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풍(禪風)

本有今無(본유금무)

通達無我法者 2008. 3. 26. 10:26
 

 

 

本有今無(본유금무)


本有今無(본유금무) 本無今有(본무금유)

本來(본래)는 있었는데 지금은 없고,

本來(본래)는 없었는데 지금은 있다.

● 黙然評(묵연평)

이는 두 가지 뜻이 있음이다.

眞性(진성)은 成住壞空(성주괴공)하지 않으므로 그 存在性(존재성)이 恒常(항상)하고, 有無中(유무중)이나 空非空(공비공)을 떠나 있으므로 恒常(항상)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본래 있음은 밀짚아래 까막까치라 눈아래 格(격)을 두고 있음이요, 지금 없음은 병든 아재비와 늙은 망아지라 化(화)하여 窓門(창문)을 흔들기 때문이다.

이는 實理(실리)라, 이와 같음이 한 뜻이다.

恒常(항상) 存在(존재)하는 그놈이 무엇이며, 어떻게 생긴 것인가? 즉 늘상 쓰는 이것은 무엇인가? 하는 意趣(의취)로 三昧(삼매), 三空(삼공), 三明(삼명)이라 말한다.

다시 말해, 본래 없음이란 강남떠난 제비라 照則用(조즉용)을 말함이고, 지금 있음은 花草(화초) 箱子(상자)와 四月(사월) 初八日(초파일)이라 一用(일용)이 顚倒(전도)됨을 말함이다.

이는 權事(권사)라, 이와 같음이 한 뜻이다.

和解(화해)하여 敎(교) 中(중)에 禪(선) 없음이 한 뜻이며, 禪(선) 중에 敎(교)없음이 한 뜻이다.

名字(명자) 外(외)에 名字(명자)를 選定(선정)하는 방금 前(전) 그놈이 非(비)라, 이 如是(여시)如是(여시)며,

名子(명자) 外(외)에 名子(명자)를 選定(선정)하는 방금 後(후) 그놈이 非(비)라, 이 如是(여시)如是(여시)다.

애닯도다! 어찌 함께하지 못함인가?

고로 가로되, 眞性(진성)에 대한 온갖 별다른 이름과 眞性(진성)에 대한 만가지 法門(법문)이 이와 같음을 벗어나지 못함이다.

묻기를, 네가 무엇을 알기에 그토록 말하는가?

가로되, 다만 蒼天(창천)이로다.

답하되, 아니다.

가로되, 그렇던가? 그러면 너는 무엇을 일러 眞性(진성)이라 하는가?

답하되, 不識(불식)이로다.

가로되, 하하! 낭패로다. 達磨(달마)가 오늘 목을 떨구도다.

또 가로되, 네가 무엇을 일러 眞性(진성)이라 하는가?

답하되, 不識(불식)이로다.

가로되, 네가 오로지 不識(불식)함이로다.

묻노니, 세존도 몰랐거늘 하물며 가섭에 傳(전)했으랴?

가로되, 그대가 어찌 그 뜻을 알겠는가? 들어보라!

세존이 이미 모름인댄 어찌 저토록 長廣舌(장광설)이었으며, 馬鳴(마명), 龍樹(용수)는 어찌 저토록 甲論乙駁(갑론을박) 하였겠는가?

그 뿐인가, 달마는 어찌하여 面壁(면벽)하였으며, 저 六祖(육조)와 五宗(오종)이 한결같이 입을 벌림은 또 무엇하려 함인가?

묻노니, 묘한 깨달음만 있음이로다.

가로되, 깨달음만 있지 말고 잡아라!

묻노니, 깨달은즉 없지 않으나 두 머리에 着(착)함이로다.

가로되, 쯧쯧! 그가 第二頭(제이두)는 고사하고, 第一頭(제일두)도 모름인대, 어찌 그를 따르겠는가? 비록 그렇다고 하나 그만 만족하라! 죽은 누렁새 청솔가지로다.

묻노니, 그렇다면 不識(불식)이란 무엇인가?

가로되, 그것은 오직 死句(사구)이나 뜻은 이러하다. 眞性(진성)은 心外心(심외심)이라 心(심)과의 관계가 끊어짐을 말함이며, 이로써 彼此(피차)가 형성되어 波羅蜜(바라밀)을 성립시키는 것이다.

心學(심학)의 初(초)는 無住(무주)를 쓰되 無住(무주)를 모르며, 本(본)할 바가 없음이며, 心學(심학)의 末(말)은 無住(무주)를 쓰고 無住(무주)도 알되, 本(본)할 바가 있음이다. 本(본)할 바란 常住(상주)하는 眞性(진성)인 것이며, 別有(별유)를 말하는 것이다.

묻노니, 諸佛祖師(제불조사)가 이미 如如(여여)라 하였거늘 어찌 달리 말하는가?

가로되, 내 말이 이미 法王(법왕)의 말인데, 어찌 틀림이 있겠는가? 愚跡(우적)이여! 오직 死句(사구)만 쫓는구나.

묻노니, 有無(유무)와 空非空(공비공)을 떠나 있음이란 무엇인가?

가로되, 眞性(진성)은 六識(육식)을 떠나 있음인데, 대개 參學(참학)하는 이가 六識(육식)의 떨림을 받거나, 六識(육식)으로 形相(형상)을 만들어서, 그것으로서 깨달음을 삼아, 有無空(유무공)을 결정하기 때문에 이를 破(파)하기 위함이다.

어떤 무리들은 몸뚱이를 眞性(진성)으로 삼는가 하면, 손을 더듬거려 찾지 못함을 주장하여 그만 回歸(회귀)하는 것을 宗旨(종지)로 삼는가 하면, 몽둥이로 어깨를 쳐서 그만 몽둥이 부러지는 것만 以心傳心(이심전심)으로 삼는 者(자)가 허다한지라, 날이 갈수록 文字(문자)가 氾濫(범람)하는 까닭이다.

어찌 모르는가? 세존이 空(공)이라 하였다가, 空(공)에 住着(주착)함에 다시 空(공)이 아니라 하였음을. 마찬가지니라, 無(무)도 아니고, 日用事(일용사)도 아니니라. 이는 오직 死句(사구)가 될 뿐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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