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2) 지관문(止觀門)

通達無我法者 2008. 3. 24. 14:00

 

(2) 지관문(止觀門)

은정희 역주/일지사/자료입력:도규희

 

 

【논】
어떻게 지관문을 수행하는가? 지(止)라 하는 것은 모든 경계상을 그치게 함을 말하는 것이니 사마타관(奢摩他觀)을 수순하는 뜻이기 때문이요, 관(觀)이라고 하는 것은 인연생멸상을 분별함을 말하는 것이니 비발사나관(毗鉢舍那觀)을 수순하는 뜻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수순하는가? 이 두 가지 뜻으로 점점 수습하여 서로 여의지 아니하여 쌍으로 눈앞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云何修行止觀門. 所言止者, 謂止一切境界相, 隨順奢摩他觀義故. 所言觀者, 謂分別因緣生滅相, 隨順毗鉢舍邪觀義故. 云何隨順. 以此二義漸漸修習, 不相捨離, 雙現前故.〕

【소】
처음 대략 밝힌 중에 ‘모든 경계상을 그치게 함을 말한다’고 한 것은 앞서 분별함에 의하여 모든 바깥 경계를 짓다가 이제는 각혜(覺慧)로써 바깥 경계의 상을 깨뜨리는 것이니, 경계상이 이미 그치면 분별할 바가 없기 때문에 ‘지(止)’라 하는 것이다. 다음에 ‘생멸상을 분별한다’고 한 것은 생멸문에 의하여 법상(法相)을 관찰하기 때문에 분별한다고 말한 것이니, 이는 《유가론》보살지에서 “이 중의 보살이 곧 모든 법에 분별할 바가 없으니, 이를 지(止)라 이름함을 알아야 할 것이요, 모든 법의 승의이취(勝義理趣) 및 모든 한량없는 안립이취(安立理趣)에 대한 세속의 묘지(妙智)를 관(觀)이라 이름함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런즉 진여문에 의하여 모든 경계상을 그치게 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분별할 바가 없으면 곧 무분별지를 이루는 것이요, 생멸문에 의하여 모든 상을 분별하며 모든 이취(理趣)를 관찰하면 곧 후득지를 이루는 것임을 알 것이다. ‘사마타관을 수순하는 뜻과, 비발사나관(毗鉢舍那觀)을 수순하는 뜻’이라는 것은 저기서 사마타라고 하는 것은 여기서 번역하여 지(止)라 한 것이며, 비발사나는 여기서 번역하여 관(觀)이라 한 것이다. 다만 이제 이 《기신론》을 번역한 이가 방편과 및 정관(正觀)을 구별하기 위해 정관에는 그대로 저 말(:梵語)을 둔 것이다. 만일 여기의 말(:漢語)을 갖추어 둔다면 응당 지관을 수순하는 뜻과 및 관관(觀觀)을 수순하는 뜻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지와 관(止觀)이 쌍으로 작용할 때가 곧 정관임을 나타내려 하기 때문에 지관과 및 관관이라 말한 것이며, 방편에 있을 때에는 모든 경계상을 그치게 하여 정관의 지(止)에 따르기 때문에 ‘지관을 수순한다’고 말하고 또 인연상을 분별함으로써 정관의 관에 따르기 때문에 ‘관관을 수순한다’고 말한 것이다. ‘어떻게 수순하는가?’이하는 바로 이 뜻을 해석한 것이니, ‘점점 수습한다’는 것은 수순하는 방편을 밝히 것이고, ‘눈앞에 나타난다’고 한 것은 수순한 바의 정관을 나타낸 것이다. 이 중에서는 지관의 뜻을 대략 밝힌 것이니, 상을 따라 논하자면 정(定)을 지(止)라 하며 혜(慧)를 관(觀)이라 하나, 사실을 말하자면 정(定)은 지관에 통하는 r서이며 혜(慧)도 또한 그러한 것이다. 이는 《유가론》성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과 같다. 즉 “또한 이와 같이 심일경성(心一境性)은 혹은 사마타품(奢摩他品)이며 혹은 비발사나품(毗鉢舍那品)이다. 만약 아홉 가지의 심주(心住) 중에서라면 심일경성을 사마타품이라 하고, 만약 네 가지 혜행(慧行) 중에서라면 심일경성을 비발사나품이라고 한다.
〔初略中言謂止一切境界相者. 先由分別作諸外塵. 今以覺慧破外塵相. 塵相旣止, 無所分別, 故名爲止也. 次言分別生滅相者. 依生滅門, 觀察法相, 故言分別. 如瑜伽論菩薩地云. 此中菩薩, 卽於諸法無所分別, 當知名止. 若於諸法勝義理趣, 及諸無量安立理趣世俗妙智, 當知名觀. 是知依眞如門, 止諸境相, 故無所分別, 卽成無分別智. 依生滅門, 分別諸相, 觀諸理趣, 卽成後得智也. 隨順奢摩他觀義, 隨順毗鉢舍那觀義者. 彼云奢摩他, 此?云止. 毗鉢舍那, 此?云觀. 但今譯此論者, 爲別方便及與正觀, 故於正觀仍存彼語. 若具存此於者, 應云隨順止觀義, 及隨順觀觀義. 欲顯止觀雙運之時卽是正觀, 故言止觀及與觀觀. 在方便時, 止諸塵相, 能順正觀之止, 故言隨順止觀. 又能分別因緣相故, 能順正觀之觀, 故言隨順觀觀. 云何隨順以下, 正釋此義. 漸漸修習者, 是明能隨順之方便. 現在前者, 是顯所隨順之正觀也. 此中略明止觀之義. 隨相而論, 定名爲止, 慧名爲觀. 就實而言, 定通止觀, 慧亦如是. 如猷伽論聲聞地云. 復次如是心一境性. 或是奢摩他品. 或是毗鉢舍那品. 若於九種心住中心一境性, 名奢摩他品. 若於四種慧行中心一境性, 名毗鉢舍那品.〕

어떤 것을 아홉 가지 심주라 하는가? 어떤 비구가 마음을 내주(內住)하며, 등주(等住)하며, 안주(安住)하며, 근주(近住)하며, 조순(調順)하며, 적정(寂靜)하며, 최극적정(最極寂靜)하며, 전주일치(專住一趣)하며 및 등지(等持)하게 됨을 말하는 것이니, 이러한 것을 아홉 가지 심주라 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내주인가? 밖에 있는 일체의 반연하는 바 경계로부터 그 마음을 거두어 단속하여 안에다 매어 두어 밖으로 산란하지 않게 함을 말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내주라 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등주인가? 곧 최초에 계박(繫縛)된 마음(곧 내주)은 그 심성이 거칠게 움직이는 것이어서 아직 똑같이 두루 머무르게 할 수 없기 때문에 다음에 곧 이것이 반연하는 바 경계에 대하여 상속방편(相續方便)과 징정방편(澄淨方便)으로 이를 꺾어 미세하게 하여 두루 거두어 들여서 머무르게 함을 말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등주라 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안주인가? 만약 이 마음이 또한 이처럼 내주ㆍ등주하였으나, 내주ㆍ등주하는 마음을 놓쳐 밖으로 산란하기 때문에 또 다시 거두어 단속하여 내경(內境)에 안치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안주라 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근주인가? 저가 먼저 응당 이와 같이 친근하게 머무를 것을 늘 생각해야 할 것이니, 이러한 생각에 의하여 자주 뜻을 일으켜 그 마음을 안으로 머무르게 하여 이 마음이 멀리 밖에 머무르지 않게 함을 말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근주라 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조순이가? 갖가지 상이 마음을 흐트러지게 하니, 소위 색ㆍ성 ㆍ향ㆍ미ㆍ촉의 오진(五塵)과 탐ㆍ진ㆍ치의 삼독(三毒)과 남녀 등의 상(相)이다. 그러므로 저가 먼저 응당 저 모든 상들을 근심거리의 생각으로 여겨야 할 것이며 이러한 생각의 증상력(增上力)에 의하여 저 모든 상들에 대하여 그 마음을 꺾어버려서 흐트러지지 않게 함을 말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조순이라 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적정인가? 갖가지 욕(欲)ㆍ에(?)ㆍ해(害) 등의 여러 나쁜 심사(尋思)와 탐욕개(貪慾蓋) 등의 여러 수번뇌(隨煩惱)가 있어 마음을 요동케 하기 때문에 저가 먼저 응당 저러한 여러 가지 법들을 근심거리의 생각으로 여겨야 할 것이며 이러한 생각의 증상력에 의하여 저러한 것들에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적정이라 하는 것이다. 어떤 것을 최극적정이라 하는 것인가? 위의 적정의 마음을 놓침으로 해서 곧 저 두 가지가 잠시현행할 때에 곳에 따라 일어나지만, 차마 받지 아니하고 곧 바로 토(吐)하는 것을 말하미니, 그러므로 최극적정이라 하는 것이다. 어떤 것을 전주일취라 하는가? 가행(加行)이 있고 공용(功用)이 있어서 부족함이 없고 간격이 없어 삼마지(三摩地)가 상속하여 머무름을 말함이니, 그러므로 전주일취하 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등지인가? 자주 닦고 자주 익히어 많은 수습으로 인연을 삼기 때문에 가행도 없고 공용도 없게 되어 자연히 도(道)에 들어감을 말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등지라 하는 것이다. 또 이와 같이 사마타를 얻은 사람은 또한 곧 이 네 가지 작의(作意)를 거쳐야 바야흐로 비발사나를 수습할 수 있으니, 그러므로 이것은 또한 비발사나품인 것이다.
〔云何名爲九種心住. 謂有苾?, 令心內住, 等住, 安住, 近住, 調順, 寂靜, 最極寂靜, 專住一趣, 及與等持, 如是名爲九種心住. 云何內住. 謂從外一切所緣境界, 攝錄其心, 繫在於內, 不外散亂, 故名內住. 云何等住. 謂卽最初所繫縛心, 其性?動, 未能令其等?住故. 次卽於此所緣境界, 以相續方便, 澄淨方便, 挫令微細, ?攝令住, 故名等住. 云何安住. 謂若此心雖復如是內住等住. 然由失念. 於外散亂. 還復攝錄安置內境. 故名安住. 云何近住. 謂彼先應如是如是親近念住. 由此念故, 數數作意內住其心, 不令此心遠住於外. 故名近住. 云何調順. 謂種種相, 令心散亂. 所謂五塵三毒男女等相. 故彼先應取彼諸相爲過患想. 由如是想增上力故, 於彼諸相折挫其心不令流散. 故名調順. 云何寂靜. 謂有種種欲?害等諸惡尋思貪欲蓋等諸隨煩惱, 令心擾動. 故彼先應取彼諸法爲過患想. 由如是想增上力故, 於彼心不流散. 故名寂靜. 云何名爲最極寂靜. 謂失念故, 卽彼二種暫現行時, 隨所生起, 然不忍受, 尋卽反吐. 故名最極寂靜. 云何名爲專住一趣. 謂有加行有功用無缺無間三摩地相續而住. 故名專住一趣. 云何等持. 謂數修數習數多修習爲因緣故, 得無加行無功用住運轉道. 故名等持. 又如是得奢摩他者, 復卽由是四種作意, 方能修習毗鉢舍那. 故此亦是毗鉢舍那品.〕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어떤 비구가 내심(內心)의 사마타에 의지하기 때문에 모든 법 중에 바르게 사택(思擇)하며, 가장 지극하게 사택하며, 빠짐없이 두루 심사(尋思)하며, 빠짐없이 두루 사찰(伺察)함을 말하는 것이니, 이를 네 가지 비발사나라고 하는 것이다. 어떤 것을 바르게 사택한다고 하는가? 정행(淨行)이 반연하는 경계와 혹 선교(善巧)가 반연하는 경계와 혹은 정혹(淨惑)이 반연하는 경계에 대하여 진소유성(盡所有性:일체의 시간적ㆍ공간적 존재를 가리키는 말로서, 後得智ㆍ世俗諦ㆍ如量智의 대상이라고도 함)을 바르게 사택함을 말한다. 어떤 것을 최극사택이라 하는가? 곧 저 소연경계(所緣境界)에 대하여 여소유성(如所有性:眞如를 일컬으며, 無分別智ㆍ僧衣諦 ㆍ如理智의 대상이라고도 함)을 가장 지극하게 사택함을 말한다. 어떤 것을 주변심사(周?尋思)라 하는가? 곧 저 소연경계에 대하여 자세히 추구하여 빠짐없이 두루 사찰함을 말한다ㆍㆍㆍㆍㆍㆍ라고 하고 내지 여러 가지로 말하고 있다. 이 글의 뜻을 세밀히 탐구해 본다면 이는 성문(聲聞)의 지관법문(止觀法門)을 말한 것이지만, 그러나 이 법으로 대승의 경우에 나아가면 곧 대승의 지관의 행위가 되므로 그 아홉 가지 심주(心柱)와 네 가지의 혜행(慧行)이 앞서 말한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대승의 경우는 다음 아래 글 중에 널리 분별하여 글에 의거해서 해석할 것이다. 지관(止觀)의 상은 대략의 뜻이 이와 같다.
〔云何四種毗鉢舍那. 謂有苾?依止內心奢摩他故, 於諸法中能正思擇, 最極思擇, 周?尋思, 周?伺察, 是名四種. 云何名爲能正思擇. 謂於淨行所緣境界. 或於善巧所緣境界. 或於淨惑所緣境界. 能正思擇盡所有性. 云何名爲最極思擇. 謂卽於彼所緣境界, 最極思擇如所有性. 云何名爲周?尋思. 謂卽於彼所緣境界, 由慧俱行, 有分別作意, 取彼相狀, 周?尋思. 云何名爲周?伺察. 謂卽於彼所緣境界, 審諦推求, 周?思察. 乃至廣說. 尋此文意, 乃說聲聞止觀法門. 然以此法趣大乘境, 卽爲大乘止觀之行. 故其九種心住, 四種慧行, 不異前說. 大乘境者, 次下文中當廣分別依文消息也. 止觀之相, 略義如是.〕

