it is like a mirror which is free from defiled objects reflected in it. This can be said because the nonempty state [of original enlightenment] is genuine, pure, and bright, being free from hindrances both affectional and intellectual, and transcending characteristics of that which is compounded [i.e., the Storehouse Consciousness]. Fourth, it is like a mirror influencing a man to cultivate his capacity for goodness, serving as a coordinating cause to encourage him in his endeavors. Because the essence of enlightenment is free from defiled objects, it universally illumines the mind of man and induces him to cultivate his capacity for goodness, presenting itself in accordance with his desires [as a mirror presents his appearance].
* 불각의(不覺義) The Aspect of Nonenlightenment
불각의 뜻이라고 말한 것은,
진여법이 하나임을 여실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불각의 마음이 일어나서 그 망념이 있게 된 것을 이른 것이다.
그러나 망념은 자상(自相)이 없어서 본각을 여의지 않았으니,
마치 방향을 잃은 사람이 방향에 의하기 때문에 혼미하게 되었으나,
만약 방향을 여읜다면 혼미함이 없어지는 것과 같다.
중생도 그와 같아서 각(覺)에 의하기 때문에 혼미하게 되었으나,
만약 각의 성질을 여읜다면 불각이 없을 것이며,
불각의 망상심이 있기 때문에 명의(名義)를 알아서 진각(眞覺)이라고 말하는 것이니,
만약 불각의 마음을 여읜다면 진각의 자상이라고 말할 만한 것도 없는 것이다.
所言不覺義者,謂不如實知真如法一故,不覺心起而有其念;念無自相,不離本覺。猶如迷人,依方故迷;若離於方,則無有迷。眾生亦爾,依覺故迷;若離覺性,則無不覺。以有不覺妄想心故,能知名義,為說真覺;若離不覺之心,則無真覺自相可說。
Because of not truly realizing oneness with Suchness, there emerges an unenlightened mind and consequently, its thoughts. These thoughts do not have any validity to be substantiated; therefore, they are not independent of the original enlightenment. It is like the case of a man who has lost his way: he is confused because of his wrong sense of direction. If he is freed from the notion of direction altogether, then there will be no such thing as going astray. It is the same with men: because of the notion of enlightenment, they are confused. But if they are freed from the fixed notion of enlightenment, then there will be no such thing as nonenlightenment. Because there are men of unenlightened, deluded mind, for them we speak of true enlightenment, knowing well what this relative term stands for. Independent of the unenlightened mind, there are no independent marks of true enlightenment itself that can be discussed.
다시 불각에 의하기 때문에 세 가지의 상이 생겨서 저 불각과 더불어 상응하여 여의지 않으니,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무명업상이니,
불각에 의하기 때문에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업(業)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깨달으면 움직이지 않으며 움직이면 고통이 있게 되니,
결과가 원인을 여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능견상(能見相)이니,
움직임에 의하기 때문에 볼 수 있게 된 것이니,
움직이지 않는다면 볼 것이 없을 것이다.
세 번째는 경계상(境界相)이니,
능견에 의하기 때문에 경계가 거짓되이 나타나는 것이니 견(見)을 여읜다면 경계가 없어질 것이다.
復次,依不覺故生三種相,與彼不覺相應不離。云何為三?一者、無明業相,以依不覺故心動,說名為業;覺則不動,動則有苦,果不離因故。二者、能見相,以依動故能見,不動則無見。三者、境界相,以依能見故境界妄現,離見則無境界。
Because of its nonenlightened state, the deluded mind produces three aspects which are bound to nonenlightenment and are inseparable from it. First is the activity of ignorance. The agitation of mind because of its nonenlightened state is called activity. When enlightened, it is unagitated. When it is agitated, anxiety (dukkha) follows, for the result [anxiety] is not independent of the cause [the agitation contingent upon ignorance]. Second is the perceiving subject. Because of the agitation that breaks the original unity with Suchness, there appears the perceiving subject. When unagitated, the mind is free from perceiving. Third is the world of objects. Because of the perceiving subject, the world of objects erroneously appears. Apart from the perceiving, there will be no world of objects.
경계의 연(緣)이 있기 때문에 다시 여섯 가지의 상을 내는 것이니,
무엇이 여섯 가지인가?
첫째는 지상(智相)이니,
경계에 의하여 마음이 일어나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음을 분별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상속상(相續相)이니,
지상에 의하기 때문에 그 고락을 내어서 각심(覺心)으로 망념을 일으켜 상응하여 끊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는 집취상(執取相)이니,
상속에 의하여 경계를 반연하여 생각해서 고락에 주지(住持)하여 마음이 집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넷째는 계명자상(計名字相)이니,
잘못된 집착에 의하여 거짓된 명칭과 언설의 상을 분별하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는 기업상(起業相)이니,
명자(名字)에 의하여 이름을 따라가면서 집착하여 여러 가지의 행동을 짓기 때문이다.
여섯 번째는 업계고상(業繫苦相)이니,
업에 의하여 과보를 받아서 자재(自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以有境界緣故,復生六種相。云何為六?一者、智相,依於境界,心起分別,愛與不愛故。二者、相續相,依於智故,生其苦樂,覺心起念,相應不斷故。三者、執取相,依於相續,緣念境界,住持苦樂,心起著故。四者、計名字相,依於妄執,分別假名言相故。五者、起業相,依於名字,尋名取著,造種種業故。六者、業繫苦相,以依業受果,不自在故。
Conditioned by the incorrectly conceived world of objects, the deluded mind produces six aspects. First is the aspect of the discriminating intellect. Depending on the erroneously conceived world of objects, the mind develops the discrimination between liking and disliking. Second is the aspect of continuity. By virtue of the discriminating function of the intellect, the mind produces an awareness of pleasure and pain with regard to things in the world of objects. The mind, developing deluded thoughts and being bound to them, will continue uninterrupted. Third is the aspect of attachment. Because of the continuity of deluded thoughts, the mind, superimposing its deluded thoughts on the world of objects and holding fast to the discriminations of liking and disliking develops attachments to what it likes. Fourth is the aspect of the speculation (vikalpa) on names and letters [i.e., concepts]. on the basis of erroneous attachments, the deluded mind analyzes words which are provisional and therefore devoid of reality. Fifth is the aspect of giving rise to evil karma. Relying on names and letters [i.e., concepts which have no validity, the deluded mind] investigates names and words and becomes attached to them, and creates manifold types of evil karma. Sixth is the aspect of anxiety attached to the effects of evil karma. Because of the law of karma, the deluded mind suffers the effects and will not be free.
무명이 모든 염법을 내고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하니,
왜냐하면 모든 염법은 다 불각상(不覺相)이기 때문이다.
當知無明能生一切染法,以一切染法,皆是不覺相故。
It should be understood that ignorance is able to produce all types of defiled states; all defiled states are aspects of nonenlightenment.
각(覺)과 불각(不覺)의 같음과 다름 The Relationships between Enlightenment and Nonenlightenment
다시 각과 불각이 두 가지의 상이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동상(同相)이고,
둘째는 이상(異相)이다.
復次,覺與不覺有二種相。云何為二?一者、同相,二者、異相。
Two relationships exist between the enlightened and nonenlightened states. They are "identity" and "nonidentity".
동상(同相) Identity
동상(同相)이라고 말한 것은 비유하자면 여러 가지의 와기(瓦器)가 모두 똑같은 미진(微塵)의 성상(性相)인 것처럼 무루(無漏)와 무명(無明)의 여러 가지 업환(業幻)도 다 똑같은 진여의 성상인 것이다.
이러므로 경 가운데 이 진여의 뜻에 의하기 때문에 ‘일체의 중생은 본래 열반․보리의 법에 상주하여 들어가 있는 것이니,
이는 닦을 수 있는 상이 아니며 지을 수 있는 상이 아닌지라 끝내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색상(色相)을 볼 만한 것이 없으되 색상을 봄이 있는 것은, 오직 염법의 업환(業幻)에 따라 지은 것이지 지색불공(智色不空)의 성질은 아니니 지상(智相)은 볼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다.
言同相者,譬如種種瓦器,皆同微塵性相。如是無漏無明種種業幻,皆同真如性相。是故修多羅中,依於此真如義故,說一切眾生,本來常住,入於涅槃。菩提之法,非可修相,非可作相,畢竟無得。亦無色相可見,而有見色相者,唯是隨染業幻所作,非是智色不空之性,以智相無可見故。
Just as pieces of various kinds of pottery are of the same nature in that they are made of clay, so the various magic-like manifestations (maya) of both enlightenment (anasrava: nondefilement) and nonenlightenment (avidya: ignorance) are aspects of the same essence, Suchness. For this reason, it is said in a sutra that "all sentient beings intrinsically abide in eternity and are entered into nirvana. The state of enlightenment is not something that is to be acquired by practice or to be created. In the end, it is unobtainable [for it is given from the beginning]." Also it has no corporeal aspect that can be perceived as such. Any corporeal aspects [such as the marks of the Buddha] that are visible are magic-like products of Suchness manifested in accordance with the mentality of men in defilement. It is not, however, that these corporeal aspects which result from the suprarational functions of wisdom are of the nature of nonemptiness [i.e., substantial]; for wisdom has no aspects that can be perceived.
이상(異相) Nonidentity
이상(異相)이라고 말한 것은 여러 가지의 와기(瓦器)가 각기 동일하지 않은 것처럼 이와 같이 무루와 무명이 수염환(隨染幻)의 차별이며 성염환(性染幻)의 차별이기 때문이다.
言異相者,如種種瓦器,各各不同。如是無漏無明,隨染幻差別,性染幻差別故。
Just as various pieces of pottery differ from each other, so differences exist between the state of enlightenment and that of nonenlightenment, and between the magic-like manifestations of Suchness manifested in accordance with the mentality of men in defilement, and those of men of ignorance who are defiled [i.e., blinded] as to the essential nature of Suchness.
ㄴ)생멸인연(生滅因緣) The Cause and Conditions of Man's Being in Samsara
다음 생멸인연이라는 것은, 이른바 중생이 마음에 의하여 의와 의식이 전변하기 때문이다.
이 뜻이 무엇인가?
아라야식에 의하여 무명이 있다고 말하니,
불각하여 일어나서 볼 수 있고 나타낼 수 있으며 경계를 취할 수 있어서,
망념을 일으켜 서로 이어지기 때문에 ‘의(意)’라고 말하였다.
復次,生滅因緣者,所謂眾生依心、意、意識轉故。此義云何?以依阿梨耶識,說有無明,不覺而起,能見,能現,能取境界,起念相續,故說為意。
That a man is in samsara (birth and death) results from the fact that his mind (manas) and consciousness (vijnana) develop on the ground of the Storehouse Consciousness (citta). This means that because of the aspect of nonenlightenment of the Storehouse Consciousness, he is said to be in possession of ignorance [and thus is bound to remain in samsara]. The mentality which emerges in the state of nonenlightenment, which incorrectly perceives and reproduces the world of objects and, conceiving that the reproduced world of objects is real, continues to develop deluded thoughts, is what we define as mind.
의(意) Mind
이 의는 다시 다섯 가지의 이름이 있으니,
무엇이 다섯인가?
첫째는 업식이라고 이름하니,
무명의 힘으로 불각하여 마음이 움직이기 때문이니 이를 말한 것이다.
둘째는 전식이라고 이름하니,
움직여진 마음에 의하여 능히 볼 수 있는 상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현식이라고 이름하니,
이른바 일체의 경계를 나타냄이 마치 밝은 거울이 물체의 형상을 나타내는 것과 같으니,
현식도 그러하여 그 오진(五塵)을 따라서 대상이 이르면 곧 나타내어서 앞뒤가 없다.
왜냐하면 언제든지 임의로 일어나서 항상 앞에 있기 때문이다.
넷째는 지식(智識)이라고 이름하니,
염법과 정법을 분별함을 말하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상속식이라고 이름하니,
망념이 상응하여 끊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 한량없는 기간의 선악의 업을 간직하여 잃어버리지 않게 하기 때문이며,
또 현재와 미래의 고락 등의 과보를 성숙시켜 어긋남이 없게 하기 때문에 현재 이미 지나간 일을 문득 생각하고 미래의 일을 자신도 모르게 잘못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므로 삼계(三界)는 거짓된 것이요 오직 마음이 지은 것이니,
마음을 여의면 육진의 경계가 없어지는 것이다.
이 뜻이 무엇인가?
일체법이 모두 마음으로부터 일어나 잘못 생각하여 생긴 것이어서 일체의 분별은 곧 자심(自心)을 분별하는 것이니,
마음은 마음을 보지 못하여 얻을 만한 상(相)이 없기 때문이다.
세간의 모든 경계는 다 중생의 무명망심에 의하여 머물러 있게 되니,
이러므로 일체법은 거울 가운데의 형상과 같아서 얻을 만한 실체가 없고,
오직 마음일 뿐 허망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마음이 생기면 갖가지의 법이 생기고 마음이 없어지면 갖가지의 법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此意復有五種名:云何為五?一者、名為業識,謂無明力,不覺心動故。二者、名為轉識,依於動心能見相故。三者、名為現識,所謂能現一切境界,猶如明鏡現於色像;現識亦爾,隨其五塵對至即現,無有前後,以一切時,任運而起,常在前故。四者、名為智識,謂分別染淨法故。五者、名為相續識,以念相應不斷故;住持過去無量世等善惡之業,令不失故;復能成熟現在未來苦樂等報,無差違故。能令現在已經之事,忽然而念;未來之事,不覺妄慮。是故三界虛偽,唯心所作,離心則無六塵境界。此義云何?以一切法皆從心起,妄念而生。一切分別,即分別自心,心不見心,無相可得。當知世間一切境界,皆依眾生無明妄心而得住持。是故一切法,如鏡中像,無體可得。唯心虛妄:以心生則種種法生,心滅則種種法滅故。
The mind has five different names. The first is called the "activating mind", for, without being aware of it, it breaks the equilibrium of mind by the force of ignorance. The second is called the "evolving mind", for it emerges contingent upon the agitated mind as the subject that perceives incorrectly. The third is called the "reproducing mind", for it reproduces the entire world of objects as a bright mirror reproduces all material images. When confronted with the objects of the five senses, it reproduces them at once. It arises spontaneously at all times and exists forever reproducing the world of objects in front of the subject. The fourth is called the "analytical mind", for it differentiates what is defiled and what is undefiled. The fifth is called the "continuing mind", for it is united with deluded thoughts and continues uninterrupted. It retains the entire karma, good and bad, accumulated in the immeasurable lives of the past, and does not permit any loss. It is also capable of bringing the results of the pain, pleasure, etc., of the present and the future to maturity; in doing so, it makes no mistakes. It can cause one to recollect suddenly the things of the present and the past and to have sudden and unexpected fantasies of the things to come. The triple world, therefore, is unreal and is of mind only. Apart from it there are no objects of the five senses and of the mind. What does this mean? Since all things are, without exception, developed from the mind and produced under the condition of deluded thoughts, all differentiations are no other than the differentiations of one's mind itself. Yet the mind cannot perceive the mind itself; the mind has no marks of its own that can be ascertained as a substantial entity as such. It should be understood that the conception of the entire world of objects can be held only on the basis of man's deluded mind of ignorance. All things, therefore, are just like the images in a mirror which are devoid of any objectivity that one can get hold of; they are of the mind only and are unreal. When the deluded mind comes into being, then various conceptions (dharma) come to be; and when the deluded mind ceases to be, then these various conceptions cease to be.
