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풍(禪風)

心生滅(심생멸) 心眞如(심진여)

通達無我法者 2008. 3. 26. 10:25
 

 

 

心生滅(심생멸) 心眞如(심진여)


見聞覺知(견문각지)를 일러 心生滅(심생멸)이라

곧 死門(사문)의 門(문)이라고 할 것이며,

不見(불견) 不聞(불문) 不覺(불각) 不知(부지)를 일러 心眞如(심진여)라

이 곧 活門(활문)의 門(문)이라고 할 것이다.

저 燈芯草(등심초)에 새싹이 돋음이 이 心生滅(심생멸)이며, 저 장닭이 바위 속으로 들어감이 이 心眞如(심진여)이다. 大氣妙用(대기묘용)에 殺活縱奪(살활종탈)이란 것이 萌芽(맹아)를 잡고 燈芯草(등심초)를 주장함이며, 一松停(일송정)의 동백꽃은 저 장닭이 바위임을 證明(증명)함이다.

세겹 關門(관문)이란 것이 心生滅(심생멸)이며,

네겹 關門(관문)이란 것이 心眞如(심진여)이다.

和解(화해)하여 하나라 함은 杲木(고목)이 부채를 들고 얼굴을 가리는 짓거리다.

無時(무시) 以來(이래)로 一佛(일불)이 있어 主人(주인)이 됨에, 主佛(주불)은 黙然(묵연)이고 客佛(객불)은 騰騰(등등)이다. 저 黙然(묵연)이 一句(일구)가 되고, 저 騰騰(등등)이 三玄要(삼현요)가 됨에, 일러 가져올 수 없는 正玄(정현)은 스스로 寶藏(보장)이 되어, 이마팍에 도장을 필요치 않는다.

저 毘盧(비로)와 毘盧間(비로간)이 心眞如(심진여)이며, 저 釋迦(석가)와 迦葉間(가섭간)이 心生滅(심생멸)이라, 일러 主佛(주불)이 되고 客佛(객불)이 되는 까닭이다.

고로 가로되 契合(계합)은 毘盧(비로)의 일일지나,

家門(가문)과 無門印(무문인)은 사람의 일이로다.


   한때 이러한 文樣(문양)이 있었노라

一心非心(일심비심)


一心(일심)은 應(응)하여 諸佛(제불)과 衆生(중생)을 나투니 이는 一心(일심) 스스로 諸佛(제불)과 衆生(중생)을 가지고 있음이다.

一心(일심)은 化(화)하여 淸淨菩提(청정보리)하고 煩惱妄想(번뇌망상)하니, 이는 一心(일심) 스스로 菩提(보리)와 煩惱(번뇌)를 가지고 있음이다.

一心(일심)은 藏(장)하여 我(아)와 法(법)에 慧明(혜명)과 漆桶(칠통)을 나투니, 이는 一心(일심) 스스로 智慧(지혜)와 愚痴(우치)를 가지고 있음이다.

一心(일심)은 現(현)하여 문득 알고 문득 모른다 하니, 이는 一心(일심) 스스로 知(지)와 不知(부지)를 가지고 있음이다.

이와 같이 一心(일심)은 應化藏現(응화장현)하는 妙用(묘용)이 있다하니, 妙用(묘용) 즉 無明(무명)이다.

一心(일심)이 부처이면 衆生(중생)될 까닭이 없고, 이미 衆生(중생)인댄 어찌 부처가 되겠는가?

이러함에도 다시 부처가 되고 衆生(중생)이 된다하니, 이는 一心(일심)이 妄(망)이기 때문이다.

일심이 淸淨(청정)하면 煩惱(번뇌)할 수 없고, 이미 煩惱(번뇌)인댄 어찌 淸淨(청정)할 수가 있겠는가?

이러함에도 다시 淸淨(청정)하고 煩惱(번뇌)한다 하니, 이는 一心(일심)이 夢(몽)이기 때문이다.

一心(일심)이 愚痴(우치)이면 智慧(지혜)될 수가 없고, 이미 智慧(지혜)인댄 어찌 愚癡(우치)할 수 있겠는가?

이러함에도 다시 智慧(지혜)하고 愚痴(우치)하다 하니, 이는 一心(일심)이 假(가)이기 때문이다.

一心(일심)이 知(지)이면 不知(부지)될 수가 없고, 이미 모름인댄 어찌 앎이 될 수가 있겠는가?

이러함에도 다시 문득 알고 문득 모른다 하니, 이는 一心(일심)이 幻(환)이기 때문이다.

故(고)로 一心(일심)은 妄夢假幻(망몽가환)이라 非心(비심)이며, 一切(일체)는 非心(비심)이 짓고 造作(조작)하므로 一切非心造(일체비심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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