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ㄴ) 정법(淨法) 훈습

通達無我法者 2008. 3. 24. 11:50

 

ㄴ) 정법(淨法) 훈습

은정희 역주/일지사/자료입력:도규희

 

 

【논】
어떻게 훈습하여 정법을 일으켜 단절시키지 않는가? 이른바 진여법이 있기 때문이니, 이 진여가 무명을 훈습하는 것이며 훈습하는 인연의 힘에 의하여 곧 망심(妄心)으로 하여금 생사(生死)의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涅槃)을 구하기를 좋아하게 하는 것이다. 이 망심에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을 구하기 좋아하는 인연이 있기 때문에 곧 진여를 훈습하여 스스로 자기의 본성을 믿어서 마음이 망령되이 움직이는 것일 뿐 앞의 경계가 없음을 알아 멀리 여의는 법을 닦는다. 이리하여 앞의 경계가 없음을 여실히 알기 때문에 여러 가지 방편으로 수순행(隨順行)을 일으켜 집착하지도 아니하고 잘못 생각하지도 아니하며, 내지 오랫동안 훈습한 힘 때문에 무명이 곧 멸하게 된다. 무명이 멸하기 때문에 마음에 일어나는 것이 없고 일어남이 없기 때문에 경계가 따라서 멸한다. 인과 연이 다 멸하기 때문에 심상이 다 없어지니, 이를 열반을 얻어 자연업(自然業)을 이룬다고 말한다.
〔云何熏習起淨法不斷. 所謂以有眞如法故, 能熏習無明. 以熏習因緣力故, 則令妄心厭生死苦, 樂求涅槃. 以此妄心有厭求因緣故, 卽熏習眞如, 自信己性, 知心妄動, 無前境界, 修遠離法. 以如實知無前境界故, 種種方便, 起隨順行, 不取不念. 乃至久遠熏習力故, 無明則滅. 以無明滅故, 心無有起. 以無起故, 境界隨滅. 以因緣俱滅故, 心相皆盡, 名得涅槃, 成自然業.〕

【소】
두 번째는 정훈(淨熏)을 밝혔다. 이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는 묻고 나중은 답하였다. 답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대략 밝히고 널리 나타내었다. 대략 밝히는 중에 먼저 진여의 훈습을 밝혔고, 두 번째는 망심의 훈습을 밝혔다. 이 중에 다섯 가지가 있으니, 처음에 ‘이 망심에 (생사를) 싫어하고 (열반을) 구하기 좋아하는 인연이 있기 때문에ㆍㆍㆍㆍㆍㆍ, 자기의 본성을 믿는다’고 한 것은 십신위(十信位) 중의 신(信)을 밝히 것이다. 두 번째 ‘마음이 망령되이 움직이는 것일 뿐 앞의 경계가 없는 것임을 알아 멀리 여의는 법을 닦는다’고 한 것은 삼현위(三賢位) 중의 수행을 나타낸 것이다. ‘앞의 경계가 없음을 여실히 알기 때문’이라는 것은 초지(初地)의 견도(見道)에서 유식관이 이루어짐을 밝힌 것이다. ‘여러 가지 방편으로ㆍㆍㆍㆍㆍㆍ, 내지 오랫동안 훈습한 힘으로‘라는 것은 십지(十地)의 수도위(修道位) 중에서 만행(萬行)을 닦음을 나타낸 것이다.‘무명이 바로 멸하고ㆍㆍㆍㆍㆍㆍ’의 아래는 다섯 번째 과지(果地)에서 열반을 증득함을 나타내었다.
〔次明淨熏. 於中有二. 先問. 後答. 答中亦二. 略明. 廣顯. 略中先明眞如熏習. 次明妄心熏習. 此中有五. 初言以此妄心乃至自信已性者, 是明十信位中信也. 次言知心妄動無前境界修遠離法者, 是顯三賢位中修也. 以如實知無前境界故者, 是明初地見道唯識觀之成也. 種種以下乃至久遠熏習力故, 是顯十地修道位中修萬行也. 無明卽滅以下, 第五顯於果地證涅槃也.〕