의식(意識) Consciousness
다음에 의식이라고 말한 것은 곧 이 상속식이 모든 범부의 집착함이 점점 깊어짐에 따라 아와 아소를 계탁하여 여러 가지 망집(妄執)으로 일에 따라 반연하여 육진(六塵)을 분별하기 때문에 의식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또한 분리식(分離識)이라고도 이름하고 다시 분별사식(分別事識 : 사물을 분별하는 식)이라고도 이름하니,
이 식이 견애번뇌(見愛煩惱)의 증장되는 뜻에 의하기 때문이다.
復次,言意識者,即此相續識。依諸凡夫取著轉深,計我、我所,種種妄執,隨事攀緣,分別六塵;名為意識,亦名分離識,又復說名分別事識。此識依見愛煩惱增長義故。
What is called "consciousness (vijnana)" is the "continuing mind". Because of their deep-rooted attachment, ordinary men imagine that I and Mine are real and cling to them in their illusions. As soon as objects are presented, this consciousness rests on them and discriminates the objects of the five senses and of the mind. This is called "vijnana [i.e., the differentiating consciousness]" or the "separating consciousness". The propensity for discrimination of this consciousness will be intensified by both the intellectual defilement of holding fast to perverse views and the affectional defilement of indulgence in passion.
무명의 훈습에 의하여 일어난 식이란 범부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이승(二乘)의 지혜로 깨달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이는 보살이 처음의 정신(正信)에서 발심하고 관찰함으로부터 저 법신(法身)을 증득한다면 조금이라도 알게 되며,
보살구경지(菩薩究竟地)에 이른다 하더라도 다 알 수는 없고 오직 부처만이 끝까지 다 알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어째서인가?
이 마음이 본래부터 자성(自性)이 청정하지만 무명이 있어서 이 무명에 의하여 물들게 되어 그 염심이 있는 것이니,
비록 염심이 있으나 항상 변하지 아니하는지라 그러므로 이러한 뜻은 오직 부처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依無明熏習所起識者,非凡夫能知,亦非二乘智慧所覺。謂依菩薩,從初正信發心觀察;若證法身,得少分知;乃至菩薩究竟地,不能盡知,唯佛窮了。何以故?是心從本已來,自性清淨而有無明,為無明所染,有其染心;雖有染心,而常恆不變;是故此義唯佛能知。
That the deluded mind and consciousness arise from the permeation of ignorance is something that ordinary men cannot understand. The followers of the Hinayana, with their wisdom, likewise fail to realize this. Those Bodhisattvas who, having advanced from the first stage of correct faith by setting the mind upon enlightenment through practicing contemplation, have come to realize the Dharmakaya, can partially comprehend this. Yet even those who have reached the final stage of Bodhisattvahood cannot fully comprehend this; only the Enlightened ones have thorough comprehension of it. Why? The Mind, though pure in its self-nature from the beginning, is accompanied by ignorance. Being defiled by ignorance, a defiled state of Mind comes into being. But, though defiled, the Mind itself is eternal and immutable. only the Enlightened ones are able to understand what this means.
이른바 심성(心性)이 항상 망념이 없기 때문에 불변(不變)이라 이름하며,
하나의 법계(法界)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이 상응하지 아니하여 홀연히 망념이 일어나는 것을 무명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所謂心性常無念故,名為不變。以不達一法界故,心不相應,忽然念起,名為無明。
What is called the essential nature of Mind is always beyond thoughts. It is, therefore, defined as "immutable". When the one World of Reality is yet to be realized, the Mind is mutable and is not in perfect unity with Suchness. Suddenly, a deluded thought arises; this state is called ignorance.
염심(染心) Defiled States of Mind
염심이란 여섯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여섯 가지인가?
첫째는 집상응염(執相應染)이니,
이승(二乘)의 해탈한 이와 신상응지(信相應地)의 사람에 의하여 멀리 여의기 때문이다.
둘째는 부단상응염(不斷相應染)이니,
신상응지에 의하여 방편(方便)을 수학(修學)하여 점점 버려서 정심지(淨心地)에 이르러서 구경에 여의기 때문이다.
셋째는 분별지상응염(分別智相應染)이니,
구계지(具戒地)에 의하여 점점 여의며 이에 무상방편지(無相方便地)에 이르러 구경에 여의기 때문이다. 넷째는 현색불상응염(現色不相應染)이니,
색자재지(色自在地)에 의하여 여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능견심불상응염(能見心不相應染)이니,
심자재지(心自在地)에 의하여 여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근본업불상응염(根本業不相應染)이니,
보살진지(菩薩盡地)에 의하여 여래지(如來地)에 들어가서 여읠 수 있기 때문이다.
染心者有六種。云何為六?一者、執相應染,依二乘解脫,及信相應地遠離故。二者、不斷相應染,依信相應地修學方便,漸漸能捨,得淨心地究竟離故。三者、分別智相應染,依具戒地漸離,乃至無相方便地究竟離故。四者、現色不相應染,依色自在地能離故。五者、能見心不相應染,依心自在地能離故。六者、根本業不相應染,依菩薩盡地,得入如來地能離故。
Six kinds of defiled states of mind conditioned by ignorance can be identified. The first is the defilement united with attachment to atman (self), from which those who have attained liberation in Hinayana and those Bodhisattvas at the "stage of establishment of faith" are free. The second is the defilement united with the "continuing mind", from which those who are at the "stage of establishment of faith" and who are practicing expedient means to attain enlightenment can gradually free themselves and free themselves completely at the "stage of pure-heartedness". The third is the defilement united with the discriminating "analytical mind", from which those at the "stage of observing precepts" begin to be liberated and finally are liberated completely when they arrive at the "stage of expedient means without any trace". The fourth is the subtle defilement disunited from the represented world of objects, from which those at the "stage of freedom from the world of objects" can be freed. The fifth is the subtler defilement disunited from the "evolving mind that perceives" [i.e., the defilement existing prior to the act of perceiving], from which those at the "stage of freedom from evolving mind" are freed. The sixth and most subtle is the defilement disunited from the basic "activating mind", from which those Bodhisattvas who have passed the final stage and have gone into the "stage of Tathagatahood" are freed.
일법계(一法界)의 뜻을 분명히 알지 못한다는 것은 신상응지(信相應地)로부터 관찰하여 치단함을 배우고 정심지(淨心地)에 들어가 분수에 따라 여의게 되며 여래지(如來地)에 이르게 되어야 마침내 여읠 수 있기 때문이다.
상응의(相應義)라 한 것은 심(心)과 염법(染法)이 달라서 염정에 의하여 차별하매 지상(知相)과 연상(緣相)이 같음을 말하기 때문이며,
불상응의(不相應義)란 곧 심(心)과 불각이 항상 별다름이 없어서 지상과 연상이 같지 않음을 말하기 때문이다.
또 염심(染心)의 뜻이란 번뇌애(煩惱碍)라 이름하는 것이니 진여의 근본지(根本智)를 막기 때문이요,
무명의 뜻이란 지애(智碍)라 이름하는 것이니 세간의 자연업지(自然業智)를 막기 때문이다.
이 뜻이 무엇인가?
염심에 의하여 볼 수 있으며 나타낼 수 있으며 잘못 경계를 집착하여 평등성을 어기기 때문이며,
일체법(一切法)이 항상 고요하여 일어나는 상이 없으나 무명불각이 망령되이 법과 어긋나기 때문에 세간의 모든 경계에 수순(隨順)하는 여러 가지 지혜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不了一法界義者,從信相應地觀察學斷,入淨心地隨分得離,乃至如來地能究竟離故。言相應義者,謂心念法異,依染淨差別,而知相緣相同故。不相應義者,謂即心不覺,常無別異,不同知相緣相故。又染心義者,名為煩惱礙,能障真如根本智故。無明義者,名為智礙,能障世間自然業智故。此義云何?以依染心,能見、能現,妄取境界,違平等性故。以一切法常靜,無有起相;無明不覺,妄與法違,故不能得隨順世間一切境界種種知故。
On the expression "the one World of Reality is yet to be realized": From this state those Bodhisattvas who have advanced from the "stage of the establishment of faith" to the "stage of pure-heartedness", after having completed and severed their deluded thoughts, will be more and more liberated as they advance, and when they reach the "stage of Tathagatahood", they will be completely liberated. on "united": By the word "united" appearing in the first three defilements is meant that though difference [i.e., duality] exists between the mind (subject) and the datum of the mind (object), there is a simultaneous relation between them in that when the subject is defiled the object is also defiled, and when the subject is purified the object is also purified. on "disunited": By the word "disunited" is meant that the second three subtle and fundamental defilements are the aspects of nonenlightenment on the part of the mind existing prior to the differentiation into the subject and object relationship; therefore, a simultaneous relation between the subject and object is not as yet established. on the expression "defiled state of mind": It is called "the hindrance originating from defilements", for it obstructs any fundamental insight into Suchness. on "ignorance": Ignorance is called the "hindrance originating from misconceptions of objects", for it obstructs the wisdom that functions spontaneously in the world. Because of the defiled state of mind, there emerges the subject that perceives [incorrectly; i.e., the evolving mind] and that which reproduces [the reproducing mind] and thus one erroneously predicates the world of objects and causes oneself to deviate from the undifferentiated state of Suchness. Though all things are always in quiescence and devoid of any marks of rising, because of the nonenlightenment due to ignorance, one erroneously strays from the dharma [i.e., Suchness]; thus one fails to obtain the wisdom that functions spontaneously by adapting oneself to all circumstances in the world.
ㄷ)생멸상(生滅相) The Characteristics of Beings in Samsara
다시 생멸상을 분별한다는 것은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추(麤)니 마음과 더불어 상응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세(細)니 마음과 더불어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추 중의 추는 범부의 경계요,
추 중의 세와 세 중의 추는 보살의 경계요,
세 중의 세는 부처의 경계이다.
復次,分別生滅相者,有二種,云何為二? 一者、麤,與心相應故。二者、細,與心不相應故。又麤中之麤,凡夫境界。麤中之細及細中之麤,菩薩境界。細中之細,是佛境界。
In analyzing the characteristics of beings in samsara, two categories may be distinguished. The one is "crude", for those who belong to this category are united with the crude activities of the defiled mind; the other is "subtle", for those who belong to this category are disunited from the subtle activities of the defiled mind. Again, each category may in turn be subdivided into the cruder and the subtler. The cruder of the crude belongs to the range of mental activity of ordinary men; the subtler of the crude and the cruder of the subtle belong to that of Bodhisattvas; and the subtler of the subtle belongs to that of Buddhas.
이 두 가지 생멸이 무명의 훈습에 의하여 있는 것이니,
이른바 인(因)에 의하며 연(緣)에 의하는 것이다.
인에 의한다는 것은 불각의 뜻이기 때문이고,
연에 의한다는 것은 잘못 경계를 짓는 뜻이기 때문이다.
만약 인이 멸한다면 연이 멸하는 것이니,
인이 멸하기 때문에 불상응심(不相應心)이 멸하고 연이 멸하기 때문에 상응심(相應心)이 멸하는 것이다.
묻기를,
“만약 마음이 멸한다면 어떻게 상속하며,
만약 상속한다면 어떻게 마침내 멸해 버린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답하기를,
“멸한다는 것은 오직 심상(心相)만 멸하는 것이요 심체(心體)가 멸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바람이 바닷물에 의해서 동상(動相 : 파도)을 만드는 것이니,
만약 바닷물이 없어지면 풍상(風相)이 단절되어 의지할 바가 없지마는 바닷물이 없어지지 아니하므로 풍상이 상속하는 것이며,
오직 바람이 멸하기 때문에 동상(動相)이 따라서 멸하지만 바닷물이 멸하는 것은 아닌 것과 같다.
무명도 또한 그러하여 심체에 의하여 움직이는 것이니,
만약 심체가 멸하면 중생이 단절되어 의지할 바가 없지만 심체가 멸하지 아니하므로 마음이 상속하는 것이며,
오직 치(癡 : 무명)가 멸하기 때문에 심상이 따라서 멸하지만 심지(心智)가 멸하는 것은 아니다.”
此二種生滅,依於無明熏習而有,所謂依因依緣:依因者,不覺義故;依緣者,妄作境界義故。若因滅,則緣滅。因滅故,不相應心滅;緣滅故,相應心滅。問曰:若心滅者,云何相續?若相續者,云何說究竟滅?答曰:所言滅者,唯心相滅,非心體滅。如風依水而有動相,若水滅者,則風相斷絕,無所依止;以水不滅,風相相續;唯風滅故,動相隨滅,非是水滅。無明亦爾,依心體而動,若心體滅者,則眾生斷絕,無所依止;以體不滅,心得相續;唯癡滅故,心相隨滅,非心智滅。
These two categories of beings in the phenomenal order come about because of the permeation of ignorance; that is to say, they come about because of the primary cause and the coordinating causes. By the primary cause, "nonenlightenment" is meant; and by the coordinating causes, "the erroneously represented world of objects". When the primary cause ceases to be, then the coordinating causes will cease to be. Because of the cessation of the primary cause, the mind disunited from the represented world of objects, etc. will cease to be; and because of the cessation of the coordinating causes, the mind united with the attachment to atman, etc. will cease to be. Question: If the mind ceases to be, what will become of its continuity? If there is continuity of mind, how can you explain its final cessation? Answer: What we speak of as "cessation" is the cessation of the marks of the deluded mind only and not the cessation of its essence. It is like the case of the wind which, following the surface of the water, leaves the marks of its movement. If the water should cease to be, then the marks of the wind would be nullified and the wind would have no support on which to display its movement. But since the water does not cease to be, the marks of the wind may continue. Because only the wind ceases, the marks of its movement cease accordingly. This is not the cessation of water. So it is with ignorance; on the ground of the essence of Mind there is movement. If the essence of Mind were to cease, then people would be nullified and they would have no support. But since the essence does not cease to be, the mind may continue. Because only stupidity ceases to be, the marks of the stupidity of the mind cease accordingly. It is not that the wisdom [i.e., the essence] of Mind ceases.