△이 아래는 두 번째 널리 분별하는 것이다. 이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는 각각의 닦음을 밝혔고 뒤에는 쌍운(雙運)을 나타내었다. 각각의 닦음 안에 먼저는 지(止)에 대해서이고 뒤에는 관(觀)에 대해서 이다. 먼저 지(止)를 밝히는 중에 곧 사단(四段)이 있으니, 첫째는 지를 닦는 방법을 밝혔고, 둘째는 지를 닦는 수승한 능력을 나타냈으며, 셋째는 마사(魔事)를 분별하였고, 넷째는 이익을 보였다.
〔△以下第二廣辨. 於中有二. 先明別修. 後顯雙運. 別修之內先止, 後觀. 先明止中, 卽有四段. 一明修止方法. 二顯修止勝能. 三辨魔事. 四示利益.〕

【논】
만약 지(止)를 닦는다면 고요한 곳에 머물러 단정히 앉아서 뜻을 바르게 하되, 기식(氣息)에 의하지 않으며, 형색(形色)에 의하지 않으며, 공(空)에 의하지 않으며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에 의하지 않으며, 내지 견문(見聞)ㆍ각지(覺知)에 의하지 않아야 한다. 일체의 모든 상념을 생각생각마다 다 없애고 또한 없앤다는 생각마저도 없애야 한다. 일체법이 본래 상이 없기 때문에 생각생각이 멸하지 않으며, 또한 마음을 따라 밖으로 경계를 생각하지 않은 후에 마음으로 마음을 제멸(除滅)하는 것이다. 마음이 만약 흩어져 나간다면 곧 거두어 와서 정념(正念)에 머물게 해야 할 것이니, 이 정념이란 오직 마음뿐이요 바깥 경계가 없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곧 또한 이 마음도 자상(自相)이 없어서 생각생각마다 얻을 수가 없는 것이다. 만일 앉은 데서 일어나 가고 오고 나아가고 머무는 데에 행위하여 짓는 바가 있더라도 이 모든 때에 항상 방편을 생각하여 수순ㆍ관찰하여 오래 익혀 익숙하게 되면 그 마음이 머물게 된다. 마음이 머물기 때문에 점점 맹리(猛利:매우 예리함)하여 진여삼매에 수순하여 들어가게 되어 번뇌를 깊이 조복하고 신심(信心)이 증장하여 속히 불퇴전의 경지를 이룬다. 오직 의혹하고 불신하고 비방하고 중죄업장을 짓고 아만(我慢)과 해태(懈怠)한 사람은 제외하나니, 이러한 사람들은 들어 갈 수 없는 것이다.
〔若修止者. 住於靜處, 端坐正意. 不依氣息. 不依形色. 不依於空. 不依地水火風. 乃至不依見聞覺知. 一切諸想 隨念皆除. 亦遣除想. 以一切法本來無相, 念念不生, 念念不滅亦不得隨心外 念境界, 後以心除心. 心若馳散, 卽當攝來住於正念. 是正念者, 當知唯心, 無外境界. 卽復此心亦無自相, 念念不可得. 若從坐起, 去來進止, 有所施作. 於一切時, 常念方便, 隨順觀察. 久習淳熟, 其心得住, 以心住故, 漸漸猛利, 隨順得入眞如三昧. 深伏煩惱, 信心增長, 速成不退. 唯除疑惑, 不信, 誹謗, 重罪業障, 我慢, 懈怠, 如是等人所不能入.〕

【소】
처음 방법 중에 먼저는 진여삼매에 들어가는 사람을 밝혔고, 뒤에는 들어갈 수 없는 사람을 구별하였다. 처음 중에 ‘고요한 곳에 머문다’고 한 것은 조건의 갖추어짐을 밝힌 것이니, 자세히 말하자면 반드시 다섯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첫째는 고요한 곳에 한거(閒居)함이니 산림에 머무는 것을 말한다. 만약 취락에 머물면 반드시 소란스러움이 잇기 때문이다. 둘째는 지계(持戒)가 깨끗함이니, 업장을 여읨을 말한 것이다. 만약 깨끗하지 못하다면 반드시 참회를 구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의식이 구족함이요, 넷째는 선지식을 얻음이요, 다섯째는 모든 반연하는 일을 쉬는 것이다. 여기서는 간략하게 처음 것만 들었기 때문에 ‘고요한 곳’이라 말한 것이다. ‘단정히 앉아서’라고 한 것은 몸을 고르게 함을 밝힌 것이고, ‘뜻을 바르게 한다’는 것은 마음을 고르게 함을 나타낸 것이다. 어떤 것이 몸을 고르게 하는 것인가? 상세하게 말한다면 먼저 앉는 곳을 편안케 하는 것이니 매양 안온케 하여 오래도록 방해가 없게 한다. 다음엔 다리를 바르게 해야 할 것이니, 만약 반가좌할 경우엔 왼쪽 다리를 오른쪽 넓적다리 위에 두어서 몸 가까이 끌어당겨 왼쪽 다리의 발가락이 오른쪽 넓적다리와 가지런하게 하며, 만약 전가좌를 하려면 곧 위의 오른쪽 다리를 고쳐서 반드시 왼쪽 넓적다리 위에 두고 다음엔 왼쪽 다리를 오른쪽 넓적다리 위에 두는 것이다. 다음에는 옷의 띠를 풀어 느슨하게 하되 앉을 때 떨어지지 않게 한다. 다음에는 손을 편안하게 해야 하니, 왼손바닥을 오른손 위에 두어 손을 겹쳐서 서로 대하여 왼쪽 넓적다리 위에 가지런히 두며 몸 가까이 끌어당겨 중심에 두어 편안하게 하는 것이다. 다음에는 몸을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니, 먼저 그 몸과 팔다리의 마디를 요동시켜 일여덟 번 반복함으로써 스스로 안마(按摩)하는 법과 같이 수족을 어긋나지 않게 하며, 몸을 바르게 하여 단정하고 똑 바르게 하여 어깨의 뼈가 서로 대하게 하여 구부러지게 하지도 말고 솟게 하지도 말아야 한다. 다음엔 머리와 목을 바르게 하는 것이니, 코가 배꼽과 서로 대하게 하여 기울지도 삐딱하지도 않게 하며 위로 올리지도 아래로 내리지도 않게 하여 평면으로 바르게 머물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전체적으로 간략하게 말하기 때문에 ‘단정히 앉아서’라고 한 것이다. 어떤 것이 마음을 고르게 갖는 것인가? 말세의 수행인이 바르게 원하는 이는 적고 잘못 구하는 이가 많으니, 이는 명리(名利)를 구하여 적정한 위의(威儀)를 나타내지만 헛되이 세월을 보내어 정(定)을 얻을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잘못 구하는 것을 여의기 때문에 ‘뜻을 바르게 한다’고 말한 것이다. 다만 정심(定心)이 이치와 더불어 상응하여 자도(自度)ㆍ도타(度他)하여 무상도에 이르려고 하는 것이니, 이러한 것을 ‘뜻을 바르게 하는 것’이라 하는 것이다.
〔初方法中, 先明能入人. 後簡不能者. 初中言住靜處者, 是明緣具. 具而言之, 必具五緣. 一者閒居靜處謂住山林. 若住聚落, 必有喧動故. 二者持戒淸淨. 謂離業障. 若不淨者, 必須懺悔故. 三者衣食具足. 四者得善知識. 五者息諸緣務. 今略擧初, 故言靜處. 言端坐者, 是明調身. 言正意者, 是顯調心. 云何調身. 委悉而言. 前安坐處. 每令安穩. 久久無妨. 次當正脚. 若半跏坐, 以左脚置右?上, 牽來近身, 令左脚指與右?비齊. 若欲全跏, 卽改上脚必置右?上, 次左脚置右?上. 次解寬衣帶. 不坐時落. 次當安手. 以左手掌置右手上, ?手相對, 頓置右脚上, 牽來近身, 當心而安. 次當正身. 前當搖動其身, 幷諸支節, 依七八反, 如自按摩法, 勿令手足差異. 正身端直, 令肩骨相對, 勿曲勿聳. 次正頭頸. 令鼻與臍相對, 不偏不邪, 不仰不卑, 平面正住. 今總略說, 故言端坐也. 云何調心者. 末世行人, 正顯者少, 邪求者多. 謂求名利, 現寂靜儀. 虛度歲月, 無由得定. 離此邪求, 故言正意. 直欲定心與理相應, 自度度他至無上道, 如是名爲正意也. 〕