【논】
망심훈습의 뜻에 두 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분별사식훈습이니, 모든 범부와 이승인(二乘人) 등이 생사의 고통을 싫어함에 의하여 힘이 닿는 대로 점차로 무상도에 나아가기 때문이다. 둘째는 의훈습(意熏習)이니, 모든 보살이 발심용맹(發心勇猛:마음을 발함이 용맹함) 하여 속히 열반에 나아감을 말하기 때문이다.
〔妄心熏習義有二種. 云何爲二. 一者分別事識熏習. 依諸凡夫二乘人等, 厭生死苦, 隨力所能, 以漸趣向無上道故. 二者意熏習. 謂諸菩薩發心勇猛, 速趣涅槃故.〕

【소】
두 번째 널리 설명하는 중에서 먼저 망훈(妄熏)을 밝혔다. 이 중에 분별사식(分別事識)이란 통틀어 말하면 칠식을 다 분별사식이라 하지만, 강한 쪽으로 말하면 다만 의식만을 취하는 것이니, 이는 분별의 작용이 강하여 모든 일을 통틀어 반연하기 때문이다. 이제 이 글 중에서는 강한 쪽으로 말하였다. 이식(의식)이 모든 경계가 오직 식일뿐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 박에 실제로 경계가 있다고 집착하는 것이니, 범부와 이승(二乘)은 열반에 나아가고자 하지만 아직도 생사는 싫어 할 것, 열반은 기뻐할 것이 있는 줄 계탁하며, 이는 또 분별사식의 집착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분별사식훈습이라 하는 것이다. 의훈습(意熏習)이란 또한 업식훈습이라고도 한다. 통틀어 말하자면 다섯 가지의 식을 모두 의(意)라 이름하니, 그 뜻은 위에서 말한 것과 같으며, 근본 쪽으로 말한다면 다만 업식만을 취한다. 업식은 가장 미세하여 모든 식의 근본이 되기 때문에 이 중에서 업식을 의(意)라 하며, 이러한 업식은 견분(見分)과 상분(相分)이 아직 나뉘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보살은 마음이 망령되이 움직일 뿐 따로 경계가 없음을 알며 일체법은 오직 식(識)의 헤아림인 줄 알아서, 앞의 경계가 밖에 있다는 집착을 버리고 업식의 뜻에 따르기 때문에 업식훈습이라 이름하며 또한 의훈습이라 이름한다. 이는 무명에서 일어난 업식이 바로 발심하여 모든 행을 닦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次廣說中, 先明妄熏. 於中分別事識者. 通而言之, 七識皆名分別事識. 就强而說, 但取意識. 以分別用强, 通緣諸事故. 今此文中就强而說. 此識不知諸塵唯識, 故執心外實有境界. 凡夫二乘雖有趣向. 而猶計有生死可厭, 涅槃可欣. 不異分別事識之執. 故名分別事識熏習. 意熏習者, 亦名業識熏習. 通而言之, 五種之識皆名爲意. 義如上說. 就本而言, 但取業識. 以最微細, 作諸識本. 故於此中業識名意. 如是業識見相未分. 然諸菩薩知心妄動無別境界. 解一切法唯是識量. 捨前外執, 順業識義. 故名業識熏習. 亦名爲意熏習. 非謂無明所起業識, 卽能發心修諸行也.〕