나. 훈습론(熏習論)
다시 네 가지 법의 훈습하는 뜻이 있기 때문에 염법과 정법이 일어나 단절하지 않는 것이니,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정법(淨法)이니 진여라 이름하며,
둘째는 일체의 염인(染因)이니 무명이라 이름하며,
셋째는 망심(妄心)이니 업식이라 이름하며,
넷째는 망경계(妄境界)니 이른바 육진(六塵)이다.
復次,有四種法熏習義故,染法淨法起不斷絕。云何為四?一者、淨法,名為真如。二者、一切染因,名為無明。三者、妄心,名為業識。四者、妄境界,所謂六塵。
Because of the four kinds of permeation, the defiled states and the pure state emerge and continue uninterrupted. They are (1) the pure state, which is called Suchness; (2) the cause of all defilements, which is called ignorance; (3) the deluded mind, which is called "activating mind"; (4) the erroneously conceived external world, which is called the "objects of the five senses and of mind".
훈습의 뜻이란 세간의 의복이 실제로는 향기가 없지마는 만약 사람이 향으로 훈습하면 그 때문에 곧 향기가 있는 것과 같이,
이도 또한 이러하여 진여정법에는 실로 염(染)이 없지만 다만 무명으로 훈습하기 때문에 곧 염상(染相)이 있으며,
무명염법에는 실로 정업(淨業)이 없으나 다만 진여로 훈습하기 때문에 정용(淨用)이 있는 것이다.
熏習義者:如世間衣服,實無於香,若人以香而熏習故,則有香氣。此亦如是:直如淨法,實無於染,但以無明而熏習故,則有染相。無明染法,實無淨業,但以真如而熏習故,則有淨用。
The meaning of permeation: Clothes in the world certainly have no scent in themselves, but if a man permeates them with perfumes, then they come to have a scent. It is just the same with the case we are speaking of. The pure state of Suchness certainly has no defilement, but if it is permeated by ignorance, then the marks of defilement appear on it. The defiled state of ignorance is indeed devoid of any purifying force, but if it is permeated by Suchness, then it will come to have a purifying influence.
ㄱ)염법(染法) 훈습 Permeation of Ignorance
어떻게 훈습하여 염법을 일으켜 단절되지 않는가?
이른바 진여법에 의하기 때문에 무명이 있고,
무명염법의 인(因)이 있기 때문에 곧 진여를 훈습하며,
훈습하기 때문에 곧 망심이 있게 된다.
망심이 있어서 곧 무명을 훈습하여 진여법을 요달(了達)하지 못하기 때문에 불각하여 망념이 일어나 망경계를 나타낸다.
망경계의 염법의 연(緣)이 있기 때문에 곧 망심을 훈습하여 그로 하여금 염착(念着)케 하여 여러 가지 없을 지어서 일체의 신심(身心)등의 고통을 받게 하는 것이다.
이 망경계 훈습의 뜻에 두 가지가 있다.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증장념훈습(增長念熏習)이며 둘째는 증장취훈습(增長取熏習)이다.
망심훈습의 뜻에 두 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업식근본훈습(業識根本熏習)이니,
아라한(阿羅漢)과 별지불(辟支佛)과 일체 보살의 생멸고(生滅苦)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요,
둘째는 증장분별사식훈습(增長分別事識)이니,
범부의 업계고(業繫苦)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무명훈습의 뜻에 두 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근본훈습이니,
업식을 성취할 수 있는 뜻이기 때문이요,
둘째는 소기견애훈습(所起見愛熏習)이니,
분별사식을 성취할 수 있는 뜻이기 때문이다.
云何熏習起染法不斷?所謂以依真如法故,有於無明。以有無明染法因故,即熏習真如;以熏習故,則有妄心。以有妄心,即熏習無明;不了真如法故,不覺念起,現妄境界。以有妄境界染法緣故,即熏習妄心;令其念著,造種種業,受於一切身心等苦。此妄境界熏習義則有二種,云何為二?一者、增長念熏習,二者、增長取熏習。妄心熏習義有二種,云何為二? 一者、業識根本熏習,能受阿羅漢、辟支佛、一切菩薩生滅苦故。二者、增長分別事識熏習,能受凡夫業繫苦故。無明熏習義有二種,云何為二?一者、根本熏習,以能成就業識義故。二者、所起見愛熏習,以能成就分別事識義故。
How does the permeation of ignorance give rise to the defiled state and continue uninterrupted? It may be said that, on the ground of Suchness [i.e., the original enlightenment], ignorance [i.e., nonenlightenment] appears. Ignorance, the primary cause of the defiled state, permeates into Suchness. Because of this permeation a deluded mind results. Because of the deluded mind, deluded thoughts further permeate into ignorance. While the principle of Suchness is yet to be realized, the deluded mind, developing thoughts fashioned in the state of nonenlightenment, predicates erroneously conceived objects of the senses and the mind. These erroneously conceived objects of the senses and the mind, the coordinating causes in bringing about the defiled state, permeate into the deluded mind and cause the deluded mind to attach itself to its thoughts, to create various evil karma, and to undergo all kinds of physical and mental suffering. The permeation of the erroneously conceived objects of the senses and the mind is of two kinds. one is the basic permeation by the "activating mind", which causes Arhats, Pratyeka-buddhas, and all Bodhisattvas to undergo the suffering of samsara, and the other is the permeation which accelerates the activities of the "object-discriminating consciousness" and which makes ordinary men suffer from the bondage of their karma. The permeations of ignorance are of two kinds. one is the basic permeation, since it can put into operation the "activating mind", and the other is the permeation that develops perverse views and attachments, since it can put into operation the "object-discriminating consciousness".
ㄴ)정법(淨法) 훈습 Permeation of Suchness
어떻게 훈습하여 정법(淨法)을 일으켜 단절시키지 않는가?
이른바 진여법이 있기 때문이니,
이 진여가 무명을 훈습하는 것이며 훈습하는 인연의 힘에 의하여 곧 망심(妄心)으로 하여금 생사(生死)의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涅槃)을 구하기를 좋아하게 하는 것이다.
이 망심에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을 구하기 좋아하는 인연이 있기 때문에 곧 진여를 훈습하여 스스로 자기의 본성을 믿어서 마음이 망령되이 움직이는 것일 뿐 앞의 경계가 없음을 알아 멀리 여의는 법을 닦는다.
이리하여 앞의 경계가 없음을 여실히 알기 때문에 여러 가지 방편으로 수순행(隨順行)을 일으켜 집착하지도 아니하고 잘못 생각하지도 아니하며,
내지 오랫동안 훈습한 힘 때문에 무명이 곧 멸하게 된다.
무명이 멸하기 때문에 마음에 일어나는 것이 없고 일어남이 없기 때문에 경계가 따라서 멸한다.
인과 연이 다 멸하기 때문에 심상(心相)이 다 없어지니,
이를 열반을 얻어 자연업(自然業)을 이룬다고 말한다.
云何熏習起淨法不斷?所謂以有真如法故,能熏習無明;以熏習因緣力故,則令妄心厭生死苦,樂求涅槃。以此妄心有厭求因緣故,即熏習真如。自信己性,知心妄動,無前境界,修遠離法;以如實知無前境界故,種種方便,起隨順行,不取不念,乃至久遠熏習力故,無明則滅;以無明滅故,心無有起;以無起故,境界隨滅;以因緣俱滅故,心相皆盡,名得涅槃,成自然業。
How does the permeation of Suchness give rise to the pure state and continue uninterrupted? It may be said that there is the principle of Suchness, and it can permeate into ignorance. Through the force of this permeation, Suchness causes the deluded mind to loathe the suffering of samsara and to aspire for nirvana. Because this mind, though still deluded, is now possessed with loathing and aspiration, it permeates into Suchness in that it induces Suchness to manifest itself. Thus a man comes to believe in his essential nature, to know that what exists is the erroneous activity of the mind and that the world of objects in front of him is nonexistent, and to practice teachings to free himself from the erroneously conceived world of objects. He knows what is really so - that there is no world of objects in front of him - and therefore with various devices he practices courses by which to conform himself to Suchness. He will not attach himself to anything nor give rise to any deluded thoughts. Through the force of this permeation of Suchness over a long period of time, his ignorance ceases. Because of the cessation of ignorance, there will be no more rising of the deluded activities of mind. Because of the nonrising of the deluded activities of mind, the world of objects as previously conceived ceases to be; because of the cessation of both the primary cause (ignorance) and the coordinating causes (objects), the marks of the defiled mind will all be nullified. This is called "gaining nirvana and accomplishing spontaneous acts".
망심훈습의 뜻에 두 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분별사식훈습이니,
모든 범부와 이승인(二乘人)등이 생사의 고통을 싫어함에 의하여 힘이 닿는 대로 점차로 무상도(無上道)에 나아가기 때문이다.
둘째는 의훈습(意熏習)이니,
모든 보살이 발심용맹(發心勇猛 : 마음을 발함이 용맹함)하여 속히 열반에 나아감을 말하기 때문이다.
妄心熏習義有二種,云何為二?一者、分別事識熏習,依諸凡夫,二乘人等,厭生死苦,隨力所能,以漸趣向無上道故。二者、意熏習,謂諸菩薩發心勇猛,速趣涅槃故。
The permeation of Suchness into the deluded mind is of two kinds. The first is the permeation into the "object-discriminating consciousness". Because of this permeation, ordinary men and the Hinayanists come to loathe the suffering of samsara, and thereupon each, according to his capacity, gradually advances toward the highest enlightenment. The second is the permeation into mind. Because of this permeation, Bodhisattvas advance to nirvana rapidly and with aspiration and fortitude.
진여훈습의 뜻에 두 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자체상훈습(自體相熏習)이며,
둘째는 용훈습(用熏習)이다.
真如熏習義有二種,云何為二?一者、自體相熏習,二者、用熏習。
Two kinds of permeation of Suchness into ignorance can be identified. The first is the "permeation through manifestation of the essence of Suchness", and the second is "the permeation through external influences".
진여(眞如)의 자체상(自體相) 훈습 Permeation through Manifestation of the Essence of Suchness
자체상훈습이란 무시(無始)의 때로부터 무루법(無漏法)을 갖추고 부사의업(不思議業)을 갖추며 경계성(境界性)을 짓는 것이다.
이 두 가지의 뜻에 의하여 항상 훈습하여 훈습의 힘이 있기 때문에 중생으로 하여금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을 즐겨 구하여 스스로 자기의 몸에 진여법이 있는 줄 믿어 발심하여 수행하게 하는 것이다.
自體相熏習者,從無始世來,具無漏法,備有不思議業,作境界之性。依此二義,恆常熏習,以有力故,能令眾生厭生死苦,樂求涅槃,自信己身有真如法,發心修行。
The essence of Suchness is, from the beginningless beginning, endowed with the "perfect state of purity". It is provided with suprarational functions and the nature of manifesting itself (literally, the nature of making the world of object). Because of these two reasons it permeates perpetually into ignorance. Through the force of this permeation it induces a man to loathe the suffering of samsara, to seek bliss in nirvana, and, believing that he has the principle of Suchness within himself, to make up his mind to exert himself.
묻기를,
“만일 이러한 뜻과 같다면 모든 중생에게 모두 진여가 있어서 똑같이 훈습해야 할 터인데,
어찌하여 믿음이 있기도 하고 믿음이 없기도 하여 한없는 전후의 차별이 있는 것인가?
모두 동시에 스스로 진여법이 있음을 알아서 방편(方便)을 부지런히 닦아 똑같이 열반에 들어가야 할 것이다.”
답하기를,
“진여는 본래 하나이지만 한량없고 가이없는 무명이 있어,
본래부터 자성(自性)이 차별되어 후박(厚薄)이 같지 않다.
그러므로 항하(恒河)의 모래보다 많은 상번뇌(上煩惱)가 무명에 의하여 차별을 일으키며 아견애염번뇌(我見愛染煩惱)가 무명에 의하여 차별을 일으키니,
이와 같은 일체의 번뇌가 무명에 의하여 일어난 것이어서 전후의 한량없는 차별이 있는 것이며,
오직 여래만이 이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모든 불법에 인(因)이 있고 연(緣)이 있는 것이니,
인연이 구족하여야 법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나무 중의 화성(火性)이 불의 정인(正因)이지만 만약 사람이 알지 못하여 방편을 빌리지 못하면 스스로 나무를 태울 수 없는 것과 같이,
중생도 그러하여 정인(正因)의 훈습하는 힘이 있으나 만약 모든 부처, 보살, 선지식(善知識)등을 만나 그들로 연(緣)을 삼지 못한다면 스스로 번뇌를 끊고 열반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만약 외연(外緣)의 힘이 있으나 안으로 인(因)의 정법(淨法)이 아직 훈습의 힘을 갖지 못한 사람이라면 또한 구경에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을 즐겨 구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인연이 구족한 이라면 이른바 스스로 훈습하는 힘이 있고 또 모든 부처․보살 등의 자비와 원호(願護)함을 받기 때문에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열반이 있음을 믿어 선근을 닦아 익히며, 선근을 닦는 일이 성숙하기 때문에 모든 부처와 보살의 보여 주고 가르쳐 주어 중생을 이롭게 하고 기쁘게 함을 만나 차츰 일을 이루어 나아가 열반의 도에 향할 수 있는 것이다.”