‘기식에 의하지 아니하며ㆍㆍㆍㆍㆍㆍ’이하는 바로 지(止)를 닦는 차례를 밝혀서 아홉 가지의 주심(住心)을 나타낸 것이다. 처음에 ‘기식(氣息)에 의하지 아니하며, ㆍㆍㆍㆍㆍㆍ견문ㆍ각지에 의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첫 번째로 내주(內住)하는 마음을 밝힌 것이다. 기식이라 한 것은 수식관(數息觀)의경우이며, 형색이라 한 것은 골쇄(骨?) 등의 상이며, 공(空)이나 지(地)ㆍ수(水) 등은 모두 사정(事定)의 반연하는 경계이며, 견문ㆍ각지는 흩어진 마음에서 취하는 육진(六塵)을 든 것이니, 이러한 모든 경계를 추구ㆍ파괴하여 오직 자심(自心)뿐임을 알고 다시는 연(緣)에 의탁하지 않기 때문에 ‘ㆍㆍㆍㆍㆍㆍ에 의하지 않는다’고 한 것이며, 이처럼 외진(外塵)에 의하지 않는 것이 곧 내주(內住)이다. 다음에 ‘일체의 모든 상을 생각마다 모두 제거한다’고 한 것은 두 번째 등주(等住)의 마음을 밝힌 것이다. 앞에서 비록 기식(氣息) 등의 상을 각각 깨트렸으나 이는 초수(初修)이며 따라서 그 마음이 거칠게 움직이기 때문에, 이 경계를 깨뜨렸으되 다시 나머지 경계를 생각하는 것이다. 다음엔 곧 이 일체의 모든 상을 상속방편(相續方便)과 징정방편(澄淨方便)으로 꺾어 미세하게 하여 생각을 따라 다 없애는 것이니, 이처럼 모든 치달리는 상(相)을 없애는 것이 곧 등주이다. 다음에 ‘또한 없앤다는 생각마저 없앤다’고 한 것은 세 번째 안주(安住)하는 마음을 밝힌 것이다. 앞에서는 비록 밖으로 치달리는 생각을 모두 없앴으나 오히려 안으로 없앤다는 생각이 남아 있으며, 안의 생각이 없어지지 않으면 밖의 생각이 다시 나는 것이므로 안으로 안주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다시 이 없앤다는 생각까지 없애는 것이니 안에 두지 않음으로 해서 곧 밖을 잊을 수 있으며, 밖을 잊어서 고요해지면 곧 이것이 안주이다. 다음에 ‘일체의 법이 본래 상(相)이 없어서 생각생각이 멸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네 번째 근주(近住)하는 마음을 밝힌 것이다. 앞서 염주(念住:안주를 생각함)를 수습하는 힘에 의하므로 안팎의 일체의 모든 법이 본래 생각할 수 있는 것도, 생각할 만한 것도 없는 줄 분명하게 아는 것이니 그 생각이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음을 미루어 자주자주 뜻을 일으켜 멀리 여의지 않는 것이다. 이처럼 멀리 여의지 않고 머무는 것이 곧 근주이다. 다음에 ‘또한 마음을 따라 밖의 경계를 생각지 않는다’고 한 것은 다섯 번째 조순(調順)하는 마음을 밝힌 것이다. 모든 밖의 경계상이 마음을 산란케 하므로 앞서의 안주와 근주를 수습함에 의하여 밖의 경게에 여러 가지 허물이 있음을 깊이 알고 곧 저 상(相)을 보기를 과환(過患)의 생각이라고 여기는 것이니, 이러한 생각의 힘에 의하여 그 마음을 꺾어서 밖으로 흩어지지 않게 하기 때문에 조순이라 하는 것이다. 다음 ‘나중에 마음으로 마음을 없앤다’고 한 것은 여섯 번째 적정해진 마음을 밝힌 것이다. 모든 분별하는 생각이 마음을 발동케 하다가 앞의 조순에 의하여 그 허물을 더욱 깨닫고 곧 이 상(相)을 보기를 과환의 생각이라고 여기는 것이니, 이러한 생각의 힘에 의하여 동하는 마음을 점차로 없애어 움직이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곧 적정이다. 다음 ‘마음이 만약 치달려 흩어지면ㆍㆍㆍㆍㆍㆍ, 생각마다 얻을 수 없다’고 한 것은 일곱 번째 최극적정의 마음을 밝힌 것이다. 이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 ‘마음이 만약 치달려 흩어지면 곧 응당 거두어서ㆍㆍㆍㆍㆍㆍ, 오직 마음뿐이요 밖의 경계거 없다’고 한 것은 정념(正念)을 놓치어 잠시 밖의 경계에 치달려 흩어졌으나 정념의 힘에 의하여 그대로 차마 받아들이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다음에 ‘곧 다시 이 마음도 또한 자상(自相)이 없어서 생각마다 얻을 수 없다’고 한 것은 정념을 놓치어 다시 내심(內心)에 두다가 수행의 힘에 의하여 곧 돌이켜 토해냄을 밝힌 것이니, 이처럼 안팎에서 받지 않고 돌이켜 토해내기 때문에 최극적정이라고 한 것이다. 다음에 ‘만약 앉은 데서부터 일어나 거래(去來)함에ㆍㆍㆍㆍㆍㆍ, 순숙(淳熟)하면 그 마음이 머무르게 된다’고 한 것은 여덟 번째 전주일취(專住一趣)를 밝힌 것이다. 이는 가행(加行)도 잇고 공용(功用)도 있는 마음을 말한 것이니, 그러므로 ‘항상 방편을 생각하여 수순하고 관찰한다’고 한 것이며 간격이 없고 부복함이 없어 정심(定心)이 계속되기 때문에 ‘오래 익혀 익숙하게 되면 그 마음이 머물게 된다’고 한 것이니, 곧 이것이 전주일취의 상이다. 다음에 ‘마음이 머물기 때문에 점점 맹리(猛利)하여 진여삼매에 수순하여 들어가게 된다’고 한 것은 아홉 번째 등지(等持)의 마음을 밝힌 것이다. 앞서의 푹 익힌 수습의 힘에 의하기 때문에 가행도 없고 공용도 없는 마음을 얻어서 떴다 가라앉았다 함을 멀리 여의어 자연스럽게 머물게 되기 때문에 등지라 하며, 등지의 마음이 진여상에 머물기 때문에 ‘진여삼매에 들어가게 된다’고 한 것이다. '번뇌를 깊이 조복하고 신심이 증장하여 속히 불퇴전의 경지를 이룬다’는 것은 진여삼매의 힘의 작용을 대략 나타낸 것이니, 이로 인하여 더욱 나아가 종성(種性)의 불퇴위에 들어가게 되기 때문이다. 위에서부터 여기까지 말한 것은 들어 갈 수 있는 사람을 말한 것이며, ‘오직ㆍㆍㆍㆍㆍㆍ을 제의하나니’이하는 들어 갈 수 없는 사람을 구별한 것이다. 지(止)를 닦는 방법을 앞에서 마쳤다.
〔不依以下, 正明修止次第, 顯示九種住心. 初言不依氣息, 乃至不依見聞覺知者, 是明第一內住之心. 言氣息者, 數息觀境. 言形色者, 骨?等相. 空地水等. 皆是事定所緣境界. 見聞覺知, 是擧散心所取六塵. 於此諸塵推求破壞, 知唯自心, 不復託緣, 故言不依. 不依外塵, 卽是內住也. 次言一切諸相隨念皆除者, 是明第二等住之心. 前雖別破氣息等相. 而是初修, 其心?動. 故破此塵, 轉念餘境. 次卽於此一切諸相, 以相續方便澄淨方便, 挫令微細, 隨念皆除. 皆除馳之想, 卽是等住也. 次言亦遺除想者, 是明第三安住之心. 前雖皆除外馳之想. 而猶內存能除之想. 內想不滅, 外想還生. 是故於內不得安住. 今復遺此能除之想. 由不存內, 則能忘外. 忘外而靜, 卽是安住也. 次言以一切法本來無相, 念念不生念念不滅者, 是明第四近住之心. 由先修習念住力故, 明知內外一切法, 本來無有能想可想. 推其念念不生不滅. 數數作意而不遠離. 不遠離住, 卽是近住也. 次言亦不得隨心外念境界者, 是明第五調順之心. 諸外塵相念心散亂. 依前修習安住近住, 深知外塵有諸過患, 卽取彼相爲過患想. 由是想力折挫其心令不外散, 故名調順也. 次言後以心除心者, 是明第六寂靜之心. 諸分別想令心發動. 依前調順, 彌覺其患. 卽取此相爲過患想. 由此想力轉除動心. 動心不起, 卽是寂靜也. 次言心若馳散, 乃至念念不可得者, 是明第七最極寂靜之心. 於中有二. 初言心若馳散卽當攝來, 乃至唯心無外境界者, 是明失念暫馳散外塵, 而由念力能不忍受也. 次言卽復此心亦無自相念念不可得者, 是明失念遠存內心, 而由修力尋卽反吐也. 能於內外不受反吐, 是故名爲最極寂靜. 次言若從坐起去來, 乃至?熟其心得住者, 是明第八專住一趣. 謂有加行有功用심, 故言常念方便隨順觀察也. 無間無缺定心相續, 故言久習 熟其心得住. 卽是專住一趣相也. 次言以心住故漸漸猛利, 隨順得入眞如三昧者, 是明第九等持之心. 由前?熟修習力故, 得無加行無功用心, 遠離沈浮, 任運而住, 故名等持. 等持之心住眞如相, 故言得入眞如三昧. 深伏煩惱信心增長速成不退者, 略顯眞如三昧力用, 由此進趣得入種性不退位故. 上來所說名能入者. 唯除以下, 簡不能者. 修止方法竟在於前.〕

【논】
또한 이 삼매에 의하기 때문에 곧 법계가 일상(一相)인 것을 아는 것이니, 일체 모든 부처의 법신이 중생신(衆生身)과 더불어 평등하여 둘이 아님을 말하며, 이를 곧 일행삼매(一行三昧)라 이름한다. 진여가 이 삼매의 근본임을 알아야 할 것이니, 만일 사람이 수행하면 점점 무량한 삼매를 내는 것이다.
〔復次依如是三昧故, 則知法界一相. 謂一切諸佛法身與衆生身平等無二, 卽名一行三昧. 當知眞如是三昧根本. 若人修行, 漸漸能生無量三昧〕

【소】
두 번째는 지(止)를 수행한 결과 수승한 공능(功能)을 밝힌 것이니, 이는 앞의 진여삼매에 의하여 일행(一行) 등의 모든 삼매를 낼 수 있음을 밝힌 것이다. 일행삼매라 하는 것은 《문수반야경(文殊般若經)》에서, “‘어떤 것을 일행삼매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법계는 일상(一相)인데 이 법계를 반연함을 일행삼매라 하는 것이다. 일행삼매에 들어간 이는 항하의 모래처럼 많은 제불의 법계의 차별이 없는 상을 다 아는 것이니, 아난(阿難)이 그가 들은 불법을 늘 총지(摠持)하여 그 변재(辯才)와 지혜가 성문 중에서는 가장 수승하지만 아직 양수(量數)에 머물러 곧 한계가 있거니와 만약 일행삼매를 얻으면 제경(諸經)의 법문을 일일이 분별하여 모두 다 분명히 알아 결코 걸림이 없어서 주야로 늘 말하여도 지혜와 변재가 끝내 단절치 않으니 만약 아난의 다문(多聞)과 변재에 비한다면 (아난의 것은) 백천분의 하나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라고 하셨다”고 말하고 내지 널리 설한 것과 같다. 진여삼매가 이러한 무량한 삼매를 낼 수 있기 때문에 ‘진여가 삼매의 근본’이라고 한 것이다. 지(止)를 닦은 수승한 공능을 앞에서 마쳤다.
〔第二明修止勝能. 是明依前眞如三昧, 能生一行等諸三昧. 所言一行三昧者. 如文殊般若經言. 云何名一行三昧. 佛言. 法界一相. 繫緣法界, 是名一行三昧. 入一行三昧者, 盡知?沙諸佛法界無差別相. 阿難所聞佛法, 得念總持辯才智慧. 於聲聞中雖爲最勝. 猶住量數, 卽有限?. 若得一行三昧, 諸經法文, 一一分別, 皆悉了知, 決定無?. 晝夜常說, 智慧辯才終不斷絶. 若比阿難多聞辯才, 百千等分不及其一. 乃至廣說. 眞如三昧能生此等無量三昧, 故言眞如三昧根本也. 修止勝能竟在於前.〕