【논】
진여훈습의 뜻에서 두 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자체상훈습(自體相熏習)이며, 둘째는 용훈습(用熏習)이다. 자체상훈습이란 무시의 때로부터 무루법(無漏法)을 갖추고 불사의업(不思議業)을 갖추며 경게성(境界性)을 짓는 것이다. 이 두 가지의 뜻에 의하여 항상 훈습하여 훈습의 힘이 있기 때문에 중생으로 하여금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을 즐겨 구하여 스스로 자기의 몸에 진여법이 있는 줄 믿어 발심하여 수행하게 하는 것이다.
묻기를, “만일 이러한 뜻과 같다면 모든 중생에게 모두 진여가 있어서 똑같이 훈습해야 할 터인데, 어찌하여 믿음이 있기도 하고 믿음이 없기도 하여 한없는 전후의 차별이 있는 것인가? 모두 동시에 스스로 진여법이 있음을 알아서 방편을 부지런히 닦아 똑 같이 열반에 들어가야 할 것이다”
답하기를, “진여는 본래 하나이지만 한량없고 가이없는 무명이 있어, 본래부터 자성이 차별되어 후박(厚薄)이 같지 않다. 그러므로 항하 모래 보다 많은 상번뇌(上煩惱)가 무명에 의하여 차별을 일으키며 아견애염번뇌(我見愛煩惱)가 무명에 의하여 차별을 일으키니, 이와 같은 일체의 번뇌가 무명에 의하여 일어난 것이어서 전후의 한량없는 차별이 있는 것이며, 오직 여래만이 이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모든 불법에 인(因)이 있고, 연(緣)이 있는 것이니, 인연이 구족하여야 법이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나무 중의 화성(火性)이 불의 정인(正因)이지만 만약 사람이 알지 못하여 방편을 빌리지 못하면 스스로 나무를 태울 수 없는 것과 같이, 중생도 그러하여 정인(正因)의 훈습하는 힘이 있으나 만약 모든 부처, 보살, 선지식(善知識) 등을 만나 그들로 연(緣)을 삼지 못한다면 스스로 번뇌를 끊고 열반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만약 외연(外緣)의 힘이 있으나 안으로 인의 정법이 아직 훈습의 힘을 갖지 못한 사람이라면 또한 구경에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을 즐겨 구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인연이 구족한 이라면 이른바 스스로 훈습하는 힘이 있고 또 모든 부처ㆍ보살 등의 자비와 원호(願護)함을 받기 때문에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열반이 있음을 믿어 선근을 닦아 익히며, 선근을 닦는 일이 성숙하기 때문에 모든 부처와 보살이 보여주고 가르쳐 주어 중생을 이롭게 하고 기쁘게 함을 만나 차츰 일을 이루어 나아가 열반의 도에 향할 수 있을 것이다.”
〔眞如熏習義有二種. 云何爲二. 一者自體相熏習. 二者用熏習. 自體相熏習者. 從無始世來, 具無漏法. 備有不思議業, 作境界之性. 依此二義恒常熏習. 以有力故, 能令衆生厭生死苦, 樂求涅槃, 自信己身有眞如法, 發心修行. 問曰. 若如是義者, 一切衆生悉有眞如, 等皆熏習. 云何有信無信, 無量前後差別. 皆應一時自知有眞如法, 勤修方便, 等入涅槃. 答曰. 眞如本一. 而有無量無邊無明, 從本已來, 自性差別, 厚薄不同故. 過恒沙等上煩惱, 依無明起差別. 我見愛染煩惱, 依無明起差別. 如是一切煩惱, 依於無明所起, 前後無量差別. 唯如來能知故. 又諸佛法有因有緣. 因緣具足. 乃得成瓣. 如木中火性, 是火正因. 若無人知, 不假方便, 能自燒木, 無有是處. 衆生亦爾. 雖有正因熏習之力, 若不遇諸佛菩薩善知識等以之爲緣, 能自斷煩惱入涅槃者, 則無有是處. 若雖有外緣之力, 而內淨法未有熏習力者, 亦不能究竟厭生死苦樂求涅槃. 若因緣具足者, 所謂自有熏習之力, 又爲諸佛菩薩等慈悲願護故, 能起厭苦之心, 信有涅槃, 修習善根. 以修善根成熟故, 則値諸佛菩薩示敎利喜, 乃能進趣向涅槃道.〕