問曰:若如是義者,一切眾生悉有真如,等皆熏習,云何有信、無信,無量前後差別?皆應一時自知有真如法,勤修方便,等入涅槃。答曰:真如本一,而有無量無邊無明,從本已來,自性差別,厚薄不同故。過恆沙等上煩惱,依無明起差別;我見愛染煩惱,依無明起差別;如是一切煩惱,依於無明所起,前後無量差別,唯如來能知故。又諸佛法,有因有緣,因緣具足,乃得成辦。如木中火性,是火正因,若無人知,不假方便,能自燒木,無有是處。眾生亦爾,雖有正因熏習之力,若不遇諸佛菩薩善知識等以之為緣,能自斷煩惱入涅槃者,則無是處。若雖有外緣之力,而內淨法未有熏習力者,亦不能究竟厭生死苦,樂求涅槃。若因緣具足者,所謂自有熏習之力,又為諸佛菩薩等慈悲願護故。能起厭苦之心,信有涅槃,修習善根。以修善根成熟故,則值諸佛菩薩示教利喜,乃能進趣向涅槃道。
Question: If this is so, then all sentient beings are endowed with Suchness and are equally permeated by it. Why is it that there are infinite varieties of believers and nonbelievers, and that there are some who believe sooner and some later? All of them should, knowing that they are endowed with the principle of Suchness, at once make an effort utilizing expedient means and should all equally attain nirvana. Answer: Though Suchness is originally one, yet there are immeasurable and infinite shades of ignorance. From the very beginning ignorance is, because of its nature, characterized by diversity, and its degree of intensity is not uniform. Defilements, more numerous than the sands of the Ganges, come into being because of the differences in intensity of ignorance, and exist in manifold ways; defilements, such as the belief in the existence of atman and the indulgence in passion, develop because of ignorance and exist in different ways. All these defilements are brought about by ignorance, in an infinitely diversified manner in time. The Tathagatas alone know all about this. In Buddhism there is a teaching concerning the primary cause and the coordinating causes. When the primary cause and the coordinating causes are sufficiently provided, there will be the perfection of a result. It is like the case of wood: though it possesses a latent fire nature which is the primary cause of its burning, it cannot be made to burn by itself unless men understand the situation and resort to means of actualizing fire out of wood by kindling it. In the same way a man, though he is in possession of the correct primary cause, Suchness with permeating force, cannot put an end to his defilements by himself alone and enter nirvana unless he is provided with coordinating causes, i.e., his encounters with the Buddhas, Bodhisattvas, or good spiritual friends. Even though coordinating causes from without may be sufficiently provided, if the pure principle [i.e., Suchness] within is lacking in the force of permeation, then a man cannot ultimately loathe the suffering of samsara and seek bliss in nirvana. However, if both the primary and the coordinating causes are sufficiently provided, then because of his possession of the force of permeation of Suchness from within and the compassionate protection of the Buddhas and Bodhisattvas from without, he is able to develop a loathing for suffering, to believe that nirvana is real, and to cultivate his capacity for goodness. And when his cultivation of the capacity for goodness matures, he will as a result meet the Buddhas and Bodhisattvas and will be instructed, taught, benefited, and given joy, and then he will be able to advance on the path to nirvana.
용훈습(用薰習) Permeation through Influences
용훈습(用熏習)이란 곧 중생의 외연(外緣)의 힘이니,
이러한 외연에 한량없는 뜻이 있으나 대략 말하자면 두 가지가 있다.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차별연(差別緣)이고,
둘째는 평등연(平等緣)이다.
用熏習者,即是眾生外緣之力。如是外緣有無量義。略說二種,云何為二?一者、差別緣,二者、平等緣。
This is the force from without affecting men by providing coordinating causes. Such external coordinating causes have an infinite number of meanings. Briefly, they may be explained under two categories: namely, the specific and the general coordinating causes.
차별연(差別緣) The Specific Coordinating Causes
차별연이란 이 사람이 모든 부처와 보살 등에 의하여 처음 발의(發意)하여 비로소 구도(求道)할 때로부터 부처가 되기에 이르기까지 그 가운데에서 혹은 부처를 보기도 하고 혹은 생략하기도 함에 있어,
어떤 경우는 권속(眷屬)․부모․제친(諸親)이 되며,
어떤 경우는 급사(給使)가 되며,
어떤 경우는 지우(知友)가 되며,
어떤 경우는 원가(怨家)가 되며,
어떤 경우는 사섭(四攝)을 일으키며,
내지 일체의 짓는 한량없는 행위의 연(緣)이 되는 것이니 이는 대비(大悲)로 훈습하는 힘을 일으켜 중생으로 하여금 선근을 증장케 하여 혹은 보거나 혹은 들어서 이익을 얻게 하기 때문이다.
이 연에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근연(近緣)이니 빨리 도탈(度脫)을 얻기 때문이고,
둘째는 원연(遠緣)이니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도탈을 얻기 때문이다.
이 근원(近遠)의 두 연을 분별하면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증장행연(增長行緣)이고,
둘째는 수도연(受道緣)이다.
差別緣者,此人依於諸佛菩薩等,從初發意始求道時,乃至得佛,於中若見若念,或為眷屬父母諸親,或為給使,或為知友,或為怨家,或起四攝,乃至一切所作無量行緣;以起大悲熏習之力,能令眾生增長善根,若見若聞,得利益故。此緣有二種,云何為二?一者、近緣,速得度故。二者、遠緣,久遠得度故。是近遠二緣,分別復有二種,云何為二?一者、增長行緣,二者、受道緣。
A man, from the time when he first aspires to seek enlightenment until he becomes an Enlightened one, sees or meditates on the Buddhas and Bodhisattvas as they manifest themselves to him; sometimes they appear as his family members, parents, or relatives, sometimes as servants, sometimes as close friends, or sometimes as enemies. Through all kinds of deeds and incalculable performances, such as the practice of the four acts of loving-kindness, etc., they exercise the force of permeation created by their great compassion, and are thus able to cause sentient beings to strengthen their capacity for goodness and are able to benefit them as they see or hear about their needs. This specific coordinating cause is of two kinds. one is immediate and enables a man to obtain deliverance quickly; and the other is remote and enables a man to obtain deliverance after a long time. The immediate and remote causes are again of two kinds: the causes which strengthen a man in his practices of expedient means to help others, and those which enable him to obtain enlightenment.
평등연(平等緣) The General Coordinating Causes
‘평등연(平等緣)’이란 일체의 모든 부처와 보살이 일체 중생을 도탈(度脫)시키고자 하여 자연히 이들을 훈습하여 항상 버리지 아니하는 것이다.
이는 동체지력(同體智力)으로써 중생의 견문(見聞)에 따라 응하여 업용(業用)을 나타내는 것이니,
이른바 중생이 삼매(三昧)에 의하여야 평등하게 모든 부처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平等緣者,一切諸佛菩薩,皆願度脫一切眾生,自然熏習,恆常不捨。以同體智力故,隨應見聞而現作業。所謂眾生依於三昧,乃得平等見諸佛故。
The Buddhas and Bodhisattvas all desire to liberate all men, spontaneously permeating them with their spiritual influences and never forsaking them. Through the power of the wisdom which is one with Suchness, they manifest activities in response to the needs of men as they see and hear them. Because of this indiscriminately permeating cause, men are all equally able, by means of concentration (samadhi), to see the Buddhas.
체용(體用) 훈습의 수용 경계(受容境界) [未相應, 已相應]
이 체용(體用)의 훈습을 분별함에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미상응(未相應)이니,
범부와 이승과 초발의보살(初發意菩薩) 등은 의와 의식의 훈습으로 신력(信力)에 의하기 때문에 잘 수행을 하지만 아직 무분별심(無分別心)이 체와 더불어 상응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며,
아직 자재업(自在業)의 수행이 용(用)과 더불어 상응하지 못함을 말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이상응(已相應)이니,
법신보살이 무분별심을 얻어 모든 부처의 지용(智勇)과 더불어 상응하여 오직 법력에 의하여 저절로 수행하게 되어 진여를 훈습하여 무명을 멸함을 말하기 때문이다.
此體用熏習,分別復有二種,云何為二?一者、未相應,謂凡夫、二乘、初發意菩薩等,以意、意識熏習,依信力故而修行。未得無分別心,與體相應故;未得自在業修行,與用相應故。二者、已相應,謂法身菩薩,得無分別心,與諸佛智用相應。唯依法力自然修行,熏習真如,滅無明故。
This permeation through the influence of the wisdom whose essence is one with Suchness is also divided into two categories according to the types of recipients. The one is yet to be united with Suchness. Ordinary men, the Hinayanists, and those Bodhisattvas who have just been initiated devote themselves to religious practices on the strength of their faith, being permeated by Suchness through their mind and consciousness. Not having obtained the indiscriminate mind, however, they are yet to be united with the essence of Suchness, and not having obtained the perfection of the discipline of free acts, they are yet to be united with the influence of Suchness. The other is the already united with Suchness: Bodhisattvas who realize Dharmakaya have obtained undiscriminating mind and are united with the essence of the Buddhas; they, having obtained free acts, are united with the influence of the wisdom of the Buddhas. They singly devote themselves with spontaneity to their religious disciplines, on the strength of Suchness within; permeating into Suchness so that Suchness will reclaim itself, they destroy ignorance.
또한 염법(染法)은 무시의 때로부터 훈습하여 단절되지 않다가,
부처가 된 후에는 곧 단절함이 있으나,
정법훈습(淨法熏習)은 곧 단절함이 없어서 미래에까지 다하는 것이니,
이 뜻이 무엇인가?
진여법이 항상 훈습하기 때문에 망심이 곧 멸하고 법신이 밝히 나타나 용(用)의 훈습을 일으키므로 단절함이 없는 것이다.
復次,染法從無始已來,熏習不斷,乃至得佛,後則有斷。淨法熏習,則無有斷,盡於未來。此義云何?以真如法常熏習故,妄心則滅,法身顯現,起用熏習,故無有斷。
Again, the defiled principle (dharma), from the beginningless beginning, continues perpetually to permeate until it perishes by the attainment of Buddhahood. But the permeation of the pure principle has no interruption and no ending. The reason is that the principle of Suchness is always permeating; therefore, when the deluded mind ceases to be, the Dharmakaya [i.e., Suchness, original enlightenment] will be manifest and will give rise to the permeation of the influence of Suchness, and thus there will be no ending to it.
B.의장문(義章門)을 해석함 The Essence Itself and the Attributes of Suchness, or The Meanings of Maha
a.체상(體相) 이대(二大) The Greatness of the Essence of Suchness / The Greatness of the Attributes of Suchness
또한 진여의 자체상(自體相)이란 일체의 범부․성문․연각․보살․제불(諸佛)에게 증감됨이 없으며 앞에서 나는 것도 아니요,
뒤에서 멸하는 것도 아니어서,
필경에 늘 변함이 없어서 본래부터 성품이 스스로 일체의 공덕을 가득 채운 것이다.
이른바 자체에 대지혜광명(大智慧光明)의 뜻이 있기 때문이며,
법계(法界)를 두루 비치는 뜻이 있기 때문이여,
진실하게 아는 뜻이 있기 때문이며,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의 뜻이 있기 때문이며,
상(常)․락(樂)․아(我)․정(淨)의 뜻이 있기 때문이며,
청량(淸涼)하고 불변(不變)하고 자재(自在)한 뜻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항하의 모래보다 많은 불리(不離)․부단(不斷)․불이(不異)․부사의(不思議)한 불법(佛法)을 구족하고 내지 만족하여 부족한 바가 없는 뜻이기 때문에 여래장(如來藏)이라 하며 또한 여래법신(如來法身)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復次,真如自體相者,一切凡夫、聲聞、緣覺、菩薩、諸佛,無有增減,非前際生,非後際滅,畢竟常恆;從本已來,性自滿足一切功德。所謂:自體有大智慧光明義故,遍照法界義故,真實識知義故,自性清淨心義故,常樂我淨義故,清涼不變自在義故,具足如是過於恆沙不離、不斷、不異、不思議佛法,乃至滿足無有所少義故;名為如來藏,亦名如來法身。
The essence of Suchness knows no increase or decrease in ordinary men, the Hinayanists, the Bodhisattvas, or the Buddhas. It was not brought into existence in the beginning nor will it cease to be at the end of time; it is eternal through and through. From the beginning, Suchness in its nature is fully provided with all excellent qualities; namely, it is endowed with the light of great wisdom, the qualities of illuminating the entire universe, of true cognition and mind pure in its self-nature; of eternity, bliss, Self, and purity; of refreshing coolness, immutability, and freedom. It is endowed with these excellent qualities which outnumber the sands of the Ganges, which are not independent of, disjointed from, or different from the essence of Suchness, and which are suprarational attributes of Buddhahood. Since it is endowed completely with all these, and is not lacking anything, it is called the Tathagata-garbha when latent and also the Dharmakaya of the Tathagata.
묻기를,
“위에서 진여는 그 체가 평등하여 일체의 상을 여의었다고 말하였는데,
어찌하여 다시 진여의 체에 이와 같은 여러 가지 공덕(功德)이 있다고 말하는가?”
답하기를,
“실로 이러한 모든 공덕의 뜻이 있으나 차별의 상이 없어서 똑같은 일미(一味)이며 오직 하나의 진여이다.
이 뜻이 무엇인가?
무분별(無分別)로 분별상(分別相)을 여의니, 이러므로 둘이 없는 것이다.
또한 무슨 뜻으로 차별을 말할 수 있는가?
업식의 생멸상에 의하여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일체법이 본래 오직 마음뿐인지라 실로 망념이 없지만,
망심(妄心)이 있어서 깨닫지 못하여 망념을 일으켜 모든 경계를 보기 때문에 무명(無明)이라 하는 것이니,
심성에 망념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곧 대지혜광명(大智慧光明)의 뜻이기 때문이다.
만약 마음이 견(見)을 일으키면 보지 못하는 상이 있는 것이니,
심성(心性)이 견을 여의면 바로 이것이 법계를 두루 비추는 뜻이기 때문이다.
만약 마음에 움직임이 있으면 참으로 아는 것이 아니며,
자성이 없게 되며 상(相)도 아니고 낙(樂)도 아니며 아(我)도 아니고 정(淨)도 아니다.
이리하여 열뇌(熱惱)하며 쇠변(衰變)하면 자재하지 못하며 이에 항하의 모래들보다 많은 망염(妄染)의 뜻을 갖게 되는 것이니,
이러한 뜻에 대하기 때문에 심성이 움직임이 없으면 항하의 모래들보다 많은 모든 깨끗한 공덕상의 뜻을 가져 나타낸다.
만약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 있어 다시 앞의 법의 생각할 만한 것을 본다면 모자라는 바가 있을 터이지만,
이러한 정법의 무량한 공덕은 바로 일심(一心)이며,
다시 생각할 것이 없기 때문에 만족한 것이니,
법신․여래장이라 하는 것이다.”