△이 아래는 세 번째 마구니의 일이 일어나는 것을 밝혔다. 이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대략 밝힌 것과 널리 풀이한 것이다.
〔△以下第三明起魔事. 於中有二. 略明. 廣釋.〕

【논】
혹 어떤 중생이 선근의 힘이 없으면 모든 마구니와 외도와 귀신들에 의하여 어지럽게 되니, 혹은 좌중에서 어떤 형체를 나타내어 공포를 일으키게 하거나 혹은 단정한 남녀 등의 모습을 나타낼 경우, 오직 마음뿐임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경계가 곧 멸하여 끝내 뇌란(惱亂)되지 않을 것이다.
〔或有衆生無善根力, 則爲諸魔外道鬼神之所惑亂. 若於坐中現形恐怖. 或現端正男女等相. 當念唯心, 境界則滅, 終不爲惱.〕

【소】
대략 밝히는 중에 또한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는 마구니의 유혹을 밝혔고 뒤에서는 대치함을 나타내었다. 처음 중에 모든 ‘마구니’라고 한 것은 천마(天魔)요, ‘귀(鬼)’란 퇴척귀(堆?鬼)요, ‘신(神)’이란 정미신(精媚神)이니, 이러한 귀신이 불법을 요란시켜 사도(邪道)에 떨어지게 하기 때문에 ‘외도’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마구니와 내지 귀신들이 모두 세 가지의 오진(五塵)을 지어서 사람의 선한 마음을 깨뜨리는 것이다. 첫째는 두려워할 만한 일을 짓는 것이니, 이는 글에서 ‘좌중에 형체를 나타내어 공포를 일으킨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둘째는 사랑할 만한 일을 짓는 것이니, 글에서 ‘혹 단정한 남녀를 나타낸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셋째는 위(違)도 아니고 순(順)도 아닌 일이니, 평범한 오진(五塵)을 나타내어 수행인의 마음을 어지럽게 만드는 것을 말한다. 이는 글에서‘ㆍㆍㆍㆍㆍㆍ등의 모습’이라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ㆍㆍㆍㆍㆍㆍ임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이하는 다음에 대치함을 밝힌 것이다. 만약 앞서와 같은 모든 경계가 오직 자심의 분별로 지은 것이어서 자심밖에 별다른 경계가 없는 줄 생각하여, 이러한 마음을 일으킨다면 경계상이 바로 없어질 것이니, 이는 모든 마구니와 귀신을 모두 내보내는 방법을 밝힌 것이다. 따로따로 말한다면 각기 다른 방법이 있다. 이는 모든 마구니를 다스리는 사람은 마땅히 대승의 모든 마구니를 다스리는 주문을 외우되 저주하는 생각으로 외워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퇴척귀란 혹 벌레와 전갈 같은 것이 사람의 머리나 얼굴에 기어올라 찔러서 저릿저릿하게 하며, 혹은 또 사람의 양쪽 겨드랑이 아래를 치기도 하며, 혹은 잠깐 사람을 안으며, 혹은 말하는 소리가 시끌시끌하며, 그 밖에 모든 짐승의 모양을 짓되 여러 형상으로 한 가지가 아니니, 이런 것들이 와서 수행하는 이를 뇌란케 한다면 곧 눈을 감고 일심으로 생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할 것이다. 즉 ‘나는 이제 너를 아니, 너는 염부제(閻浮提) 중에 불을 먹고 향기를 맡는 투랍길지(偸臘吉支)이다. 사견(邪見)을 네가 좋아하며 네가 계행의 종자를 깨뜨리나 나는 이제 계(戒)를 가져서 마침내 너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라고 해야 한다. 만약 출가한 사람이라면 마땅히 계율을 외워야 할 것이고, 만약 재가(在家)의 사람이라면 마땅히 《보살계본(菩薩戒本)》을 외우거나 혹은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 등을 외워야 할 것이다. 이런 것을 외우면 귀신이 곧 물러나서 엉금엉금 기어나갈 것이다. 정미신이란 십이시(十二時)의 짐승이 변화하여 여러 가지 형색을 지는 것을 말함이니, 혹은 젊은 남녀의 상(相)을 지으며, 혹은 노숙(老宿)의 모습과 두려워할 만한 몸 등을 짓는데 한 가지가 아닌 여러 형상으로 수행자를 뇌란케 하는 것이다. 저것이 사람을 뇌란케 하려면 각기 그때에 맞추어 오는 것이니, 만약 흔히 인시(寅時)에 오는 것이라면 반드시 호랑이나 들소일 것이고, 내지 흔히 축시(丑時)에 오는 것이라면 반드시 소 종류 등일 것이다. 수행자가 항상 이러한 때를 쓴다면 곧 그 짐승의 정미를 알아서 그 이름을 말하여 꾸짖으면 곧 응당 인사하고 물러나 없어질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선경(禪經)》에서 널리 말한 것과 같다. 위에서부터 마구니 일과 그 대치하는 것을 대략 말하였다.
〔略中亦二. 先明魔?. 後示對治. 初中言諸魔者, 是天魔也. 鬼者, 堆?鬼也. 神者, 精媚神也. 如是鬼神?亂佛法, 令墮邪道, 故名外道. 如是諸魔乃至鬼神等. 皆能變作三種五塵, 破人善心. 一者作可畏事. 文言坐中現形恐怖故. 二者作可愛事. 文言或現端正男女故. 三非違非順事. 謂現平品五塵, 動亂行人之心. 文言等相故. 當念以下, 次明對治. 若能思惟如前諸塵, 唯是自心分別所作. 自心之外, 無別塵相. 能作是念, 境相卽滅. 是明通遺諸魔鬼神之法. 別門而言, 各有別法. 謂治諸魔者, 當誦大乘諸治魔呪, 咀念誦之. 堆?鬼者, 或如蟲蝎, 緣人頭面, ?刺??. 或復擊? 人兩掖下. 或乍抱持於人. 或言說音聲喧喧. 及作諸獸之形. 異相非一. 來惱行者. 則應閉目一心憶而作如是言. 我今識汝, 汝是此 閻浮提中食火臭香偸臘吉支. 邪見汝喜. 汝破戒種. 我今持戒, 終不畏汝. 若出家人, 應誦戒律. 若在家人, 應誦菩薩戒本. 若誦三歸五戒等, 鬼便?行匍匍而出也, 精媚神者, 謂十二時狩, 能變化作種種形色. 或作少男女相. 或作老宿之形. 及可畏身等. 非一衆多. 惱亂行者. 其欲惱人, 各當其時來. 若其多於寅時來者, 必是虎?等. 多於卯時來者, 必是?獐等. 乃至多於丑時來者, 必是牛類等. 行者?用此時則知其狩精媚. 說其名字呵責, 卽當謝滅. 此等皆如禪經廣說. 上來略說魔事對治.〕

【논】
혹 천상(天像)과 보살상을 나타내거나 또한 여래상을 지어서 상호(相好)가 구죽하며 혹은 다라니(陀羅尼)를 설하여 혹은 보시, 지계, 인욕, 저진, 선정, 지혜를 설하며, 혹은 평등하고 공(空)하며 무상(無相)하고 무원(無願)하며 무원(無怨)ㆍ무친(無親)하고 무인(無因)ㆍ무과(無果)하여 필경 공적(空寂)함이 참된 열반이라고 설한다. 혹은 사람들에게 숙명(宿命)의 과거의 일을 알게 하고 또한 미래의 일도 알게 하고 타심지(他心智)를 얻게 하여 변재(辯才)가 막힘이 없어서 중생들로 하여금 세간의 명예나 이익되는 일에 탐착(貪着)하게 한다. 또 사람들로 하여금 자주 성내고 자주 기뻐하게 하여 성품에 일정한 기준이 없게 하며, 혹은 자애가 많거나 잠이 많고 병이 많아서 그 마음이 게을러지게 하며, 혹은 갑자기 정진을 하다가 뒤에 곧 그만두어 불신하는 마음을 내어 의심이 많고 염려가 많게 하며, 혹은 본래의 수승한 행위를 버리고 다시 잡업(雜業)을 닦으며 혹은 세속의 일에 집착하여 갖가지로 끄달리게 한다. 또한 사람들에게 모든 삼매를 얻게 하여 진여삼매에 든 것과 약간 비슷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모두 외도가 얻은 것이지 참다운 삼매가 아닌 것이다. 혹 또한 사람들에게 혹은 하루, 혹은 이틀, 혹은 사흘 내지 이레를 정(定) 중에 머물게 하여 자연의 향미(香美)한 음식을 얻어 몸과 마음이 쾌적하여 배가 고프지도 않고 목이 마르지도 않게 하여 사람들을 그것에 애착하게 한다. 혹은 사람들에게 먹는 것에 한계가 없게 하여 잠깐 많았다가 잠깐 적게 하며 안색을 변이하게 한다. 이러하기 때문에 수행하는 이는 언제나 응당 지혜로써 관찰하여 이 마음을 사망(邪網:삿된 그물)에 떨어지지 않게 하고 마땅히 부지런히 정념(正念)하여 취착하지 아니하면 이러한 모든 업장을 멀리 여읠 수 있을 것이다. 외도가 가지는 삼매는 모두가 견(見)ㆍ애(愛)ㆍ아만(我慢)의 마음을 여의지 못한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니, 그들의 삼매는 세간의 명리와 공경에 탐착하기 때문이다. 진여삼매란 보는 상(相)에 머물지 않고 얻은 상(相)에도 머물지 아니하며 내지 정(定)에서 벗어난 때에도 게을리 함이 없어서 가지고 있는 번뇌가 점점 엷어지게 되니, 만약 모든 범부가 이 삼매법을 익히지 아니하면 여래종성(如來種性)에 들어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간의 모든 선(禪)과 삼매를 닦으면 흔히 거기에 맛 들어 아견(我見)에 의하여 삼계(三界)에 얽매어 외도와 더불어 함께하는 것이니 만약 선지식의 보호하는 바를 여의면 곧 외도의 견(見)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或現天像, 菩薩像. 亦作如來像, 相好具足. 若說陀羅尼. 若說布施持戒忍辱精進禪定智慧. 或說平等空無相無願. 無怨無親. 無因無果. 畢竟空寂. 是眞涅槃. 或令人知宿命過去之事. 亦知未來之事. 得他心智. 瓣才無?, 能令衆生貧著世間名利之事. 又令使人數瞋數喜, 性無常準. 或多慈愛, 多睡多病, 其心懈怠. 或卒起精進, 後便休廢. 生於不信, 多疑多慮. 或捨本勝行, 更修雜業. 若著世事種種牽纏. 亦能使人得諸三昧少分相似. 皆是外道所得, 非眞三昧. 或復令人若一日若二日若三日乃至七日住於定中, 得自然香美飮食, 身心適悅, 不飢不渴, 使人愛著. 或亦令人食無分齊, 乍多乍少, 顔色變異. 以是義故. 行者常應智慧觀察, 勿令此心墮於邪網. 當勤正念, 不取不著, 則能遠離是諸業障. 應知外道所有三昧, 皆不離見愛我慢之心. 貧著世間名利恭敬故. 眞如三昧者, 不住見相, 不住得相. 乃至出定, 亦無懈慢. 所有煩惱, 漸漸微薄. 若諸凡夫不習此三昧法, 得入如來種性, 無有是處. 以修世間諸禪三昧, 多起味著, 依於我見, 繫屬三界, 與外道共. 若離善知識所護, 則起外道見故.〕
【소】
두 번째는 널리 풀이하는 것이다. 이 중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마구니 일의 차별을 널리 나타내었고, ‘이러하기 때문에’이하는 두 번째 그 대치함을 밝힌 것이며, ‘외도가 가지는 삼매는ㆍㆍㆍㆍㆍㆍ, 알아야 한다’이하는 세 번째 진위(眞僞)를 간별한 것이다. 처음 중에서는 곧 다섯 쌍의 열 가지 일을 밝혔다. 첫째는 형상을 나타내는 것과 설법하는 것으로 쌍이 되며, 둘째는 신통(神通)을 얻는 것과 변재를 일으키는 것으로 쌍이 되는 것이니, ‘혹 사람들로 하여금’으로부터 ‘명리의 일을 탐착(貪着)하게 한다’는 데까지를 말한다. 세 번째는 의혹을 일으키는 것과 업을 짓는 것으로 쌍이 되니, ‘또한 사람들에게’로부터 이하 ‘갖가지로 끄달리게 한다’는 데까지를 말한다. 네 번째는 정(定)에 드는 것과 선(禪)을 얻는 것으로 쌍이 되니, ‘또한 사람들에게’로부터 이하 ‘사람들이 거기에 애착하게 한다’는 데까지를 말한다. 다섯 번째는 음식의 차이와 안색의 변화로 쌍이 되는 것이니, 글에서 볼 수 있을 있을 것이다.
〔第二廣釋, 於中有三. 一者廣顯魔事差別. 以是義故以下, 第二明其對治. 應知外道以下, 第三簡別眞僞. 初中卽明五雙十 事. 一者現形說法爲雙. 二者得通起辯爲雙. 謂從或令人以下, 乃至名利之事也. 三者起惑作業爲雙. 謂又令使人以下, 乃至種種牽纏也. 四者入定得禪爲雙. 謂從亦能使以下, 乃至使人愛著也. 五者食差顔變爲雙. 文處可見也.〕

