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풍(禪風)

覺要(각요)

通達無我法者 2008. 3. 26. 10:20
 

 

 

覺要(각요)


覺(각)이란 心(심)의 根源(근원)으로 돌아감을 말함이며, 觀(관)을 方便(방편)으로 하여 一心(일심)이 壁(벽)너머에 있는 地(지)에 入住(입주)하는 것을 말한다.

覺(각)은 一心(일심)의 生滅(생멸)을 通(통)하며, 無(무)와 空(공)을 攀緣(반연)하고 있다. 空(공)은 다만 동그라미에 지나지 않고, 無(무)는 다만 箱子(상자)속에 지나지 않는다.

心(심)이 境界(경계)를 觸發(촉발)시켜 뚫지 못한다면, 그 反撥(반발)로서 一心(일심)의 울렁거림을 일으킬 것이며, 邪見(사견)을 招來(초래)하여 平常(평상)을 破(파)할 것이다. 가로되, 털과 뿔은 오동나무에도 있다.

心(심)이 境界(경계)를 두들겨 他通(타통)되지 못하면서 傷處(상처)를 입힌다면, 刹那(찰나)와 解消(해소)를 느낄 것이며, 是非空無是(시비공무시) 中(중)의 한 關門(관문)에 住着(주착)하게 될 것이다. 가로되 만가지 꽃이 흰색 아니면 검은색이다.

心(심)이 境界(경계)를 두들겨 他通(타통)되지 못하면서, 또다시 刹那(찰나)와 解消(해소)를 隨伴(수반)한다면 是非空無是(시비공무시) 중의 한 關門(관문)을 버리게 될 것이며, 平常(평상)이나 非平常(비평상)으로 나아가 絶壁(절벽)에 서거나 無心漢(무심한)이 될 것이다. 가로되, 오랑캐를 내세워 親舊(친구)를 逼迫(핍박)하도다.

覺(각)이 이도저도 아니고 다만 覺(각)이라면, 이는 道(도)를 눈치로 헤아리는 者(자)이며, 文字(문자)와 契合(계합)하는 오직 愚痴(우치)이다. 가로되 僧(승)은 菩提(보리)고개이고 農夫(농부)는 麥(맥)고개이다.

一心(일심)은 無作爲(무작위)로 變化(변화)하여 머무름이 없는 것이며, 入覺(입각)의 과정으로 觀(관)을 통하는 바, 觀(관)은 變移變化(변이변화)하는 一心(일심)을 拘束(구속)하는 것이며, 覺(각)은 變化(변화)하는 사이를 잡아내는 것이다.

一心(일심)의 터는 독립되고 大覺(대각)은 恒常(항상) 一心(일심)을 떠나서 있다. 터는 漏(루)가 끝난 것이어서 滅(멸)이며, 滅(멸)한 즉 十地(십지)를 俱足(구족)하고 體(체)를 형성하며, 常住(상주)하여 不動(부동)인 것이다. 터를 여읜 因(인)의 一心(일심)과 果(과)의 一心(일심)이, 是非(시비) 相殺(상살)하여 갈 곳을 잃어버렸을 때, 터에 함께 주저앉는 것이며, 터는 더이상 體發散(체발산)을 쉬는 것이다.

一心(일심)은 항상 터를 여의면서 斷切(단절)되고 있으며, 一心(일심)과 根源(근원)과는 一定(일정)한 間隔(간격)이 維持(유지)되는 바, 이것을 境界(경계)라 말하며, 壁(벽)이라 이름한다.

마음은 壁(벽)을 通過(통과)하면서 六門(육문)에 猛熱(맹렬)히 뛰어 놀되 一心(일심)을 벗어나지 못하며, 觀(관)이란 一心(일심)이 六門(육문)에 놀지 않고 壁(벽)을 固守(고수)하는 것이다.

黙照(묵조)속의 看話(간화)로 觀(관)이 이루어지거나, 看話(간화)속의 黙照(묵조)로 觀(관)이 이루어지거나, 觀(관)은 一心(일심)의 知(지)․不知(부지)를 떠나서 이루어지므로, 石壁(석벽)과 같이 超然(초연) 蕩沒(탕몰)하고 泰山(태산)과 같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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