問曰:上說真如其體平等,離一切相,云何復說體有如是種種功德?答曰:雖實有此諸功德義,而無差別之相,等同一味,唯一真如。此義云何?以無分別,離分別相,是故無二。復以何義得說差別?以依業識生滅相示。此云何示?以一切法,本來唯心,實無於念。而有妄心,不覺起念,見諸境界,故說無明。心性不起,即是大智慧光明義故。若心起見,則有不見之相,心性離見,即是遍照法界義故。若心有動,非真識知,無有自性,非常、非樂、非我、非淨,熱惱衰變,則不自在,乃至具有過恆沙等妄染之義。對此義故,心性無動,則有過恆沙等諸淨功德相義示現。若心有起,更見前法可念者,則有所少。如是淨法無量功德,即是一心,更無所念,是故滿足,名為法身如來之藏。
Question: It was explained before that the essence of Suchness is undifferentiated and devoid of all characteristics. Why is it, then, that you have described its essence as having these various excellent qualities? Answer: Though it has, in reality, all these excellent qualities, it does not have any characteristics of differentiation; it retains its identity and is of one flavor; Suchness is solely one. Question: What does this mean? Answer: Since it is devoid of individuation, it is free from the characteristics of individuation; thus it is one without any second. Question: Then how can you speak of differentiation [i.e., the plurality of the characteristics of Suchness]? Answer: In contrast to the characteristics of the phenomena of the "activating mind" the characteristics of Suchness can be inferred. Question: How can they be inferred? Answer: All things are originally of the mind only; they in fact transcend thoughts. Nevertheless, the deluded mind, in nonenlightenment, gives rise to irrelevant thoughts and predicates the world of objects. This being the case, we define this mentality as "the state of being destitute of wisdom (avidya: ignorance)". The essential nature of Mind is immutable in that it does not give rise to any deluded thoughts, and therefore, is the very opposite of ignorance; hence, it is spoken of as having the characteristic of "the light of great wisdom". When there is a particular perceiving act of the mind, objects other than the objects being perceived will remain unperceived. The essential nature of Mind is free from any partial perceiving; hence, Suchness is spoken of as having the characteristic of "illuminating the entire universe". When the mind is in motion [stirred by ignorance], it is characterized by illusions and defilements, outnumbering the sands of the Ganges, such as lack of true cognition, absence of self-nature, impermanence, blisslessness, impurity, fever, anxiety, deterioration, mutation, and lack of freedom. By contrast to this, the essential nature of Mind, however, is motionless [i.e., undisturbed by ignorance]; therefore, it can be inferred that it must have various pure and excellent qualities, outnumbering the sands of the Ganges. But if the mind gives rise to irrelevant thoughts and further predicates the world of objects, it will continue to lack these qualities. All these numberless excellent qualities of the pure principle are none other than those of one Mind, and there is nothing to be sought after anew by thought. Thus, that which is fully endowed with them is called the Dharmakaya when manifested and the Tathagata-garbha when latent.
b.용대(用大) The Greatness of the Influences of Suchness
또한 진여의 용(用)이란 이른바 모든 부처와 여래가 본래 인지(因地)에서 대자비(大慈悲)를 일으켜 모든 바라밀(波羅密)을 닦아서 중생을 섭화(攝化)하며,
크나큰 서원(誓願)을 세워 일체의 중생계를 모두 도탈(度脫)시키고자 하여 겁(劫)의 수를 한정하지 않고 미래에까지 다하는 것이니 모든 중생을 돌보기를 자기 몸과 같이하기 때문이며,
그러면서도 중생상(衆生相)을 취하지 않는다.
이는 무슨 뜻에 의해서인가?
일체 중생과 및 자기의 몸이 진여로서 평등하여 다름이 없는 것인 줄 여실히 앎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대방편지(大方便智)가 있기 때문에 무명을 제멸하고 본래의 법신을 보아서 자연히 부사의업의 여러 가지 작용을 갖는 것이니,
곧 진여와 똑같이 모든 곳에 두루하게 되며 또한 그러면서도 얻을 만한 작용의 모양도 없다.
왜 그런가?
말하자면 모든 부처와 여래는 오직 법신(法身)․지상(智相)의 신(身)이며,
제일의제(第一義諦)로서 세제(世諦)의 경계가 없는 것이어서 시작(施作)을 떠난 것이나,
다만 중생의 견문(見聞)에 따라 이익되게 하기 때문에 용(用)이라 말하는 것이다.
復次,真如用者,所謂諸佛如來,本在因地,發大慈悲,修諸波羅密,攝化眾生,立大誓願,盡欲度脫等眾生界,亦不限劫數,盡於未來。以取一切眾生如己身故,而亦不取眾生相。此以何義?謂如實知一切眾生及與己身,真如平等無別異故。以有如是大方便智,除滅無明,見本法身,自然而有不思議業種種之用,即與真如等,遍一切處。又亦無有用相可得,何以故?謂諸佛如來,唯是法身智相之身。第一義諦,無有世諦境界,離於施作;但隨眾生見聞得益,故說為用。
The Buddha-Tathagatas, while in the stages of Bodhisattvahood, exercised great compassion, practiced paramitas, and accepted and transformed sentient beings. They took great vows, desiring to liberate all sentient beings through countless aeons until the end of future time, for they regarded all sentient beings as they regarded themselves. And yet, they never regarded them as separate sentient beings. Why? Because they truly knew that all sentient beings and they themselves were identical in Suchness and that there could be no distinction between them. Because they possessed such great wisdom which could be applied to expedient means in quest of enlightenment, they extinguished their ignorance and perceived the original Dharmakaya. Spontaneously performing incomprehensible activities, exercising manifold influences, they pervade everywhere in their identity with Suchness. Nevertheless, they reveal no marks of their influences that can be traced as such. Why? Because the Buddha-Tathagatas are no other than the Dharmakaya itself, and the embodiment of wisdom. They belong to the realm of the absolute truth, which transcends the world where the relative truth operates. They are free from any conventional activities. And yet, because of the fact that sentient beings receive benefit through seeing or hearing about them, their influences [i.e., of Suchness] can be spoken of in relative terms.
응신(應身)과 보신(報身)
이 용(用)에 두 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분별사식에 의한 것으로 범부와 이승의 마음으로 보는 것을 응신(應身)이라 이름하니,
이는 전식의 나타냄인 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밖에서 온 것이라 보고 색의 분제(色分齊)를 취하여 다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업식에 의한 것이니,
이는 모든 보살이 초발의(初發意)로부터 보살구경지에 이르기까지 마음으로 본 것을 보신(報身)이라 함을 이르는 것이다.
그 몸에 무량한 색(色)이 있고,
색에 무량한 상(相)이 있고 상에 무량한 호(好)가 있으며,
머무는 의과(依果)도 무량한 여러 가지 장엄이 있어서 곳에 따라 나타냄이 곧 가이없고 궁진(窮盡)할 수 없어 분제상(分齊相)을 여의었지만
그 응하는 바에 따라서 항상 머물러 있어서 훼손되지도 않고 잃지도 않는다.
이러한 공덕은 모두 모든 바라밀 등 무루의 행훈(行熏) 및 부사의훈(不思議熏)에 의하여 성취된 것이니, 이러한 한량없는 낙상(樂相)을 구족하였기 때문에 보신(報身)이라고 하는 것이다.
此用有二種:云何為二?一者、依分別事識,凡夫、二乘心所見者,名為應身。以不知轉識現故;見從外來,取色分齊,不能盡知故。二者、依於業識,謂諸菩薩從初發意,乃至菩薩究竟地心所見者,名為報身。身有無量色,色有無量相,相有無量好。所住依果:亦有無量種種莊嚴,隨所示現,即無有邊,不可窮盡,離分齊相。隨其所應,常能住持,不毀不失。如是功德,皆因諸波羅密等無漏行熏,及不思議熏之所成就,具足無量樂相,故說為報身。
The influences of Suchness are of two kinds. The first is that which is conceived by the mind of ordinary men and the followers of Hinayana [i.e., the influence of Suchness as reflected] in the "object-discriminating consciousness". This is called the influence of Suchness in the form of the "Transformation-body" (Nirmanakaya). Because they do not know that it is projected by the "evolving mind", they regard it as coming from without; they assume that it has a corporeal limitation because their understanding is limited. The second is that which is conceived by the mind of the Bodhisattvas, from the first stage of aspiration to the highest stage, [i.e., the influence of Suchness as reflected] in the mentality which regards external objects as unreal. This is called the influence of Suchness in the form of the "Bliss-body" (Sambhogakaya). It has an infinite number of corporeal forms, each form has an infinite number of major marks, and each major mark has an infinite number of subtle marks. The land where it has its abode has innumerable adornments. It manifests itself without any bounds; its manifestations are inexhaustible and free from any limitations. It manifests itself in accordance with the needs of sentient beings; and yet it always remains firm without destroying or losing itself. These excellent qualities were perfected by the pure permeation acquired by the practice of paramitas and the suprarational permeation of Suchness. Since the influence is endowed with infinite attributes of bliss, it is spoken of as the "Bliss-body".
또 범부에게 보여지는 것은 그 추색(麤色)이니,
육도(六道)에 따라서 각각 보는 것이 같지 아니하여 여러 가지 이류(異類)이며,
낙상(樂相)을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응신(應身)이라 말한다.
다음, 초발의보살 등이 보는 것은 진여법을 깊이 믿기 때문에 적은 부분으로나마 보신을 보아서 저 보신의 색상(色相)과 장엄(莊嚴) 등의 일이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어 분제를 떠났으며 오직 마음에 의하여 나타날 뿐 진여를 떠나지 않은 것임을 아는 것이다.
그러나 이 보살은 아직 스스로를 분별하고 있으니,
이는 아직 법신(法身)의 자리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정심(淨心)을 얻으면 보는 바가 미묘하여 그 작용이 점점 수승하며 이리하여 보살지진(菩薩地盡)에 이르러 보신(報身)을 보는 일이 구경(究竟)하게 되거니와,
만약 업식을 여의면 보는 상(見相)이 없어지는 것이니,
모든 부처의 법신은 피차의 색상(色相)을 서로 보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又為凡夫所見者,是其麤色;隨於六道各見不同。種種異類,非受樂相,故說為應身。復次,初發意菩薩等所見者,以深信真如法故,少分而見,知彼色相莊嚴等事,無來無去,離於分齊。唯依心現,不離直如。然此菩薩猶自分別,以未入法身位故。若得淨心,所見微妙,其用轉勝,乃至菩薩地盡,見之究竟。若離業識,則無見相。以諸佛法身,無有彼此色相迭相見故。
What is seen by ordinary men is only the coarse corporeal forms of the manifestation of Suchness. Depending upon where one is in the six transmigratory states, his vision of it will differ. The visions of it conceived by the unenlightened beings are not in a form of Bliss; this is the reason why it is called the "Transformation-body" [i.e., the body appearing in the likeness of the conceiver]. The Bodhisattvas in their first stage of aspiration and the others, because of their deep faith in Suchness, have a partial insight into the nature of the influence of Suchness. They know that the things of the Bliss-body, such as its corporeal forms, major marks, adornments, etc., do not come from without or go away, that they are free from limitations, and that they are envisioned by mind alone and are not independent of Suchness. These Bodhisattvas, however, are not free from dualistic thinking, since they have yet to enter into the stage where they gain complete realization of the Dharmakaya. If they advance to the "stage of pure-heartedness", the forms they see will be subtler and the influences of Suchness will be more excellent than ever. When they leave the last stage of Bodhisattvahood, they will perfect their insight into Suchness. When they become free from the "activating mind" they will be free from the perceiving of duality. The Dharmakaya of the Buddhas knows no such thing as distinguishing this from that.
묻기를,
“만약 모든 부처의 법신이 색상을 여의었다면 어떻게 색상을 나타낼 수 있겠는가?”
답하기를,
“곧 이 법신은 색의 체(體)이기 때문에 색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이른바 본래부터 색(色)과 심(心)은 둘이 아닌 것이니,
왜냐하면 색의 본성은 곧 지(智)인 까닭에 색의 체에 형체가 없는 것을 지신(智身)이라 하며,
지성(智性)은 곧 색(色)인 까닭에 법신이 모든 곳에 두루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나타낸 색이 분제가 없으니 중생의 마음을 따라 시방세계(十方世界)에 무량한 보살과 무량한 보신과 무량한 장엄을 나타냄에 각각 차별이 되지만 모두 분제가 없어서 서로 방해되지 아니한다.
이는 심식(心識)의 분별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진여의 자재한 용(用)의 뜻이기 때문이다.”
問曰:若諸佛法身離於色相者,云何能現色相? 答曰:即此法身是色體故,能現於色。所謂從本已來,色心不二,以色性即智故,色體無形,說名智身。以智性即色故,說名法身,遍一切處。所現之色,無有分齊。隨心能示十方世界,無量菩薩,無量報身,無量莊嚴,各各差別,皆無分齊,而不相妨。此非心識分別能知,以真如自在用義故。
Question: If the Dharmakaya of the Buddhas is free from the manifestation of corporeal form, how can it appear in corporeal form? Answer: Since the Dharmakaya is the essence of corporeal form, it is capable of appearing in corporeal form. The reason this is said is that from the beginning corporeal form and Mind have been nondual. Since the essential nature of corporeal form is identical with wisdom, the essence of corporeal form which has yet to be divided into tangible forms is called the "wisdom-body". Since the essential nature of wisdom is identical with corporeal form, the essence of corporeal form which has yet to be divided into tangible forms is called Dharmakaya pervading everywhere. Its manifested corporeal forms have no limitations. It can be freely manifested as an infinite number of Bodhisattvas, Buddhas of Bliss-body, and adornments in the ten quarters of the universe. Each of them has neither limitation nor interference. All of these are incomprehensible to the dualistic thinking of the deluded mind and consciousness, for they result from the free influence of Suchness.
② 진여문(眞如門)에 들어감 From Samsara to Nirvana
다음은 생멸문으로부터 곧 진여문에 들어가는 것을 나타내었다.
이른바 오음(五陰)의 색(色)과 심(心)을 추구해 보건대,
육진경계(六塵境界)가 필경 생각할 만한 모양이 없으며,
또한 마음에는 형상이 없어서 시방(十方)으로 찾아보아도 끝내 얻을 수가 없으니,
마치 사람이 방향을 모르기 때문에 동쪽을 서쪽이라고 하지만 방향 자체는 실로 변화된 것이 없는 것과 같다.
중생도 그러하여 무명으로 혼미하기 때문에 마음을 망념(念)이라 하지만 마음은 실로 움직이지 아니하는 것이며,
만약 관찰하여 마음에 망념(念)이 없는 줄 알면 곧 수순(隨順)하게 되어 진여문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復次,顯示從生滅門,即入真如門。所謂推求五陰,色之與心,六塵境界,畢竟無念。以心無形相,十方求之終不可得。如人迷故,謂東為西,方實不轉。眾生亦爾,無明迷故。謂心為念,心實不動。若能觀察知心無念,即得隨順入真如門故。
Lastly, how to enter into the realm of Suchness from the realm of samsara will be revealed. Examining the five components, we find that they may be reduced to matter (object) and mind (subject). The objects of the five senses and of the mind are in the final analysis beyond what they are thought to be. And the mind itself is devoid of any form or mark and is, therefore, unobtainable as such, no matter where one may seek it. Just as a man, because he has lost his way, mistakes the east for the west, though the actual directions have not changed place, so people, because of their ignorance, assume Mind (Suchness) to be what they think it to be, though Mind in fact is unaffected even if it is falsely predicated. If a man is able to observe and understand that Mind is beyond what it is thought to be, then he will be able to conform to and enter the realm of Suchness.