묻기를 “보살상 등의 경계를 보는 것 같은 것은 혹은 숙세(宿世)의 선근에 의하여 일어나기도 한 것이니, 어떻게 간별하여 그 사정(邪正)을 판단하겠는가?” 답하기를 “실로 이런 일이 있으니 신중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모든 마구니가 만드는 상(相)을 보고 이를 좋은 상이라 여겨서 기쁜 마음으로 집착한다면 이러한 거짓되고 편벽됨에 의하여 병을 얻어 발광할 것이며, 만약 선근으로 나타난 경계를 얻고서 이를 마구니의 일이라고 여겨 마음으로 의심하여 떨쳐버린다면 곧 좋은 이득을 잃게 되어 끝내 나아감이 없을 것이니, 그 사정(邪正)을 실로 구별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세 가지 방법으로 시험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니, 어떤 일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정(定)으로 연마하는 것이요 둘째는 본래 닦던 것에 의하여 다스리는 것이며, 셋째는 지혜로 관찰하는 것이다. 이는 경에서 ‘진금(眞金)을 알려면 세 가지 방법으로 시험해야 하니, 태워 보는 것과 두들겨 보는 것과 갈아 보는 것을 말한다. 수행하는 이도 또한 그러하여 분별해서 알기 어려운 것이니, 만약 분별하려면 또한 반드시 세 가지로 시험해야 할 것이다. 첫째는 더불어 일을 같이 해야 하며 일을 같이 하여도 알지 못하면 더불어 오래도록 함께 거처하며, 함께 거처하여도 알지 못하면 지혜로 관찰하는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이제 이러한 뜻을 빌어서 사정(邪正)을 시험하는 것이니, 다음과 같다. 만약 정(定)중에 경계상이 일어날 때에 사ㆍ정을 알기 어려우면 마땅히 깊이 정심(定心)에 들어가 저 경계상 가운데에서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아니하며 다만 평등히 정(定)에 머물러야 하는 것이니, 만약 이것이 선근에서 나온 것이라면 정력(定力)이 더욱 깊어져서 선근이 더욱 일어날 것이나, 만약 마구니의 짓이라면 오래지 않아 그 경계가 절로 무너질 것이다. 두 번째 본래 닦던 것에 의하여 다스린다는 것은 우선 만약 본래 부정관선(不淨觀禪)을 닦고 있었다면 이제 곧 본래대로 부정관을 닦는 것이니, 만약 이와 같이 닦아서 경계가 더욱 밝아진다면 이는 거짓이 아니고 만약 본래 닦던 것으로 다스려서 점점 경계가 없어진다면 이는 거짓된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세 번째 지혜로 관찰한다는 것은 나타난 상을 관찰하여 근원을 추구해 보면 나는 것(生處)을 보지 못하니 공적(空寂)함을 깊이 알아 마음이 그에 머물러 집착하지 않으면 거짓된 것이 응당 스스로 없어지고 바른 것이 응당 스스로 나타날 것이다. 이는 마치 진금(眞金)을 태움에 그 빛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니 가짜라면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 중에 정(定)은 마(磨)에 비유하고 본(本)은 타(打)와 같으며 지혜관찰은 불로 태우는 것과 같으니, 이 세 가지로 시험하면 사(邪)와 정(定)을 알 수 있을 것이다.”
〔問. 如見菩薩像等境界. 或因宿世善根所發. 云何簡別, 判其邪正. 解云. 實有是事. 不可不愼. 所以然者. 若見諸魔所爲之相, 謂是善相, 悅心取著, 則因此邪僻, 得病發狂. 若得善根所發之境, 謂是魔事, 心疑捨離, 卽退失善利, 終無進趣. 而其邪正實難取別. 故以三法驗之可知. 何事爲三. 一以定硏磨. 二依本修治. 三智慧觀察. 如經言. 欲知眞金, 三法試之. 謂燒, 打, 磨, 行人亦爾. 難可別識. 若欲別之. 亦須三試. 一則當與共事. 共事不知, 當與久共處. 共處不知, 智慧觀察. 今籍此意以驗邪正. 謂如定中境相發時邪正難了者. 應當深入定心. 於彼境中不取不捨. 但平等定住. 若是善根之所發者, 定力逾深, 善根彌發. 若磨所爲, 不久自壞. 第二依本修治者. 且如本修不淨觀禪. 令則依本修不淨觀. 若如是修境界增明者, 則非僞也. 若以本修治漸漸壞滅者, 當知是邪也. 第三智慧觀察者. 觀所發相, 推驗根原, 不見生處. 深知空寂, 心不住著. 邪當自滅. 正當自現. 如燒眞金, 其光自若. 是僞不爾. 此中定譬於磨. 本猶於打. 智慧觀察類以火燒. 以此三驗, 邪正可知也.〕

묻기를 “ 만약 마구니가 내 마음에 정(定)을 얻게 한다면 그 정(定)의 사정(邪正)을 어떻게 간별하는가?” 답하기를, “이러한 곳은 미세하여 매우 알기 어렵다. 우선 선현(先賢)의 설에 의하여 대략 사정(邪正)의 갈림길을 보여 주겠다. 앞서 말한 아홉 가지의 심주문(心住門)에 의하여 차례대로 수습하여 아홉 번째에 이르렀을 때에 사지(四肢)와 몸체가 움찔움찔 움직임을 느낄 것이니, 이렇게 막 움직일 때에 곧 그 몸이 구름과 같고 그림자와 같아서 있는 듯도 하고 없는 듯도 함을 느끼되 혹은 위로부터 나오고 혹은 아래로부터 나오며 혹은 옆구리로부터 나와 미미하게 몸에 두루한다. 이처럼 동촉(動觸)이 일어날 때에 공덕이 한량없는 것이니, 대략 말하자면 열 가지 사이 있다. 첫째는 정정(靜定:고요한 선정)이요, 둘째는 공허(空虛)요, 셋째는 광정(光淨)이요, 넷째는 희열(喜悅)이요, 다섯 번째는 아락(?樂:잔잔한 즐거움)이요, 여섯 번째는 선한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요, 일곱째는 지견(知見)이 명료한 것이요, 여덟째는 모든 누박(累縛)이 없는 것이요, 아홉째는 그 마음이 고르고 부드러운 것이요, 열째는 경계가 앞에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열 가지 법이 움직임과 더불어 함께 나는 것이니 만약 자세히 분별한다면 다 분별하기 어렵다. 이 일이 지난 후 다시 여촉(餘觸)이 차례로 나타나니, 여촉이라 하는 것은 대략 여덟 가지가 있다. 첫째는 동(動)이요, 둘째는 양(痒:가려움)이요, 셋째는 량(?:서늘함)이요, 넷째는 난(暖:따뜻함)이요, 다섯째는 경(輕:가벼움)이요, 여섯째는 중(重:무거움)이요, 일곱째는 삽(?:껄끄러움)이요, 여덟째는 활(滑:매끄러움)이다. 그러나 이 팔촉(八觸)은 반드시 함께 일어나지는 않으며, 어떤 때는 다만 두세 촉만 일어나는 경우도 있다. 일어날 때에도 또한 일정한 차례가 없지만 흔히 처음에는 동촉을 일으킨다. 이들은 추(?)에 의하여 정정상(正定相)을 나타내는 것이다.
〔問. 若魔能令我心得定. 定之邪正, 如何簡別. 解云. 此處微細, 甚難可知. 且依先賢之說, 略示邪正之岐. 依如前說九種心住門次第修習. 至第九時, 覺其支體運運而動. 當動之時, 卽覺其身如雲如影, 若有若無. 或從上發. 或從腰發. 微微?身. 動觸發時, 功德無量. 略而說之, 有十種相. 一靜定. 二空虛. 三光淨. 四喜悅. 五?樂. 六善心生起. 七知見明了. 八無諸累縛. 九其心調柔. 十境界現前. 如是十法, 與動俱生. 若具分別, 則難可盡. 此事皆過, 復有餘觸次第而發. 言餘觸者, 略有八種. 一動. 二痒. 三?. 四暖. 五輕. 六重. 七?. 八滑. 然此八觸, 未必具起. 或有但發二三觸者. 發時亦無定次. 然多初發動觸. 此是依?顯正定相.〕