【소】
진여훈습 중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수를 들어 총괄적으로 나타냈으며, 둘째는 수에 의하여 이름을 열거하였고, 셋째는 상을 분별하였다. 상을 분별하는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각각 밝혔고, 둘째는 합해서 풀이하였다, 처음 각각 밝히는 중에서 먼저 자체훈습(自體熏習)을 밝혔다. 이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곧 바로 밝혔고, 둘째는 의심을 제거하였다. 처음 중에 ‘무루법을 갖추고 불사의한 업을 갖추었다’고 한 것은 본각불공의 문에 있는 것이며, ‘경계성을 짓는다’는 것은 여실공문의 경계에 나아가서 말한 것이니, 이러한 본래 가지고 있는 경지(境智)의 힘에 의하여 암암리에 망심을 훈습하여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을 좋아하는 마음 등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묻기를‘의 아래는 왕복하여 의심을 제거하는 것이니, 묻는 뜻은 알 수 있을 것이다. 답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번뇌의 후박(厚薄)에 의하여 열반에 들어감이 똑같지 않음을 밝혔고, 뒤에서는 연(緣)의 만남이 가지런하지 않음을 들어 그 같지 않음을 나타내었다. 처음 중에 ‘항하의 모래보다 많은 상번뇌’라고 한 것은 모든 법문을 잘 몰라서 사(事)에 대하여 앎이 없는 것이니, 이는 소지장에서 포섭하는 것이요, ‘아견애염번뇌’란 번뇌장에 포섭되는 것이다. 답의 뜻은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모든 부처’이하는 연의 만남이 가지런하지 않음을 밝히는 것이며, 법(法)ㆍ유(喩)ㆍ합(合)이 있으니 글의 양상을 알 수 있을 것이다.
〔眞如熏習中有三. 一者擧數總標. 二者依數列名. 三者辨相. 辨相中有二. 一者別明. 二者合釋. 初別明中, 先明自體熏習. 於中有二. 一者直明. 二者遺疑. 初中言具無漏法備有不思議業者, 是在本覺不空門也. 作境界之性者, 是就如實空門境說也. 依此本有境智之力, 冥熏妄心, 令起厭樂等也. 問曰以下, 往復除疑. 問意可知. 答中有二. 初約煩惱厚薄明其不等. 後擧遇緣參差顯其不等. 初中言過?沙等上煩惱者, 迷諸法門事中無知, 此是所知障所攝也. 我見愛染煩惱者, 此是煩惱障所攝也. 答意可知. 又諸佛以下, 明緣參差. 有法喩合. 文相可見也.〕

【논】
용훈습(用熏習)이란 곧 중생의 외연(外緣)의 힘이니, 이러한 외연에 한량없는 뜻이 있으나 대략 말하자면 두 가지가 있다.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차별연이고, 둘째는 평등연이다. 차별연이란 이 사람이 모든 부처와 보살 등에 의하여 처음 발의하여 비로소 구도할 때로부터 부처가 되기에 이르기까지 그 가운데에서 혹은 부처를 보기도 하고 혹은 생각하기도 함에 있어, 어떤 경우는 권속(眷屬)ㆍ부모ㆍ제친(諸親)이 되며, 어떤 경우는 급사(給使)가 되며, 어떤 경우는 지우(知友)가 되며, 어떤 경우는 원가(怨家)가 되며, 어떤 경우는 사섭(四攝)을 일으키며, 내지 일체의 짓는 한량없는 행위의 연이 되는 것이니 이는 대비로 훈습하는 힘을 일으켜 중생으로 하여금 선근을 증장케 하여 혹은 보거나 혹은 들어서 이익을 얻게 하기 때문이다. 이 연에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근연(近緣)이니 빨리 도탈(度脫)을 얻기 때문이고, 둘째는 원연(遠緣)이니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도탈을 얻기 때문이다. 이 근원의 두 연을 분별하면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증장행연(增長行緣)이고, 둘째는 수도연(受道緣)이다. ‘평등연(平等緣)’이란 일체의 모든 부처와 보살이 일체 중생을 도탈시키고자 하여 자연히 이들을 훈습하여 항상 버리지 아니하는 것이다. 이는 동체지력(同體智力)으로써 중생의 견문(見聞)에 따라 응하여 업용(業用)을 나타내는 것이니, 이른바 중생이 삼매(三昧)에 의하여야 평등하게 모든 부처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用熏習者. 卽是衆生外緣之力. 如是外緣有無量義. 略說二種. 云何爲二. 一者差別緣. 二者平等緣. 差別緣者. 此人依於諸佛菩薩等, 從初發意始求道時, 乃至得佛, 於中若見若念. 或爲眷屬父母諸親. 或爲給使. 或爲知友. 或爲怨家. 或起四攝. 乃至一切所作無量行緣. 以起大悲熏習之力. 能令衆生增長善根. 若見若聞得利益故. 此緣有二種. 云何爲二. 一者近緣. 速得度故. 二者遠緣. 久遠得度故. 是近遠二緣. 分別復有二種. 云何爲二. 一者增長行緣. 二者受道緣. 平等緣者. 一切諸佛菩薩, 皆願度脫一切衆生, 自然熏習恒常不捨. 以同體智力故, 隨應見聞而現作業. 所謂衆生依於三昧, 乃得平等見諸佛故.〕