(2) 사집(邪執)을 대치함 The Correction of Evil Attachments
사집(邪執)을 대치한다는 것은 일체의 사집이 모두 아견(我見)에 의하는 것이니,
만약 나(我)를 여의면 곧 사집이 없는 것이다.
이 아견(我見)에 두 가지가 있다.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인아견(人我見)이고,
둘째는 법아견(法我見)이다.
對治邪執者,一切邪執,皆依我見,若離於我,則無邪執。是我見有二種,云何為二?一者、人我見,二者、法我見。
All evil attachments originate from biased views; if a man is free from bias, he will be free from evil attachments. There are two kinds of biased view: one is the biased view held by those who are not free from the belief in atman [i.e., ordinary men]; the other is the biased view held by those who believe that the components of the world are real [i.e., the Hinayanists].
① 인아견(人我見) The Biased Views Held by Ordinary Men
인아견(人我見)이란 모든 범부에 의하여 말해지는 것으로 다섯 가지가 있다.
무엇이 다섯 가지인가?
첫째는 경(經)에서 ‘여래 법신이 필경 적막하여 허공과 같다’고 하는 말을 듣고,
이것이 집착을 깨뜨리기 위한 것인 줄 모르기 때문에 곧 허공이 여래성(如來性)이라 여기는 것이니,
이를 어떻게 대치하는가?
허공상(虛空相)은 망법(妄法)인지라 체가 없어 여실하지 못한 것이나,
색에 대하기 때문에 이 볼만한 상이 있는 것이어서 마음으로 하여금 생멸케 하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색법(色法)이 본래 마음이요 실로 밖의 색이 없는 것이니,
만약 밖의 색이 없다면 허공의 상도 없음을 밝힌 것이다.
소위 일체의 경계가 오직 마음에서 망령되이 일어나기 때문에 있는 것이니,
만약 마음이 망령되이 움직이는 것을 여의면 일체의 경계가 멸하고,
오직 하나의 진심(眞心)으로서 두루하지 않은 바가 없는 것이다.
이는 여래의 광대한 성지(性智)의 구경의 뜻을 말한 것이요,
허공상과 같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人我見者,依諸凡夫說有五種,云何為五?一者、聞修多羅說:「如來法身,畢竟寂寞,猶如虛空。」以不知為破著故,即謂虛空是如來性。云何對治?明虛空相是其妄法,體無不實,以對色故有,是可見相,令心生滅。以一切色法,本來是心,實無外色。若無外色者,則無虛空之相。所謂一切境界,唯心妄起故有;若心離於妄動,則一切境界滅,唯一真心,無所不遍。此謂如來廣大性智究竟之義,非如虛空相故。
There are five kinds of biased views held by ordinary men which may be discussed. Hearing that it is explained in the sutra that the Dharmakaya of the Tathagata is, in the final analysis, quiescent, like empty space, ordinary men think that the nature of the Tathagata is, indeed, the same as empty space, for they do not know that the purpose of the sutra is to uproot their adherence. Question: How is this to be corrected? Answer: The way to correct this error is to understand clearly that "empty space" is a delusive concept, the substance of which is nonexistent and unreal. It is merely predicated in relation to its correlative corporeal objects. If it is taken as a being termed nonbeing, a negative being, then it should be discarded, because it causes the mind to remain in samsara. In fact there are no external corporeal objects, because all objects are originally of the mind. And as long as there are no corporeal objects at all, "empty space" cannot be maintained. All objects are of the mind alone; but when illusions arise, objects which are regarded as real appear. When the mind is free from its deluded activities, then all objects imagined as real vanish of themselves. What is real, the one and true Mind, pervades everywhere. This is the final meaning of the Tathagata's great and comprehensive wisdom. The Dharmakaya is, indeed, unlike "empty space".
두 번째는 수다라(修多羅)에서 ‘세간의 모든 법이 필경에는 체(體)가 공(空)하며,
내지 열반․진여의 법도 필경에는 공한지라 본래부터 스스로 공하여 일체의 상(相)을 여의었다’고 하는 말을 듣고서 집착을 깨뜨리기 위한 것인 줄 모르기 때문에 곧 진여․열반의 본성이 오로지 공(空)이라 여기는 것이니,
어떻게 대치(對治)하는가?
진여 법신은 자체(自體)가 공하지 아니하여 무량한 성공덕(性功德)을 구족했기 때문임을 밝힌 것이다.
二者,聞修多羅說:「世間諸法畢竟體空,乃至涅槃真如之法亦畢竟空。從本已來自空,離一切相。」以不知為破著故,即謂真如涅槃之性唯是其空。云何對治?明真如法身自體不空,具足無量性功德故。
Hearing that it is explained in the sutra that all things in the world, in the final analysis, are empty in their substance, and that nirvana or the principle of Suchness is also absolutely empty from the beginning and devoid of any characteristics, they, not knowing that the purpose of the sutra is to uproot their adherence, think that the essential nature of Suchness or nirvana is simply empty. Question: How is this to be corrected? Answer: The way to correct this error is to make clear that Suchness or the Dharmakaya is not empty, but is endowed with numberless excellent qualities.
세 번째는 수다라에서 ‘여래장은 증감이 없어서 체가 일체 공덕의 법을 갖추었다’고 하는 말을 듣고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곧 여래장은 색․심법의 자상(自相)과 차별이 있다고 여기니,
어떻게 대치하는가?
오직 진여의 뜻에 의해 말하였기 때문이며,
생멸염(生滅染)의 뜻에 의하여 나타냄을 차별(差別)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三者,聞修多羅說:「如來之藏無有增減,體備一切功德之法。」以不解故,即謂如來之藏,有色、心法自相差別。云何對治?以唯依真如義說故;因生滅染義示現說差別故。
Hearing that it is explained in the sutra that there is no increase or decrease in the Tathagata-garbha and that it is provided in its essence with all excellent qualities, they, not being able to understand this, think that in the Tathagata-garbha there is plurality of mind and matter. Question: How is this to be corrected? Answer: They should be instructed that the statement in the sutra that "there is no increase or decrease in the Tathagata-garbha" is made only in accordance with the absolute aspect of Suchness, and the statement that "it is provided with all excellent qualities" is made in accordance with the pluralistic outlook held by the defiled minds in samsara.
네 번째는 수다라에서 ‘모든 세간의 생사의 염법이 다 여래장에 의하여 있는지라 일체의 모든 법이 진여를 여의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여래장 자체에 일체 세간의 생사(生死)등의 법을 갖추었다고 여기니,
어떻게 대치하는가?
여래장은 본래부터 항하(恒河)의 모래보다 많은 모든 정공덕(淨功德)이 있어서 진여의 뜻을 여의지도 않고 끊지도 아니하여 그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며,
항하의 모래보다 많은 번뇌의 염법이 오직 망령되이 있는 것이요,
그 자성(性)은 본래부터 없는 것이니,
무시(無始)의 때로부터 일찍이 여래장과 상응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여래장의 체(體)에 망법(妄法)이 있다면 증회(證會)하여서 영원히 망법을 없앤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四者,聞修多羅說:「一切世間生死染法,皆依如來藏而有,一切諸法不離真如。」以不解故,謂如來藏自體,具有一切世間生死等法。云何對治?以如來藏從本已來,唯有過恆沙等諸淨功德,不離、不斷,不異真如義故。以過恆沙等煩惱染法,唯是妄有,性自本無,從無始世來未曾與如來藏相應故。若如來藏體有妄法,而使證會永息妄者,則無是處故。
Hearing that it is explained in the sutra that all defiled states of samsara in the world exist on the ground of the Tathagata-garbha and that they are therefore not independent of Suchness, they, not understanding this, think that the Tathagata-garbha literally contains in itself all the defiled states of samsara in the world. Question: How is this to be corrected? Answer: In order to correct this error it should be understood that the Tathagata-garbha, from the beginning, contains only pure excellent qualities which, outnumbering the sands of the Ganges, are not independent of, severed from, or different from Suchness; that the soiled states of defilement which, outnumbering the sands of the Ganges, are not independent of, severed from, or different from Suchness; that the soiled states of defilement which, outnumbering the sands of the Ganges, merely exist in illusion; are, from the beginning, nonexistent; and from the beginningless beginning have never been united with the Tathagata-garbha. It has never happened that the Tathagata-garbha contained deluded states in its essence and that it induced itself to realize Suchness in order to extinguish forever its deluded states.
다섯 번째는 수다라에서 ‘여래장에 의하기 때문에 생사가 있으며,
여래장에 의하기 때문에 열반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말을 듣고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중생은 처음이 있다고 하고,
처음을 보기 때문에 또한 여래가 얻은 열반이 마침이 있어서 다시 중생이 된다고 하니,
어떻게 대치하는가? 여래장은 전제(前際 : 시초)가 없기 때문에 무명의 상(相)도 시작함이 없으니 만약 삼계(三界) 밖에 다시 중생이 처음 일어남이 있다고 한다면 곧 이는 외도경(外道經)의 설이며,
또 여래장은 후제(後際 : 마지막)가 없으니 모든 부처가 얻은 열반이 그것과 상응하여 곧 후제가 없기 때문이다.
五者,聞修多羅說:「依如來藏故有生死,依如來藏故得涅槃。」以不解故,謂眾生有始。以見始故,復謂如來所得涅槃有其終盡,還作眾生。云何對治?以如來藏無前際故,無明之相亦無有始。若說三界外更有眾生始起者,即是外道經說。又如來藏無有後際,諸佛所得涅槃與之相應,則無後際故。
Hearing that it is explained in the sutra that on the ground of the Tathagata-garbha there is samsara as well as the attainment of nirvana, they, without understanding this, think that there is a beginning for sentient beings. Since they suppose a beginning, they suppose also that the nirvana attained by the Tathagata has an end and that he will in turn become a sentient being. Question: How is this to be corrected? Answer: The way to correct this error is to explain that the Tathagata-garbha has no beginning, and that therefore ignorance has no beginning. If anyone asserts that sentient beings came into existence outside this triple world, he holds the view given in the scriptures of the heretics. Again, the Tathagata-garbha does not have an end; and the nirvana attained by the Buddhas, being one with it, likewise has no end.
② 법아견(法我見) The Biased Views Held by the Hinayanists
법아견(法我見)이란 이승의 둔근(鈍根)에 의하기 때문에 여래가 다만 그들을 위하여 인무아(人無我)만을 설하였으며,
이 설함이 구경(究竟)하지 않기 때문에 오음생멸(五陰生滅)의 법이 있음을 보고 생사를 두려워하여 망령되이 열반을 취하는 것이니,
어떻게 대치하는가?
오음법(五陰法)은 그 자성이 나지 않는 것이며,
따라서 멸함도 없어서 본래 열반이기 때문이다.
法我見者,依二乘鈍根故,如來但為說人無我。以說不究竟,見有五陰生滅之法,怖畏生死,妄取涅槃。云何對治?以五陰法自性不生,則無有滅,本來涅槃故。
Because of their inferior capacity, the Tathagata preached to the Hinayanists only the doctrine of the nonexistence of atman and did not preach his doctrines in their entirety; as a result, the Hinayanists have come to believe that the five components, the constituents of samsaric existence, are real; being terrified at the thought of being subject to birth and death, they erroneously attach themselves to nirvana. Question: How is this to be corrected? Answer: The way to correct this error is to make clear that the five components are unborn in their essential nature and, therefore, are imperishable - that what is made of the five components is, from the beginning, in nirvana.
다음에 망집(妄執)을 끝까지 다 여읜다는 것은 염법과 정법이 모두 서로 의지하는 것이어서 말할 만한 자상이 없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일체의 법이 본래부터 색(色)도 아니요 심(心)도 아니며, 지(智)도 아니요 식(識)도 아니며, 유(有)도 아니요 무(無)도 아니어서 필경에 그 모양을 말할 수 없는데도 말함이 있는 것은 여래의 교묘한 방편으로 언설을 빌어 중생을 인도하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 취지란 모두 망념을 떠나 진여에 돌아가게 하기 위한 것이니,
일체법을 생각하면 마음을 생멸케 하여 참된 지혜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復次,究竟離妄執者,當知染法淨法皆悉相待,無有自相可說。是故一切法從本已來,非色非心,非智非識,非有非無,畢竟不可說相。而有言說者,當知如來善巧方便,假以言說引導眾生。其旨趣者,皆為離念,歸於真如。以念一切法令心生滅,不入實智故。
Finally, in order to be completely free from erroneous attachments, one should know that both the defiled and the pure states are relative and have no particular marks of their own-being that can be discussed. Thus, all things from the beginning are neither matter nor mind, neither wisdom nor consciousness, neither being nor non-being; they are ultimately inexplicable. And yet they are still spoken of. It should be understood that the Tathagatas, applying their expedient means, make use of conventional speech in a provisional manner in order to guide people, so that they can be free from their deluded thoughts and can return to Suchness; for if anyone thinks of anything as real and absolute in its own right, he causes his mind to be trapped in samsara and consequently he cannot enter the state filled with true insight [i.e., enlightenment].
(3) 도(道)에 발심하여 나아가는 모양을 분별함 Analysis of the Types of Aspiration for Enlightenment, or The Meanings of Yana
분별발취도상(分別發趣道相)이란 모든 여러 부처가 증득한 도에 모든 보살이 발심, 수행하여 나아가는 뜻을 말하기 때문이다.
대략 발심(發心)을 마하면 세 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신성취발심(信成就發心)이요,
둘째는 해행발심(解行發心)이요,
셋째는 증발심(證發心)이다.
分別發趣道相者,謂一切諸佛所證之道,一切菩薩發心修行趨向義故。略說發心有三種,云何為三?一者、信成就發心,二者、解行發心,三者,證發心。
All Bodhisattvas aspire to the enlightenment (bodhi; Chinese, tao) realized by all the Buddhas, disciplining themselves to this end, and advancing toward it. Briefly, three types of aspiration for enlightenment can be distinguished. The first is the aspiration for enlightenment through the perfection of faith. The second is the aspiration for enlightenment through understanding and through deeds. The third is the aspiration for enlightenment through insight.