다음엔 사상(邪相)을 분별하였다. 사상에 대략 십쌍(十雙)을 내니, 첫째는 증감(增減)이요, 둘째는 정란(定亂)이요, 셋째는 공유(空有)요, 넷째는 명암(明闇)이요, 다섯째는 우희(憂喜)요, 여섯째는 고락(苦樂)이요, 일곱째는 선악(善惡)이요, 여덟째는 우지(遇智)요, 아홉째는 탈박(脫縛)이요, 열 번째는 강유(强柔)이다. 첫째 증감이란 동촉(動觸)이 일어날 때 혹 몸이 움직이고 손이 들려지며 다리도 따라서 움직이지만 바깥사람은 그가 가만히 있어 마치 잠자는 듯함을 보며, 혹은 귀신이 붙은 것처럼 몸과 손과 발이 어지럽게 움직이니, 이는 증상(增相)이다. 만약 그 동촉이 일어날 때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하다가 몸에 미처 두루하기 전에 곧 없어지니 이로 인하여 경계의 상을 모두 잃으며, 앉았을 때 맥이 없어 몸을 지탱할 법이 없으니, 이는 감상(減相)이다. 둘째 정란이란 동촉이 일어날 때 식심(識心)과 몸이 정(定)에 얽매여 자재하게 되지 못하며, 혹은 다시 이로 인하여 곧 사정(邪定)에 들어가서 이레(七日)까지 이르니 이는 정(定)의 허물이요, 만약 동촉이 일어날 때 심의(心意)가 어지럽게 일어나 나머지 다른 경계를 반연하다면 이는 난(亂)의 허물이다. 셋째 공유란 동촉이 일어날 때 도무지 몸을 보지 못하여 공정(空定)을 증득했다고 여기는 것이니 이는 공(空)의 허물이요, 만약 동촉이 일어날 때 몸의 견실함이 마치 목석과 같음을 느낀다면 이는 유(有)의 허물이다. 넷째 명암이란 동촉이 일어날 때 바깥의 여러 가지 빛깔과 내지 일월성신을 보는 것은 이것이 명(明)의 허물이요, 만약 동촉이 일어날 때 몸과 마음이 암매(闇昧)함이 마치 어두운 방에 들어간 것과 같다면 이는 암(闇)의 허물이다. 다섯째 우희란 동촉이 일어날 때 그 마음이 몹시 번뇌하여 시달려서 기뻐하지 아니하니 이는 우(憂)의 과실이요, 만약 동촉이 일어날 때 마음이 뛸 듯이 크게 기뻐서 스스로 안정될 없다면 이는 희(喜)의 과실이다. 여섯째 고락이란 동촉이 일어날 때 몸의 지체가 곳곳마다 몹시 괴로움을 느끼는 것이니 이는 고(苦)의 과실이요, 만약 동촉이 일어날 때에 크게 쾌락됨을 알아서 탐착하고 얽매인다면 이는 낙(樂)의 과실이다. 일곱째 선악이란 동촉이 일어날 때 밖의 산선(散善)을 생각하여 삼매를 파괴하는 것이니 이는 선의 허물이요, 만약 동촉이 일어날 때 심식(心識)이 미혹하여 아는 바가 없는 것이니 이는 우(愚)의 허물이요, 만약 동촉이 일어날 때 지견(知見)이 밝고 예리하여 마음에 거짓된 깨달음을 낸다면 이는 지(智)의 허물이다. 아홉째 박탈이란 혹 오개(五蓋)와 모든 번뇌가 심식을 덮어 장애하는 것이니 이는 박(縛)의 허물이요, 혹은 공(空)을 증득하여 과(果)를 얻었다고 여겨서 증상만(增上慢)을 낸다면 이는 탈(脫)의 허물이다. 열 번째 강유란 동촉이 일어날 때 그 몸의 억세고 강함이 마치 와석(瓦石)과 같아서 회전하기 어려우니 이는 강(强)의 과실이요, 만약 동촉이 일어날 때 심지(心志)가 연약하여 무너지기 쉬운 것이 마치 (진흙이) 연악(軟渥:부드럽고 젖어있음)하여 그릇을 제대로 만들 수 없는 것과 같다면 이는 유(柔)의 과실이다.
〔次辨邪相. 邪相略出十雙. 一增減. 二定亂. 三空有. 四明闇. 五憂喜. 六苦樂. 七善惡. 八愚智. 九脫縛. 十强柔. 一增減者. 如動觸發時, 或身動手起, 脚亦隨動. 外人見其尤尤如睡. 或如著鬼. 身手足紛動. 此爲增相. 若其動觸發時. 若上若下. 未及?身. 卽便壞滅. 因此都失境界之相. 坐時蕭索. 無法持身. 此爲減相. 二定亂者. 動觸發時, 識心及身, 爲定所縛, 不得自在. 或復因次便入邪定, 乃至七日. 此是定過. 若動觸發時, 心意亂擧, 緣餘異境. 此爲亂過也. 三空有者. 觸發之時, 都不見身, 謂證空定. 是爲空過. 若觸發時, 覺身堅實, 猶如木石. 是爲有過也. 四明闇者. 觸發之時, 見外種種光色, 乃至日月星辰. 是爲明過. 若觸發時, 身心闇昧, 如入闇室. 是爲闇過也. 五憂喜者. 觸發之時, 其心熟惱憔悴不悅. 是爲憂失. 若觸發時, 心大踊悅, 不能自安. 是爲喜失也. 六苦樂者. 觸發之時, 覺身支體處處痛惱. 是爲苦失. 若觸發時, 知大快樂, 貪著纏縛. 是爲樂失也. 七善惡者. 觸發之時, 念外散善, 破壞三昧. 是爲善失. 若觸發時, 無?愧等諸惡心生. 是惡失也. 八愚智者. 觸發之時, 心識迷惑, 無所覺了. 是爲愚失. 若觸發時, 知見明利, 心生邪覺. 是爲智失也. 九縛脫者. 或有五蓋, 及諸煩惱, 覆障心識. 是爲縛失. 或謂證空得果, 生增上慢. 是爲脫失也. 十强柔者. 觸發之時, 其身剛强, 猶如瓦石, 難可?轉. 是爲强失. 若觸發時, 心志?弱, 易可敗壞, 猶如?渥, 不堪爲器. 是爲柔失也.〕

이 스무 가지 그릇된 정(定)의 법은 그것이 일어났을 경우 만약 식별하지 못하여 마음에 애착을 내면 그 때문에 혹은 정신을 잃고 미치며, 혹은 울기도 하고 혹은 웃기도 하며, 혹은 놀래어 멋대로 달아나며 어떤 때는 스스로 바위에 몸을 던지거나 불에 들어가려고 하며, 어떤 때는 병을 얻으며 혹은 그 때문에 죽기까지 한다. 다시 이처럼 하나의 사법(邪法)을 일으킬 경우 만약 아흔 다섯 종류의 외도 귀신법 중 하나의 귀신법과 상응하면서도 깨닫지 못한다면 이는 곧 저 외도를 생각하고 저 귀신법을 해아는 것이니, 이로 인하여 곧 귀신법 내에 들게 되고 귀신이 그 세력을 더해 주어 혹 모든 그릇된 정(定)과 모든 변재(辯才)를 일으켜 세간의 길흉을 알아서, 신통ㆍ기이하여 희유(稀有)한 일을 나타내어 뭇사람을 감동시키기도 한다. 세상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다만 그가 남과 다름을 보고 현성(賢聖)이라 여겨 마음 깊이 신복(信伏)하지만 그러나 그의 내심은 오로지 귀신법만 행하고 있으니, 이 사람은 성인의 법도를 멀리 여의어 몸이 괴멸되고 목숨이 끝날 때에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짐을 알아야 할 것이니, 이는 구십육 외도경(外道經)에서 널리 말한 것과 같다. 수행자가 만일 이러한 거짓된 모양을 깨달으면 앞의 방향으로 시험하여 다스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중에도 또한 옳고 그름이 있으니, 어떠한 것인가? 만약 그 그릇된 정(邪定)이 한결같이 마구니가 지은 것이라면 법으로 다스리는 것이니 마구니가 떠난 뒤에는 도무지 다시 털끝만큼의 선법(禪法)도 없는 것이다. 만약 내가 바른정(正定)에 들어갔을 때에 마구니가 그 가운데에 들어와서 여러 가지 거짓된 모양을 나타낸다면 법으로 물리쳐야 할 것이니 마구니의 삿된 장난이 이미 없어졌다면 곧 나의 정심(定心)이 맑아져서 마치 구름이 걷히고 해가 나타남과 같은 것이다. 만약 이러한 모양이 비록 마구니가 지은 것 같으면서도 법으로 다스려도 오히려 없어지지 않는다면 이는 자기의 죄장(罪障)으로 인하여 일어난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러하여 곧 대승의 참회를 부지런히 닦아야할 것이니, 죄가 없어진 후에 정(定)이 스스로 나타날 것이다. 이러한 장애의 모습은 매우 은미하여 구별하기 어려운 것이니, 도를 찾고자 하는 이는 알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다.” 우선 방론(放論)을 그치고 다시 본문을 해석하겠다.
〔此二十種邪定之法. 隨其所發. 若不識別, 心生愛著. 因或失心狂亂. 或哭或笑. 或驚漫走. 或時自欲投巖赴火. 或時得病. 或因致死. 又復隨有如是發一邪法, 若與九十五種外道鬼神法中一鬼神法相應, 而不覺者, 卽念彼道, 行於彼法, 因此便入鬼神法門. 鬼加其勢, 或發諸邪定, 及諸辯才. 知世吉凶, 神通奇異, 現希有事, 感動衆人. 世人無知, 但見異人, 謂是賢聖, 深心信伏. 然其內心專行鬼法. 當知是人遠離聖道, 身壞命終, 墮三惡趣. 如九十六外道經廣說. 行者若覺是等邪相, 應以前法驗而治之. 然於其中亦有是非. 何者. 若其邪定一向魔作者, 用法治之, 魔去之後, 則都無復毫釐禪法. 若我得入正定之時, 魔入其中現諸邪相者, 用法?之. 魔邪旣滅, 則我定心明淨, 猶如雲除日顯. 若此等相雖似魔作, 而用法治猶不去者, 當知因自罪障所發, 則應勤修大乘懺悔, 罪滅之後定當自顯. 此等障相甚微難別. 欲求道者不可不知. 且止?論. 遠釋本文.〕

위에서부터 마구니 짓의 차별상을 널리 분별하였으며, ‘이러하기 때문에’이하는 두 번째로 대치를 밝히는 것이다. ‘지혜로 관찰 한다’고 한 것은 자기의 분수에 따라 가지고 있는 각혜(覺慧)에 의하여 모든 마구니 짓을 보고 살펴서 다스리는 것이니, 만약 관찰하지 않으면 곧 사도(邪道)에 떨어지기 때문에 ‘사망(邪網)에 떨어지지 않게 한다’고 말한 것이다. 이는 앞서의 세 가지 시험 중 바로 세 번째 ‘지혜로 관찰함’이다. ‘마땅히 부지런히 정념(正念)하여 취착(取着)하지 아니하여야한다’고 한 것은 셋 중에서 앞의 두 버블 전체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이제 이 중에 대승지문(大乘止門)에서는 오직 이정(理定)만 닦는 것이며 다시 달리 나아가는 바가 없기 때문에 처음의 정(定)으로 연마하는 것과 아울러 본래 닦은 것에 의하는 것이요, 다시 다른 법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마땅히 본래 닦은 대승지문에 의하여 정념으로 머물라고 한 것이다. ‘취착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삿된 것이 정(正)을 범하지 못하여 저절로 불러가 없어지는 것이니, 만약 마음으로 취착하면 곧 정(正)을 버리고 사(邪)를 이룰 것이요, 만약 취착하지 않으면 사(邪)에 의하여 정(正)을 나타냄을 알아야 한다. 그러니 사정(邪正)의 나뉨은 요컨대 집착하는 것과 집착하지 않는 것에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집착하지 않는 이는 어떠한 장애이든 여의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이 모든 업장을 멀리 여의었다’고 하였다.
〔上來廣辨魔事差別. 以是已下, 第二明治. 言智慧觀察者. 依自隨分所有覺慧, 觀諸魔事察而治之. 若不觀察, 卽墮邪道. 故言勿令墮於邪網. 此是如前三種驗中, 正爲第三智慧觀察. 言當勤正念不取不著者. 總顯三中前之二法. 今於此中大乘止門, 唯修理定, 更無別趣. 故初定硏, 干依本修, 更無別法. 所以今說當依本修大乘止門正念而住. 不取不著者. 邪不干正自然退沒. 當知若心取著, 則棄正而成邪. 若不取著, 則因邪而顯正. 是知邪正之分, 要在著與不著. 不著之者, 無障不離. 故言遠離是諸業障也.〕