【소】
용훈습 중에서 그 글에 또한 세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총체적으로 표시한 것과 이름을 열거한 것, 모양을 분별한 것이다. 두 번째 이름을 열거한 것 중에 차별연(差別緣)이란 저 범부와 이승의 분별사식훈습을 위하여 연을 짓는 것이니, 연을 짓는 자는 십신(十信)이상에서 모든 부처에 이르기까지 모두 연을 짓게 되는 것이다. 평등연이란 모든 보살의 업식훈습을 위하여 연을 짓는 것이니, 연을 짓는 자는 초지이상에서 모든 부처에 이르기까지 동체지력에 의하여서야 바야흐로 평등연을 짓기 때문이다. 세 번째 모양을 분별하는 중에 먼저 차별연을 밝혔다. 이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합하여 밝히고 펼쳐서 해석하였다. 펼쳐서 해석하는 중에 또한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는 근원(近遠)의 두 가지 연을 열었고, 뒤에는 행해(行解) 두 가지의 연을 열었다. ‘증장행연’이란 보시(布施), 지계(持戒) 등의 모든 행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수도연’이란 문(問)ㆍ사(思)ㆍ수(修)를 일으켜서 도(道)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평등연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연을 짓는 자를 밝혔고, ‘이른바’이하는 평등의 뜻을 풀이하였다. ‘삼매에 의하여 평등하게 본다’는 것은 십해이상의 모든 보살들이 부처의 보신(報身)의 무량한 상호(相好)가 모두 한게가 없어서 분제상(分齊相)을 떠났음을 보기 때문에 평등하게 ‘모든 부처를 본다’고 한 것이다. 만약 산심(散心)에서는 이와 같은 상호가 분제상을 떠나 있음을 볼 수 없을 것이니, 그러므로 ‘삼매에 의하여’라고 말하였다. 위에서부터 체(體)ㆍ용(用)의 훈습을 따로 설명하여 마쳤다.
〔用熏習中. 文亦有三. 所謂總標, 列名, 辨相. 第二列名中差別緣者, 爲彼凡夫二乘分別事識熏習而作緣也. 能作緣者, 十信以上乃至諸佛皆得作緣也. 平等緣者, 爲諸菩薩業識熏習而作緣也. 能作緣者, 初地以上乃至諸佛, 要依同體智力方作平等緣故. 第三辨相中, 先明差別緣. 於中有二. 合明. 開釋. 開釋中亦有二. 先開近遠二緣. 後開行釋二緣. 增長行緣者, 能起施戒等諸行故. 受道緣者, 起聞思修而入道故. 平等緣中有二. 先明能作緣者. 所謂以下, 釋平等義. 依於三昧平等見者. 十解以上諸菩薩等, 見佛報身無量相好, 皆無有邊. 離分齊相. 故言平等見諸佛也. 若在散心, 不能得見如是相好離分齊相. 以是故言依於三昧也. 上來別明體用熏習竟.〕

【논】
이 체용(體用)의 훈습을 분별함에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미상응(未相應)이니, 범부와 이승과 초발의보살 등은 의와 의식의 훈습으로 신력(信力)에 의하기 때문에 잘 수행을 하지만 아직 무분별심이 체와 더불어 상응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며, 아직 자재업의 수행이 용과 더불어 상응하지 못함을 말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이상응(已相應)이니, 법신보살이 무분별심을 얻어 모든 부처의 지용(智用)과 더불어 상응하여 오직 법력에 의하여 저절로 수행하게 되어 진여를 훈습하여 무명을 멸함을 발하기 때문이다.
〔此體用熏習, 分別復有二種. 云何爲二. 一者未相應. 謂凡夫二乘初發意. 菩薩等, 以意意識熏習, 依信力故而能修行. 未得無分別心, 與體相應故. 未得自在業修行, 與用相應故. 二者已相應. 謂法身菩薩, 得無分別心, 與諸佛智用相應, 唯依法力自然修行, 熏習眞如滅無明故.〕