① 신성취발심(信成就發心) The Aspiration for Enlightenment through the Perfection of Faith
신성취발심이란 어떤 사람에 의하여 어떤 행실을 닦아서 믿음이 성취되어 발심(發心)을 할 수 있는 것인가?
이른바 부정취중생(不定聚衆生)에 의하여 훈습의 힘과 선근(善根)의 힘이 있으므로 업의 과보를 믿고 십선(十善)을 일으키며,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무상보리(無上菩提)를 구하고자 하며, 여러 부처를 만나 직접 받들어 공양하고 신심(信心)을 수행한다.
이리하여 일만 겁(劫)을 지나서 신심이 성취되기 때문에 모든 부처와 보살이 가르쳐서 발심케 하니,
혹은 대비(大悲)에 의하여 스스로 발심케 하며,
혹은 정법(正法)이 없어지려 함에 의해서 호법(護法)의 인연으로 스스로 발심케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신심이 성취되어 발심하게 된 사람은 정정취(正定聚)에 들어가 필경 퇴전하지 아니하니,
이를 여래종(如來種)중에 머물러 정인(正因)과 상응한다고 한다.
만약 어떤 중생이 선근이 미소(微少)하여 아득히 먼 옛날부터 번뇌가 매우 두텁다면 비록 부처를 만나 공양하게 되더라도 인천(人天)의 종자를 일으키고,
혹은 이승(二乘)의 종자를 일으킨다.
설사 대승을 구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근기(根器)가 결정되지 아니하여 어떤 때는 나아가고 어떤 때는 물러나며,
혹 여러 부처에게 공양함이 있더라도 아직 일만 겁(劫)을 지나지 아니하여 중도에 연(緣)을 만나 또한 발심함이 있다.
이른바 부처의 색상(色相)을 보고 그 마음을 일으키며,
혹은 여러 스님에게 공양함에 의하여 그 마음을 일으키며,
혹은 이승인의 가르침에 의하여 마음을 일으키며,
혹은 다른 사람에게 배워 마음을 일으킨다.
이와 같은 발심들은 모두 결정되지 아니한 것이니,
나쁜 인연을 만나면 혹 퇴실(退失)하여 이승지(二乘地)에 떨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信成就發心者,依何等人?修何等行?得信成就堪能發心?所謂依不定聚眾生,有熏習善根力故;信業果報,能起十善,厭生死苦,欲求無上菩提,得值諸佛,親承供養,修行信心。經一萬劫,信心成就故,諸佛菩薩教令發心;或以大悲故,能自發心;或因正法欲滅,以護法因緣,能自發心;如是信心成就得發心者,入正定聚,畢竟不退;名住如來種中,正因相應。若有眾生善根微少,久遠已來煩惱深厚,雖值於佛,亦得供養,然起人天種子,或起二乘種子。設有求大乘者,根則不定,若進若退。或有供養諸佛未經一萬劫,於中遇緣亦有發心,所謂:見佛色相而發其心;或因供養眾僧而發其心;或因二乘之人教令發心;或學他發心;如是等發心,悉皆不定,遇惡因緣,或便退失墮二乘地。
Question: By whom and through what kind of discipline can faith be perfected so that the aspiration for enlightenment may be developed? Answer: Among those who belong to the group of the undetermined, there are some who, by virtue of their excellent capacity for goodness developed through permeation, believe in the law of retribution of karma and observe the ten precepts. They loathe the suffering of samsara and wish to seek the supreme enlightenment. Having been able to meet the Buddhas, they serve them, honor them, and practice the faith. Their faith will be perfected after ten thousand aeons. Their aspiration for enlightenment will be developed either through the instruction of the Buddhas and the Bodhisattvas, or because of their great compassion toward their suffering fellow beings, or from their desire to preserve the good teaching from extinction. Those who are thus able to develop their aspiration through the perfection of faith will enter the group of the determined and will never retrogress. They are called the ones who are united with the correct cause for enlightenment and who abide among those who belong to the Tathagata family. There are, however, people among those who belong to the group of the undetermined whose capacity for goodness is slight and whose defilements, having accumulated from the far distant past, are deep-rooted. Though they may also meet the Buddhas and honor them, they will develop the potentiality merely to be born as men, as dwellers in heaven, or as followers of the Hinayana. Even if they should seek after the Mahayana, they would sometimes progress and sometimes regress because of the inconsistent nature of their capacity. And also there are some who honor the Buddhas and who, before ten thousand aeons have passed, will develop an aspiration because of some favorable circumstances. These circumstances may be the viewing of the Buddhas' corporeal forms, the honoring of monks, the receiving of instructions from the followers of the Hinayana, or the imitation of others' aspiration. But these types of aspiration are all inconsistent, for if the men who hold them meet with unfavorable circumstances, they will relapse and fall back into the stage of attainment of the followers of the Hinayana.
다음에 신성취발심(信成就發心)이란 어떠한 마음을 밝히는 것인가?
대략 말하자면 세 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직심(直心)이니 진여법을 바로 생각하기 때문이요,
둘째는 심심(深心)이니 일체의 모든 선행을 이루기 좋아하기 때문이요,
셋째는 대비심(大悲心)이니 모든 중생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하기 때문이다.
묻기를,
“위에서 법계(法界)는 하나의 상(相)이며 불체(佛體)는 둘이 없다고 하였는데 무슨 까닭으로 오직 진여만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다시 모든 선행을 배우려고 하는 것인가?”
답하기를,
“비유컨대 큰 마니보(摩尼寶)가 그 체성(體性)은 맑고 깨끗한 것이지만 거친 광석의 때를 가지고 있어 만약 사람이 마니보의 깨끗한 본성을 생각하면서도 방편(方便)으로써 갖가지로 갈고 다듬지 않으면 끝내 깨끗해질 수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중생의 진여의 법도 그 체성이 텅 비고 깨끗하나 한량없는 번뇌의 더러운 때가 있으니,
만약 사람이 비록 진여(眞如)를 생각하지만 방편으로써 갖가지로 훈습하여 닦지 않으면 또한 깨끗해질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때가 한량이 없어 모든 법에 두루하기 때문에 모든 선행을 닦아서 대치하는 것이니,
만약 사람이 모든 선법(善法)을 수행하면 절로 진여법에 귀순하기 때문이다.
復次,信成就發心者,發何等心?略說有三種。云何為三?一者、直心,正念真如法故;二者、深心,樂集一切諸善行故;三者、大悲心,欲拔一切眾生苦故。問曰:上說法界一相,佛體無二。何故不唯念真如,復假求學諸善之行?答曰:譬如大摩尼寶,體性明淨,而有礦穢之垢;若人雖念寶性,不以方便種種磨治,終無得淨。如是眾生真如之法體性空淨,而有無量煩惱染垢;若人雖念真如,不以方便種種熏修,亦無得淨。以垢無量遍一切法故,修一切善行以為對治。若人修行一切善法,自然歸順真如法故。
Now, in developing the aspiration for enlightenment through the perfection of faith, what kind of mind is to be cultivated? Briefly speaking, three kinds can be discussed. The first is the mind characterized by straightforwardness, for it correctly meditates on the principle of Suchness. The second is the mind of profoundness, for there is no limit to its joyful accumulation of all kinds of goodness. The third is the mind filled with great compassion, for it wishes to uproot the sufferings of all sentient beings. Question: Earlier it has been explained that the World of Reality is one, and that the essence of the Buddhas has no duality. Why is it that people do not meditate of their own accord on Suchness alone, but must learn to practice good deeds? Answer: Just as a precious gem is bright and pure in its essence but is marred by impurities, so is a man. Even if he meditates on his precious nature, unless he polishes it in various ways by expedient means, he will never be able to purify it. The principle of Suchness in men is absolutely pure in its essential nature, but is filled with immeasurable impurity of defilements. Even if a man meditates on Suchness, unless he makes an effort to be permeated by it in various ways by applying expedient means, he certainly cannot become pure. Since the state of impurity is limitless, pervading throughout all states of being, it is necessary to counteract and purify it by means of the practice of all kinds of good deeds. If a man does so, he will naturally return to the principle of Suchness.
대략 방편을 설명하자면 네 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행근본방편(行根本方便)이다.
모든 법은 자성(自性)이 생김이 없음을 보고 망견(妄見)을 여의어 생사에 머물지 아니하며,
모든 법이 인연으로 화합하여 업과(業果)를 잃지 아니함을 보고 대비를 일으켜 여러 복덕(福德)을 닦아 중생을 섭화(攝化)하여 열반에 머물지 아니함을 말하니,
이는 법성의 주착(住着)함이 없음에 수순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능지방편(能止方便)이다.
자기의 허물을 부끄러워하고 뉘우쳐서 모든 악법을 그치게 하여 증장하지 않게 함을 말하는 것이니,
이는 법성의 모든 허물을 여의는 것에 수순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선근을 일으켜 증장시키는 방편(發起善根增長方便)이다.
삼보(三寶)에게 부지런히 공양하고 예배하며,
모든 부처를 찬탄하고 따라 기뻐하며 권청(勸請)하여 이와 같이 삼보를 애경(愛敬)하는 순후(淳厚)한 마음 때문에 믿음이 증장되어 무상의 도를 구하는 데 뜻을 두며,
또 불(佛)․법(法)․승(僧)의 힘으로 보호됨에 의하여 업장(業障)을 녹이고 선근이 퇴전하지 않음을 말하니,
이는 법성의 치장(癡障)을 여의는 것에 수순하기 때문이다.
넷째는 대원평등방편(大願平等方便)이다.
미래에 다하도록 모든 중생을 교화, 제도하여 남음이 없게 하여 모두 무여열반(無餘涅槃)을 이루도록 발원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이는 법성의 단절됨이 없음을 수순하기 때문이며,
법성이 광대하여 모든 중생에 두루하여 평등하여 둘이 없으며 피차(彼此)를 생각하지 아니하여 구경에 적멸(寂滅)하기 때문이다.”
略說方便有四種。云何為四?一者、行根本方便。謂觀一切法自性無生,離於妄見,不住生死;觀一切法因緣和合,業果不失,起於大悲,修諸福德,攝化眾生,不住涅槃。以隨順法性無住故。二者、能止方便。謂慚愧悔過,能止一切惡法不令增長。以隨順法性離諸過故。三者,發起善根增長方便。謂勤供養、禮拜三寶、讚歎、隨喜、勸請諸佛。以愛敬三寶淳厚心故,信得增長,乃能志求無上之道。又因佛、法、僧力所護故,能消業障,善根不退。以隨順法性離癡障故。四者,大願平等方便。所謂:發願盡於未來,化度一切眾生使無有餘,皆令究竟無餘涅槃。以隨順法性無斷絕故。法性廣大,遍一切眾生,平等無二,不念彼此,究竟寂滅故。
As to the expedient means, there are, in short, four kinds: The first is the fundamental means to be practiced. That is to say, a man is to meditate on the fact that all things in their essential nature are unborn, divorcing himself from deluded views so that he does not abide in samsara. At the same time he is to meditate on the fact that all things are the products of the union of the primary and coordinating causes, and that the effect of karma will never be lost. Accordingly he is to cultivate great compassion, practice meritorious deeds, and accept and transform sentient beings equally without abiding in nirvana, for he is to conform himself to the functions of the essential nature of Reality (dharmata) which knows no fixation. The second is the means of stopping evils. The practice of developing a sense of shame and repentance can stop all evils and prevent them from growing, for one is to conform oneself to the faultlessness of the essential nature of Reality. The third is the means of increasing the capacity for goodness that has already been developed. That is to say, a man should diligently honor and pay homage to the Three treasures, and should praise, rejoice in, and beseech the Buddhas. Because of the sincerity of his love and respect for the Three Treasures, his faith will be strengthened and he will be able to seek the unsurpassed enlightenment. Furthermore, being protected by the Buddha, the Dharma, and the Sangha, he will be able to wipe out the hindrances of evil karma. His capacity for goodness will not retrogress because he will be conforming himself to the essential nature of Reality, which is free from hindrances produced by stupidity. The fourth is the means of the great vow of universal salvation. This is to take a vow that one will liberate all sentient beings, down to the last one, no matter how long it may take to cause them to attain the perfect nirvana, for one will be conforming oneself to the essential nature of Reality which is characterized by the absence of discontinuity. The essential nature of Reality is all-embracing, and pervades all sentient beings; it is everywhere the same and one without duality; it does not distinguish this from that, because it is, in the final analysis, in the state of quiescence.
보살이 이 마음을 내기 때문에 조금이나마 법신을 보게 되며, 법신을 보기 때문에 그 원력(願力)에 따라서 여덟 가지로 나타내어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것이니,
이른바 도솔천(兜率天)으로부터 나와서 모태(母胎)에 들어가고 모태에 머물고 모태에서 나와서 출가하여 성도(成道)하고 법륜을 굴리며 열반에 듦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보살을 아직 법신이라 하지 않는 것은 그가 과거 한량없는 때로부터 유루(有漏)의 업을 끊어버리지 못하고 그 나는 바에 따라서 미세한 고통과 상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업의 계박이 아닌 것이니, 대원(大願)에 의하여 자재한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수다라 중에서 ‘혹 악취(惡趣)에 물러나 떨어짐이 있다’고 말한 것과 같은 것은 실제로 물러나 떨어지는 것이 아니요,
다만 초학보살(初學菩薩)로서 아직 정위(正位)에 들지 못하고 게으름을 피우는 자를 위하여 두려워하게 하여 저로 하여금 용맹케 하기 위한 것이다.
또 이 보살이 한 번 발심한 후에는 겁약한 마음을 멀리 여의어 이승지(二乘地)에 떨어짐을 끝내 두려워하지 않으며,
가령 무량무변한 아승기겁(阿僧祇劫)에 어려운 행실을 부지런히 애써야만 열반을 얻는다는 것을 듣더라도 겁내어 좌절하지 않는 것이니,
일체법이 본래부터 스스로 열반임을 믿어 알기 때문이다.