‘외도가 가진 삼매는ㆍㆍㆍㆍㆍㆍ 임을 알아야 한다.’이하는 세 번째 그 진위를 간별하는 것이니 이 중에 두 가지가 잇다. 처음은 안팎을 들어서 사정(邪正)을 분별하는 것이다. 먼저 것은 사(邪)요 뒤의 것은 정(正)이니, 글의 양상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모든 범부가......’이하는 다음으로 이(理)ㆍ 사(事)에 대하여 진위를 간별하는 것이며, 이 중에 처음은 이정(理定)이 참된 것임을 나타낸 것이다. 수행자는 진여삼매를 닦아야만 바야흐로 종성(種性)의 불튀위 중에 들어가는 것이며, 이 밖에는 불퇴위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다시 없기 때문에 ‘이 삼매를 익히지 않으면 여래(如來種性)에 들어 갈 수 없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종성의 자리에 두 가지 문이 있으니, 첫째는 십삼주문의 처음 종성주니, 종성이란 무시(無始)의 때로부터 있는 것이므로 닦아서 얻는 것이 아니며, 이 뜻은 《유가론》과 《지지론(地持論)》에 나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육종성문이니, 처음 습종성(習種性)과 다음에 성종성(性種性)이란 그 자리가 그 자리가 삼현(三賢)에 있는 것으로 습기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며, 이는 《본업경》과 《인왕경》에 나온다. 그 중 자세한 것은 《일도의(一道義)》중에서 널리 말한 것과 같다. 이제 이 중에 여래 종성이라고 한 것은 두 번째의 습종성 위(位)를 말한 것이다. ‘세간의 모든 선(禪)삼매를 닦으면’이하는 다음으로 사정(事定)의 거짓됨을 나타낸 것이니, 부정관과 수식관의 생각 등을 말하며 이들을 모두 ‘세간의 제삼매(諸三昧)’라 이름한다. 만약 사람이 진여삼매에 의하지 않고 다만 이러한 사삼매(事三昧)만을 닦는다면 들어가는 경계에 따라 취착을 여의지 못하는 것이며, 법(法:경계)을 취착하는 이는 반드시 나(我)를 집착하기 때문에 삼계(三界)에 속하여 외도와 더불어 같이하게 된다. 이는 《지도론(智道論)》에서, “제법(諸法)실상(實相) 그 밖의 모든 것은 다 마구니 짓이다”라고 한 것과 같으니, 바로 이를 말한 것이다. 위에서부터 세 번째 마구니 짓을 밝혀 마쳤다.
〔應知外道以下, 第三簡其眞僞. 於中有二. 初擧內外以別邪正. 先邪. 後正. 文相可知. 若諸以下, 次對理事以簡眞僞. 於中初顯理定是眞. 行者要修眞如三昧, 方入種性不退位中. 除此更無能入之道. 故言不習, 無有是處. 然種性之位有其二門. 二十三住門. 初種性住. 種性者, 無始來有, 非修所得. 義出瑜伽及地持論. 二六種性門. 初習種性. 次性種性者. 位在三賢. 因習所成. 出本業經及仁王經. 於中委悉, 如一道義中廣說也. 今此中言如來種性者, 說第二門習種性位也. 以修世間以下, 次顯事定之僞. 謂不淨觀安那槃念等, 皆名世間諸三昧也. 若人不依眞如三昧, 直修此等事三昧者, 隨所入境, 不離取著. 取著法者, 必著於我. 故屬三界, 與外道共也. 如智度論云. 諸法實相. 其餘一切皆是魔事. 此之謂也. 上來第三明魔事竟.〕

【논】
또한 정근(精勤)하여 전념으로 이 삼매를 수학(修學)하는 이는 현세(現世)에서 마땅히 열 가지 이익을 얻을 것이니,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 첫째는 항상 시방(十方)의 모든 부처와 보살에게 호념(護念)함을 입는 것이요, 둘째는 모든 마구니와 악귀에 의하여 혹란(惑亂)되지 않는 것이요, 셋째는 아흔 다섯 가지 외도와 귀신에 의하여 혹란(惑亂)되지 않는 것이요, 넷째는 깊고 미묘한 불법을 비방함에서 멀리 떠나 중죄(重罪)의 업장(業障)이 점점 엷어지는 것이요, 다섯째는 일체의 의심과 모든 나쁜 사고(思考)를 없애는 것이요, 여섯째는 여래의 경계에 대한 믿음이 증장되는 것이요, 일곱째는 근심과 후회를 멀리 여의어 생사 중에 용맹하여 겁내지 않는 것이요, 여덟째는 그 마음이 부드럽고 온화하여 교만을 버려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괴롭힘을 받지 않는 것이요, 아홉째는 비록 정(定)을 얻지 못하였으나 모든 때에 모든 경계처에 대하여 번뇌를 줄여서 세간을 즐기지 않는 것이요, 열째는 만일 삼매를 얻으면 외연(外緣)의 모든 소리에 의하여 놀라지 않게 되는 것이다.
〔復次精勤專心修學此三昧者, 現世當得十種利益. 云何爲十. 一者常爲十方諸佛菩薩之所護念. 二者不爲諸魔惡鬼所能恐怖. 三者不爲九十五種外道鬼神之所惑亂. 四者遠離誹謗甚深之法, 重罪業障漸漸微薄. 五者滅一切疑諸惡覺觀. 六者於如來境界信得增長. 七者遠離憂悔, 於生死中勇猛不怯. 八者其心柔和, 捨於?慢, 不爲他人所惱. 九者雖未得定, 於一切時一切境界處, 則能減損煩惱, 不樂世間. 十者若得三昧, 不爲外緣一切音聲之所驚動.〕

【소】
네 번째는 이익이다. 후세의 이익은 자세히 진술할 수 없기 때문에 여기서 현재의 이익만을 대략 나타내었다. 전체적으로 나타내고 각각 나타내었으니 글의 양상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지문(止門)을 따로 밝힘을 앞에서 마쳤다.
〔第四利益. 後世利益, 不可具陳. 故今略示現在利益. 總標. 別顯. 文相可知. 別明止門竟在於前.〕

【논】
만약 사람이 오직 지(止)만을 닦으면 곧 마음이 가라앉거나 혹은 게으름을 일으켜 여러 선을 즐기지 않고 대비를 멀리 여의게 되니, 이러므로 관(觀)을 닦는 것이다. 관(觀)을 닦아 익히는 이는 마땅히 모든 세간의 유위(有爲)의 법이 오래 머무름이 없어 잠깐 동안에 변하여 없어지며, 모든 마음의 작용이 생각 생각마다 생멸하기 때문에 이것이 고(苦)인 줄 알아야 하며, 과거에 생각한 모든 법이 어슴푸레하여 꿈과 같은 줄 알아야 하며, 현재 생각하는 모든 법이 번개와 같음을 알아야 하며, 미래에 생각할 모든 법이 마치 구름과 같아서 갑자기 일어나는 것임을 알아야 하며, 세가의 모든 몸뚱이가 모두 다 깨끗하지 못하고 갖가지로 더러워서 하나도 즐거워할 만한 것이 없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일체의 중생이 무시(無始)의 때로부터 모두 무명의 훈습한 바에 의하기 때문에 마음을 생멸케 하여 이미 모든 신심(身心)의 큰 고통을 받았으며, 현재에도 곧 한량없는 핍박이 있음, 미래에 받을 고통도 한계가 없어서 버리고 여의기가 어렵건마는 이를 깨닫지 못하니, 중생이 이처럼 매우 가련한 것임을 늘 생각해야 한다. 이러한 생각을 하고 곧 용맹스럽게 다음과 같이 대서원(大誓願)을 세워야 할 것이다. 즉 원컨대 내 마음으로 하여금 분별을 떠나게 함으로써 시방에 두루하여 일체의 모든 선한 공덕을 수행케 하며, 미래가 다하도록 한량없는 방편으로 일체의 고뇌하는 중생을 구원하여 그들에게 열반제일의 낙(第一義樂)을 얻도록 바라는 것이다. 이러한 원(願)을 일으키기 때문에 모든 때, 모든 곳에 있는 여러 선을 자기의 능력에 따라 버리지 않고 수학하여 마음에 게을리 함이 없으니, 오직 앉았을 때 지(止)에 전념하는 외에는 나머지 일체에서 다 행해야 할 것과 행하지 말아야 할 것을 관찰해야 할 것이다.
〔復次若人唯修於止, 則心沈沒. 或起懈怠, 不樂衆善, 遠離大悲. 是故修觀. 修習觀者. 當觀一切世間有爲之法, 無得久停, 須臾變壞. 一切心行, 念念生滅, 以是故苦. 應觀過去所念諸法, 恍惚如夢. 應觀現在所念諸法, 猶如電光. 應觀未來所念諸法, 猶如於雲忽爾而起. 應觀世間一切有身, 悉皆不淨, 種種穢汚, 無一可樂. 如是當念一切衆生, 從無始世來, 皆因無明所熏習故, 令心生滅, 已受一切身心大苦. 現在卽有無量逼迫. 未來所苦亦無分齋. 難捨難離, 而不覺知. 衆生如是, 甚爲可愍. 作此思惟, 卽應勇猛立大誓願, 願令我心離分別故, ?於十方修行一切諸善功德. 盡其未來, 以無量方便救拔一切苦惱衆生, 令得涅槃第一義樂. 以起如是願故, 於一切時一切處, 所有衆善, 隨已堪能, 不捨修學, 心無懈怠. 唯除坐時專念於止. 若餘一切, 悉當觀察應作不應作.〕
【소】
두 번째는 관(觀)을 밝히는 것이니, 이 중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관을 닦는 방법을 나타내었으며, 그 세 번째는 닦기를 권장함을 총결하였다. 두 번째 중에서 네 가지 관(觀)을 나타냈다. 첫째 법상관(法相觀)은 무상(無常)과 고(苦)와 유전(流轉)과 부정(不淨)을 말하는 것이니, 글의 양상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ㆍㆍㆍㆍㆍㆍ 생각해야한다’이하는 두 번째 대비관(大悲觀)을 밝히는 것이요, ‘이러한 생각을 하고’이하는 세 번째 서원관(誓願觀)을 밝히는 것이요, ‘이러한 원을 일으키기 때문에’이하는 네 번째 정진관(精進觀)을 밝히는 것이니, 이 네 가지 문에 의하여 관을 닦는 것을 대략 나타내었다. ‘오직 앉았을 때, ㆍㆍㆍㆍㆍㆍ외에는’이하는 세 번째로 닦기로 권장함을 총결한 것이다. 위에서부터 첫 번째로 지관(止觀)을 각기 밝혔다.
〔第二明觀. 於中有三. 初明修觀之意. 次顯修觀之法. 其第三者, 總結勸修. 第二之中, 顯四種觀. 一法相觀. 謂無常苦, 流轉, 不淨. 文相可知. 如是當念以下, 第二明大悲觀. 作是思惟以下, 第三誓願觀. 以起如是以下, 第四明精進觀. 依此四門, 略示修觀也. 唯除坐時以下, 第三總結勸修. 上來第一別明止觀.〕