【소】
두 번째는 체용(體用)을 합하여 해석하였다. 이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전체적으로 나타내었고 따로 풀이하였다. 따로 풀이하는 중에, 먼저 미상응을 밝히는 가운데 ‘의와 의식의 훈습’이라고 한 것은, 범부와 이승을 의식훈습이라 하는 것이니 곧 이는 분별사식훈습이고, 초발의보살 등 십해(十解) 이상을 의훈습이라 하는 것이니 곧 이는 업식훈습의 뜻이며 전에 말한 것과 같은 것이다.
〔第二合釋體用. 於中有二. 總標. 別釋. 別釋中, 先明未相應中, 言意意識熏習者, 凡夫二乘名意識熏習. 卽是分別事識熏習. 初發意菩薩等者, 十解以上名意識熏習. 卽是業識熏習之義如前說也.〕

【별기】
이 중에서 저 법신보살이 법신을 증득할 때 능견상(能見相)을 여의는 것에 대하기 때문에 지전(地前:십지이전)의 보살을 의훈습이라 한다고 말하였으니, 업식에 의하여 능견상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속지(俗智)로 보불(報佛)을 보는 뜻에 의한다면 금강심이하에서 모두 견상이 있음을 통틀어 업식훈습이라 하는 것이니, 아래에서 말한 것과 같다.
〔別記-此中對彼法身菩薩, 證法身時, 離能見相, 故說地前菩薩名意熏習. 以依業識有能見相故. 若依俗智見報佛義, 則金剛已還皆有見相, 通名業識熏習. 如下說也.〕

【소】
‘아직 무분별심이 체와 더불어 상응하지 못했다’는 것은 아직 모든 부처의 법신의 체와 더불어 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아직 자재업이 용과 더불어 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은 아직 부처의 응신(應身)ㆍ화신(化身)의 이신(二身)의 용(用)과 더불어 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상응 중에 법신보살이란 십지보살이요, ‘무분별심을 얻었다’는 것은 체와 더불어 상응하기 때문이다. ‘모든 부처의 지용과 더불어 상응한다’는 것은 여량지가 있기 때문이요, ‘저절로 수행하게 된다’는 것은 팔지 이상에서는 공용(功用)이 없기 때문이다. 말에 의하여 거듭 나타냄에 다섯 가지 부분이 있는 중에서 네 번째 두 가지 훈습을 각각 밝힘을 앞에서 마쳤다.
〔未得無分別心與體相應者, 未得與諸佛法身之體相應故. 未得自在業與用相應故者, 未得與佛應化二身之用相應故. 已相應中, 法身菩薩者, 十地菩薩. 得無分別心者, 與體相應故. 與諸佛智用相應者, 以有如量智故. 自然修行者, 八地以上無功用故. 因言重顯有五分中, 第四別明二種熏習竟在於前.〕

【논】
또한 염법(染法)은 무시의 때로부터 훈습하여 단절되지 않다가, 부처가 된 후에는 곧 단절함이 있으나, 정법훈습(淨法熏習)은 곧 단절함이 없어서 미래에까지 다하는 것이니, 이 뜻이 무엇인가? 진여법이 항상 훈습하기 때문에 망심이 곧 멸하고 법신이 밝히 나타나 용의 훈습을 일으키므로 단절함이 없는 것이다.
〔復次染法從無始已來, 熏習不斷. 乃至得佛, 後則有斷. 淨法熏習, 則無有斷, 盡於未來. 此義云何. 以眞如法常熏習故, 妄心則滅, 法身顯現, 起用熏習, 故無有斷.〕

【소】
이 아래는 다섯 번째로 두 가지 훈습이 다하고 다하지 않는 뜻을 밝혔다. 염훈(染熏)은 진여에 어긋나 일어나기 때문에 멸진함이 없으나 정법의 훈습은 진여에 순응하여 일어나 진여와 상응하기 때문에 멸진함이 없음을 밝히고자 한 것이니, 글의 양상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현시정의분(顯示正義分)내에 바로 풀이한 중에 크게 두 부분이 있으니, 첫 번째 법장문(法章門)을 해석함을 마쳤다.
〔此下第五明二種熏盡不盡義. 欲明染熏違理而起故有滅盡. 淨法之熏順理而生, 與理相應故無滅盡. 文相可知.
顯示正義分內正釋之中, 大有二分. 第一釋法章門竟在於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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