菩薩發是心故,則得少分見於法身。以見法身故,隨其願力能現八種利益眾生。所謂:從兜率天退,入胎,住胎,出家,成道,轉法輪,入於涅槃。然是菩薩未名法身,以其過去無量世來有漏之業未能決斷,隨其所生與微苦相應,亦非業繫,以有大願自在力故。如修多羅中,或說有退墮惡趣者,非其實退,但為初學菩薩未入正位而懈怠者恐怖,令彼勇猛故。又是菩薩一發心後,遠離怯弱,畢竟不畏墮二乘地。若聞無量無邊阿僧祇劫,勤苦難行證得涅槃,亦不怯弱,以信知一切法從本已來自涅槃故。
When a Bodhisattva develops this aspiration for enlightenment through faith, he will be able, to a certain extent, to realize the Dharmakaya. Because of this realization of the Dharmakaya, and because he is led by the force of the vow that he made to liberate all sentient beings, he is able to present eight types of manifestation of himself for the benefit of all sentient beings. These are: the descent from the Tushita heaven; the entrance into a human womb; the stay in the womb; the birth; the renunciation; the attainment of enlightenment; the turning of the wheel of the Dharma (doctrine); and the entrance into nirvana. However, such a Bodhisattva cannot be said to have perfectly realized the Dharmakaya, for he has not yet completely destroyed the outflowing evil karma which has been accumulated from his numberless existences in the past. He must suffer some slight misery deriving from the state of his birth. However, this is due not to his being fettered by karma, but to his freely made decision to carry out the great vow of universal salvation in order to understand the suffering of others. It is said in a sutra that there are some Bodhisattvas of this kind who may regress and fall into evil states of existence, but this does not refer to a real regression. It says this merely in order to frighten and stir the heroism of the newly initiated Bodhisattvas who have not yet joined the group of the determined, and who may be indolent. Furthermore, as soon as this aspiration has been aroused in the Bodhisattvas, they leave cowardice far behind them and are not afraid even of falling into the stage of the followers of the Hinayana. Even though they hear that they must suffer extreme hardship for innumerable aeons before they may attain nirvana, they do not feel any fear, for they believe and know that from the beginning all things are of themselves in nirvana.
② 해행발심(解行發心) The Aspiration for Enlightenment through Understanding and Deeds
해행발심(解行發心)이란 더욱 수승한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니,
왜냐하면 이 보살은 처음 정신(正信)으로부터 제일 아승기겁이 다 차려고 할 때이므로 진여법에 대한 깊은 이해가 앞에 나타나 닦는 것이 상을 여의기 때문이다.
법성(法性)의 체는 간탐(慳貪 : 인색하고 욕심이 많음)이 없는 줄을 알기 때문에 그에 수순하여 보시바라밀(布施波羅密)을 수행하며,
법성은 물들어 더럽혀짐이 없어 오욕(五欲)의 허물을 여읜 줄 알기 때문에 그에 수순하여 지계(持戒)바라밀을 수행하며,
법성은 고(苦)가 없어 성내고 괴로워함을 여읜 줄 알기 때문에 그에 수순하여 인욕(忍辱)바라밀을 수행하며,
법성은 신심(身心)의 상이 없어 게으름을 여읜 줄 알기 때문에 그에 수순하여 정진(精進)바라밀을 수행하며,
법성은 항상 안정하여 있어 그 체에 어지러움이 없는 줄 알기 때문에 그에 수순하여 선정(禪定)바라밀을 수행하며,
법성은 체가 맑아서 무명을 여읜 줄 알기 때문에 그에 수순하여 반야(般若)바라밀을 수행하는 것이다.
解行發心者,當知轉勝。以是菩薩從初正信已來,於第一阿僧祇劫將欲滿故。於真如法中,深解現前,所修離相。以知法性體無慳貪故,隨順修行檀波羅密。以知法性無染,離五欲過故,隨順修行尸波羅密。以知法性無苦,離瞋惱故,隨順修行羼提波羅密。以知法性無身心相,離懈怠故,隨順修行毗黎耶波羅密。以知法性常定,體無亂故,隨順修行禪波羅密。以知法性體明,離無明故,隨順修行般若波羅密。
It should be understood that this type of aspiration is even more excellent than the former. Because the Bodhisattvas who cherish this aspiration are those who are about to finish the first term of the incalculable aeons since the time when they first had the correct faith, they have come to have a profound understanding of the principle of Suchness and to entertain no attachment to their attainments obtained through discipline. Knowing that the essential nature of Reality is free from covetousness, they, in conformity to it, devote themselves to the perfection of charity. Knowing that the essential nature of Reality is free from the defilements which originate from the desires of the five senses, they, in conformity to it, devote themselves to the perfection of precepts. Knowing that the essential nature of Reality is without suffering and free from anger and anxiety, they, in conformity to it, devote themselves to the perfection of forbearance. Knowing that the essential nature of Reality does not have any distinction of body and mind and is free from indolence, they, in conformity to it, devote themselves to the perfection of zeal. Knowing that the essential nature of Reality is always calm and free from confusion in its essence, they, in conformity to it, devote themselves to the perfection of meditation. Knowing that the essential nature of Reality is always characterized by gnosis and is free from ignorance, they, in conformity to it, devote themselves to the perfection of wisdom.
③ 증발심(證發心) The Aspiration for Enlightenment through Insight
증발심(證發心)이란 정심지(淨心地)로부터 보살구경지(菩薩究竟地)에 이르기까지 어떤 경계를 증득하는가?
소위 진여니, 전식(轉識)에 의하여 경계라고 말하지만 이 증득은 경계가 없는 것이요 오직 진여지(眞如智) 뿐이므로 법신(法身)이라 하는 것이다.
이 보살이 일념(一念)사이에 시방(十方)의 남김 없는 세계에 이르러 모든 부처에게 공양하여 법륜(法輪)을 굴리기를 청하니,
그것은 오직 중생을 개도(開導)하여 이익되게 하기 위한 것이지 문자에 의하는 것은 아니다. 혹은 지(地)를 초월하여 빨리 정각(正覺)을 이루는 것을 보이니 이는 겁약한 중생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며, 혹은 내가 한량없는 아승기겁의 기간에 불도(佛道)를 이룬다고 설하였으니 이는 게으르고 교만한 중생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무수한 방편의 불가사의함을 보이지만 실로 보살은 종성의 근(種姓根)이 같으며 발심이 곧 같고 증득한 것도 같아서 초과하는 법이 없으니, 모든 보살이 모두 다 세 아승기겁을 거치기 때문이다. 단지 중생 세계의 같지 않음과 보는 바와 듣는 바 근(根 : 능력)․욕(欲 : 희망)․성질이 다름에 따라서 행하는 것을 보이는 것도 차별이 있는 것이다.
證發心者,從淨心地,乃至菩薩究竟地。證何境界?所謂真如。以依轉識,說為境界,而此證者,無有境界。唯真如智,名為法身。是菩薩於一念頃,能至十方無餘世界,供養諸佛,請轉法輪,唯為開導,利益眾生,不依文字。或示超地,速成正覺,以為怯弱眾生故。或說我於無量阿僧祇劫,當成佛道,以為懈慢眾生故。能示如是無數方便,不可思議。而實菩薩種性根等,發心則等,所證亦等,無有超過之法;以一切菩薩皆經三阿僧祇劫故。但隨眾生世界不同,所見所聞,根欲性異,故示所行,亦有差別。
As for the Bodhisattvas of this group, who range from the "stage of pure-heartedness" to the "last stage of Bodhisattvahood", what object do they realize? They realize Suchness. We speak of it as an object because of the "evolving mind", but in fact there is no object in this realization that can be stated in terms of a subject-object relationship. There is only the insight into Suchness transcending both the seer and the seen; we call this the experience of the Dharmakaya. The Bodhisattvas of this group can, in an instant of thought, go to all worlds of the universe, honor the Buddhas, and ask them to turn the wheel of the Dharma. In order to guide and benefit all men, they do not rely on words. Sometimes, for the sake of weak-willed men, they show how to attain perfect enlightenment quickly by skipping over the stages of the Bodhisattva. And sometimes, for the sake of indolent men, they say that men may attain enlightenment at the end of numberless aeons. Thus they can demonstrate innumerable expedient means and suprarational feats. But in reality all these Bodhisattvas are the same in that they are alike in their lineage, their capacity, their aspiration, and their realization of Suchness; therefore, there is no such thing as skipping over the stages, for all Bodhisattvas must pass through the three terms of innumerable aeons before they can fully attain enlightenment. However, because of the differences in the various beings, there are also different ways of teaching them what to practice.
또 이 보살의 발심상(發心相)이란 세 가지 마음의 미세한 상이 있으니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진심(眞心)이니 분별이 없기 때문이요, 둘째는 방편심(方便心)이니 자연히 두루 행하여 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때문이요, 셋째는 업식심(業識心)이니 미세하게 생멸하기 때문이다.
又是菩薩發心相者,有三種心微細之相。云何為三?一者、真心,無分別故。二者、方便心,自然遍行利益眾生故。三者、業識心,微細起滅故。
The characteristics of the aspiration for enlightenment entertained by a Bodhisattva belonging to this group can be identified in terms of the three subtle modes of mind. The first is the true mind, for it is free from false intellectual discrimination. The second is the mind capable of applying expedient means, for it pervades everywhere spontaneously and benefits sentient beings. The third is the mind subject to the influence of karma operating in subconsciousness, for it appears and disappears in the most subtle ways.
또 이 보살은 공덕이 다 이루어져서 색구경처(色究竟處)에서 모든 세간 중 가장 높고 큰 몸을 보이니, 이는 일념 상응하는 지혜로써 무명이 단번에 없어지는 것을 일체종지(一切種智)라 하며 자연히 불가사의한 작용이 있어 시방(十方)에 나타내어 중생을 이익되게 함을 말하는 것이다.
又是菩薩功德成滿,於色究竟處,示一切世間最高大身。謂以一念相應慧,無明頓盡,名一切種智,自然而有不思議業,能現十方利益眾生。
Again, a Bodhisattva of this group, when he brings his excellent qualities to perfection, manifests himself in the heaven of Akanishta (the highest heaven in the world of form according to the cosmology of Indian Buddhism) as the highest physical being in the world. Through wisdom united with original enlightenment of Suchness in an instant of thought, he suddenly extinguishes ignorance. Then he is called the one who has obtained all-embracing knowledge. Performing suprarational acts spontaneously, he can manifest himself everywhere in the universe and benefit all sentient beings.
묻기를,
“허공이 무변하기 때문에 세계가 무변하며 세계가 무변하기 때문에 중생이 무변하며 중생이 무변하기 때문에 심행(心行)의 차별도 또한 무변하니, 이와 같은 경계를 한계지을 수 없어서 알기 어려운 것이다. 만약 무명이 단절된다면 심상(心想)이 없어질 텐데 어떻게 잘 알기에 일체종지(一切種智)라 이름하는가?”
답하기를,
“일체 경계는 본래 일심(一心)으로서 상념을 떠나 있는 것이나, 중생이 경계를 잘못 보기 때문에 마음에 한정됨이 있으며, 상념을 잘못 일으켜서 법성(法性)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분명히 알지 못하는 것이다. 모든 부처와 여래는 망견, 망상을 여의어서 두루하지 않는 바가 없으며, 마음이 진실하기 때문에 곧 이는 모든 법의 본성인 것이다. 그 자체(自體)가 모든 망법을 환하게 비추어 대지(大智)의 작용이 있어 무량한 방편으로 모든 중생의 응당 알아야 할 바를 따라서 여러 가지 법의(法義)를 모두 열어 보이기 때문에 일체종지라 이름하게 된 것이다.”
問曰:虛空無邊故,世界無邊;世界無邊故,眾生無邊;眾生無邊故,心行差別亦復無邊。如是境界,不可分齊,難知難解。若無明斷,無有心想,云何能了,名一切種智。答曰:一切境界,本來一心,離於想念。以眾生妄見境界,故心有分齊,以妄起想念,不稱法性,故不能決了。諸佛如來,離於見想,無所不遍,心真實故,即是諸法之性,自體顯照一切妄法,有大智用,無量方便,隨諸眾生,所應得解,皆能開示種種法義,是故得名一切種智。
Question: Since space is infinite, worlds are infinite. Since worlds are infinite, beings are infinite. Since beings are infinite, the variety of their mentalities must also be infinite. The objects of the senses and the mind must therefore be limitless, and it is difficult to know and understand them all. If ignorance is destroyed, there will be no thoughts in the mind. How then can a comprehension that has no content be called "all-embracing knowledge"? Answer: All objects are originally of one Mind and are beyond thought determination. Because unenlightened people perceive objects in their illusion, they impose limitations in their mind. Since they erroneously develop these thought determinations, which do not correspond to Reality (dharmata), they are unable to reach any inclusive comprehension. The Buddha-Tathagatas are free from all perverse views and thoughts that block correct vision; therefore, there are no corners into which their comprehension does not penetrate. Their Mind is true and real; therefore, it is no other than the essential nature of all things. The Buddhas, because of their very nature, can shed light on all objects conceived in illusion. They are endowed with an influence of great wisdom that functions as the application of innumerable expedient means. Accommodating themselves to the capacity of understanding of various sentient beings, they can reveal to them the manifold meanings of the doctrine. This is the reason they may be called those who have "all-embracing knowledge".
또 묻기를,
“만약 모든 부처에게 자연업(自然業)이 있어서 모든 곳에 나타나 중생을 이익되게 한다면 모든 중생이 혹은 그 부처의 몸을 보거나, 혹은 신비한 변화를 보거나, 혹은 그 말씀을 들어 이익되지 않음이 없을 텐데 어찌하여 세간에서 보지 못하는 이가 많은가?”
답하기를,
“모든 부처와 여래의 법신이 평등하여 모든 곳에 두루하며 작의(作意 : 의식적인 노력)가 없기 때문에 ‘자연(自然)’이라 한 것이니 다만 중생심에 의하여 나타낸 것이다. 중생심(衆生心)이란 마치 거울과 같으니, 거울에 만약 때가 있으면, 색상(色像)이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이와 같이 중생심에도 만약 때가 있으면 법신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又問曰:若諸佛有自然業,能現一切處,利益眾生者,一切眾生,若見其身,若睹神變,若聞其說,無不得利,云何世間多不能見?答曰:諸佛如來,法身平等,遍一切處,無有作意故,而說自然,但依眾生心現。眾生心者,猶如於鏡,鏡若有垢,色像不現。如是眾生心若有垢,法身不現故。
Question: If the Buddhas are able to perform spontaneous acts, to manifest themselves everywhere, and to benefit all sentient beings, then the sentient beings should all be able, by seeing their physical forms, by witnessing their miracles, or by hearing their preachings, to gain benefit. Why is it then that most people in this world have not been able to see the Buddhas? Answer: The Dharmakaya of all the Buddhas, being one and the same everywhere, is omnipresent. Since the Buddhas are free from any fixation of thought, their acts are said to be "spontaneous". They reveal themselves in accordance with the mentalities of all the various sentient beings. The mind of the sentient being is like a mirror. Just as a mirror cannot reflect images if it is coated with dirt, so the Dharmakaya cannot appear in the mind of the sentient being if it is coated with the dirt of defile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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