【논】
행하거나 머물거나 눕거나 일어나거나 어느 때든지 모두 지관을 함께 행해야 할 것이니, 소위 비록 모든 법의 자성이 나지 않음을 생각하나, 또한 곧 인연으로 화합한 선악의 업과 고락 등의 과보가 빠뜨려지지도 않고 무너지지도 않음을 생각하며, 비록 인연의 선악의 업보를 생각하나 또한 곧 본성은 얻을 수 없음을 생각하는 것이다. 만약 지(止)를 닦으면 범부가 세간에 주착(住着)함을 대치하고 이승의 겁약(怯弱)한 소견을 버릴 수 있으며, 만일 관(觀)을 닦으면 이승(二乘)이 대비를 일으키지 아니하는 협렬심(狹劣心)의 허물을 대치하고, 범부가 선근을 닦지 않음을 멀리 여읜다. 이러한 뜻에 의하므로 이 지(止)ㆍ관(觀)ㆍ이문(二門)은 함께 같이 조성하여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니, 만약 지ㆍ관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곧 보리에 들어갈 수 있는 방도가 없을 것이다.
〔若行若住, 若臥若起. 皆應止觀俱行. 所謂雖念諸法自性不生, 而復卽念因緣和合, 善惡之業, 苦樂等報. 不失不壞. 雖念因緣善惡業報, 而亦卽念性不可得. 若修止者, 對治凡夫住著世間, 能捨二乘怯弱之見. 若修觀者, 對治二乘不起大悲狹劣心過, 遠離凡夫不修善根. 以此義故, 是止觀二門共相助成, 不相捨離. 若止觀不具, 則無能入菩提之道.〕

【소】
두 번째는 합하여 닦는 것이니, 이 주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함께 수행함을 전체적으로 나타내었고, 두 번째는 수행의 모양을 각기 밝혔으며, 세 번째는 총결하였다. 두 번째 중에 두 가지 뜻을 나타내었으니, 먼저는 이치에 따라 지관을 함께 수행함을 밝혔고, 뒤에서는 장애에 대하여 지관을 함께 수행함을 나타내었다. 처음 중에 ‘비록 모든 법의 자성이 나지 않음을 생각하나’라고 한 것은 비유문(非有門)에 의하여 지행(止行)을 닦는 것이요, ‘또한 곧 업과가 어긋나지 않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비무문(非無門)에 의하여 관행(觀行)을 닦는 것이다. 이는 실제를 움직이지 않은 채 모든 법을 건립함을 따르기 때문에 지행(止行)을 버리지 않고 관행(觀行)을 닦을 수 있는 것이니, 진실로 법이비록 유(有)가 아니지만 무(無)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다음에 ‘비록 선악의 업보를 생각하나 곧 본성은 얻을 수 없음을 생각한다’고 말한 것은 이것이 가명(假名)을 파괴하지 않은 채로 실상을 말함을 따르기 때문에 관행(觀行)을 그만두지 않고 지문(止門)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것이니, 그 법이 비록 없지 않으나 항상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지(止)를 닦으면’이하는 장애에 대하여 분별한 것이다. 만약 지를 닦는다면 두 가지 허물을 여의게 되니, 첫째는 바로 범부의 주착(住着)하는 고집을 제거하는 것으로 그가 집착한 인법상(人法相)을 없애는 것이요, 둘째는 겸하여 이승의 겁약한 소견을 다스리는 것으로 오음(五陰)이 있다고 보아 그 고통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만약 관(觀)을 닦는다면 또한 두 가지 허물을 여의게 되니, 첫째는 바로 이승의 협렬(狹劣)한 마음을 없애는 것으로 널리 중생을 살피어 대비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둘째는 겸하여 범부의 게으른 뜻을 다스리는 것이니 무상(無常)을 보지 아니하여 분별하여 도에 나아감을 게을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뜻에 의하므로’이하는 세 번째 지관(止觀)을 함RP 수행함을 총결하는 것이다. 첫째는 이치의 편벽됨이 없음을 따라 반드시 함께 행하여야 하는 것이고, 둘째는 곧 두 가지 장애를 아울러 대치하여 반드시 쌍으로 없애야 하는 것이니, 이 두 뜻이 서로 여의지 않기 때문에 ‘함께 서로 도아 이룬다’라고 말한 것이다 지와 관의 두 가지 수행이 원래 반드시 같이 이루어져야 함은 새의 양 날개와 같고 수레의 두 바퀴와 같은 것이니, 두 바퀴가 갖추어지지 않으면 곧 운재(運載)의 공능이 없을 것이고, 한 날개라도 없다면 어찌 허공을 나는 힘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지(止)와 관(觀)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곧 보리에 들어갈 수 있는 방도가 없다‘고 한 것이다. 수행신심분 중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사람을 들어 대의를 대략 마타내었고 둘째는 법에 의하여 수행의 모습을 널리 분별하였으니, 이 이단(二段)은 앞에서 마쳤다.
〔第二合修. 於中有三. 一總標俱行. 第二別明行相. 三者總結. 第二之中, 顯示二義. 先明順理俱行止觀. 後顯對障俱行止觀. 初中言雖念諸法自性不生者, 依非有門以修止行也. 而復卽念業果不失者, 依非無門以修觀行也. 此順不動實際建立諸法. 故能不捨止行而修觀行. 良由法雖非有而不墮無故也. 次言雖念善惡業報而卽念性不可得者, 此順不壞假名而說實相, 故能不廢觀行而入止門. 由其法雖不無而不常有故也. 若修以下, 對障分別. 若修止者, 離二種過. 一者正除凡夫住著之執, 遺彼所著人法相故. 二者兼治二乘怯弱之見, 見有五陰怖畏苦故. 若修觀者, 亦離二過. 一者正除二乘俠劣之心, 普觀衆生起大悲故. 二者兼治凡夫懈怠之意, 不觀無常懈怠發趣故. 以是義故以下, 第三總結俱行. 一則順理無偏必須俱行. 二卽?對二障必應雙遺. 以是二義不相捨離. 故言共相助成等也. 止觀二行旣必相成. 如鳥兩翼. 似車二輪. 二輪不具, 卽無運載之能. 一翼若闕, 何有翔空之勢. 故言止觀不具, 則無能入菩提之道也.
修行信心分中有三. 日子擧人略標大意. 二者就法廣辨行相. 此之二段竟在於前.〕

【논】
다음에 중생이 처음 이 법을 배워서 바른 믿음을 구하고자 하나 그 마음이 겁약하여,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머무름에 스스로 항상 諸佛을 만나 친히 받들어 공양하지 못할까 두려워한다. 그가 걱정하면서 말하기를 ‘신심은 성취하기가 어렵다’라고 하니, 뜻이 퇴전하려고 하는 이는 여래가 수승한 방편이 있어 신심을 섭호(攝護)함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는 뜻을 오로지하여 부처를 생각한 인연으로 원(願)에 따라 타방불토(他方佛土)에 나게 되어 항상 부처를 친히 보아서 영원히 악도(惡道)를 여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수다라에서 ‘만일 어떤 사람이 오로지 서방극락세계의 아미타불을 생각하여 그가 닦은 선근으로 회향하여 저 세계에 나기를 원구(願求)하면 곧 왕생하게 되며 늘 부처를 친히 보기 때문에 끝내 퇴전함이 없을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으니, 만약 저 부처의 진여법신을 관(觀)하여 항상 부지런히 수습하면 필경에 왕생하게 되어 정정(正定)에 머물기 때문이다.
〔復次衆生初學是法, 欲求正信, 其心怯弱. 以住於此娑婆世界, 自畏不能常値諸佛, 親承供養. 懼謂信心難可成就, 意欲退者. 當知如來有勝方便, 攝護信心. 謂以專意念佛因緣, 隨願得生他方佛土, 常見於佛, 永離惡道. 如修多羅說, 若人專念西方極樂世界阿彌陀佛, 所修善根廻向願求生彼世界, 卽得往生. 常見佛故, 終無有退. 若觀彼佛眞如法身, 常勤修習, 畢竟得生住正定故.〕

【소】
세 번째는 수행자의 퇴전하지 않는 방편을 보인 것이다. 이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는 처음 배우는 이가 물러나 떨어짐을 두려워하는 것을 밝혔고, 뒤에서는 퇴전하지 않는 방편을 나타내었다. 이 중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부처에게 수승한 방편이 있음을 밝혔고, 둘째는 수다라의 설을 따로 내었고, ‘만약ㆍㆍㆍㆍㆍㆍ 을 관하여’이하는 셋째로 경에서 말한 뜻을 풀이한 것이다. ‘만약 법신을 보면 필경에 왕생하게 된다’는 것은 십해(十解) 이상의 보살이 조금이나마 진여법신을 보게 됨으로써 필경에는 극락 세계에 왕생하게 됨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니, 이는 위의 신성취발심 중에서 ‘조금이라도 법신을 보게 되기 때문’이라고 한 것과 같으며, 이는 상사견(相似見)이라는 점에 의거한 것이다. 또한 초지(初地) 이상의 보살이 저 부처의 진여법신을 틀림없이 보기 때문에 ‘필경에 왕생하게 된다’고 말하니, 이는 《능가경》에서 용수보살을 찬탄하여 “환희지(歡喜地)를 증득하고 안락국(安樂國)에 왕생하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이 중에 《기신론》의 뜻은 위의 수준에 있는 사람을 들어서 필경 왕생함을 밝힌 것이지, 법신을 아직 보지 못하면 왕생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정정(正定)에 머문다’는 것은 통틀어 논하자면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견도(見道)이상을 이제 정정(正定)이라 하니 무루도(無漏道)에 의거하여 정정을 삼기 때문이요, 둘째는 십해 이상을 정정이라 하니 불퇴위에 머무는 것을 정정으로 삼기 때문이며, 셋째는 구품왕생을 모두 정정이라 하니 수승한 연(緣)의 힘에 의하여 퇴전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이 중 자세한 것은 《무량수경 요간(無量壽經 料簡)》 중에서 설한 것과 같다.
〔第三示修行者不退方便. 於中有二. 先明初學者畏退墮. 後示不退轉之方便. 此中有三. 一者明佛有勝方便. 二者別出脩多羅說. 若觀以下, 第三釋經所說意趣. 若觀法身畢竟得生者. 欲明十解以上菩薩, 得少分見眞如法身, 是故能得畢竟往生. 如上信成就發心中言以得少分見法身故, 此約相似見也. 又復初地已上菩薩, 證見彼佛眞如法身, 以之故言畢竟得生. 如?伽經歎龍樹菩薩云, 證得歡喜地. 往生安樂國故. 此中論意約上輩人明畢竟生. 非謂未見法身不得往生也. 住正定者, 通論有三. 一者見道以上方名正定, 約無漏道爲正定故. 二者十解以上名爲正定, 住不退位爲正定故. 三者九品往生皆名正定, 依勝緣力得不退故. 於中委悉, 如無量壽料簡中說.〕

△ 다섯 번째 권수분 가운데 글에 여섯 가지가 있다.
〔△第五勸修分中. 在文有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