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행식 역부여시 受想行識亦復如是
ㅡ오해가 오해를 만들어 감
어떤 사내가 있었다. 이 사내는 매일 아침 조깅을 하는데 동네를 돌다 어떤 오래된 나무 쪽문에 한문으로 “多不有時” 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많고 아니고 있고 시간....”“시간은 있지만 많지 않다는 뜻인가?” “누가 이렇게 심오한 뜻을 문에 적어놨을까?”“이 글을 적은 분은 분명 학식이 풍부하고 인격이 고매하신 분 일거야. 오늘은 꼭 그 분을 만나봐야지.” 매일같이 그 앞을 지나던 사내는 그 글을 쓴 분이 궁금해서 작심을 하고 문을 두드려 보았다. 그러나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나오는 이도 없었다. 한참을 기다리니 옆집 대문에서 웬 런닝셔츠 차림의 할아버지가 나오셨다. “어이, 거기서 뭐하는 거야!” “아, 예, 여기 사시는 분을 좀 만나뵈려고요.” “엥, 거긴 아무도 안 살아.” “네? 이런, 사실은 이 한자성어를 적으신 분을 뵈려했는데.” “그거?, 그건 내가 적은 거야.” “네? 그러세요. 정말 뵙고 싶었습니다. 할아버님, 여기가 대체 무슨 문입니까?” “여기? 별거 없어. 화장실이야.” “네? 화장실이요? 여기가 화장실이라고요. 그럼 이 글의 뜻은 뭡니까?” “아, 이거? 참내, 다불유시(W.C)야. 多不有時.”
이 사내가 처음'多不有時'를 보고 궁금한 마음을 일으킨 것까지가 반야심경의'수, 상'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그 궁금증이 며칠 동안 계속되게 되는 과정을 겪습니다. 이 계속되는 생각의 연속을'행行'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이성을 보고 첫 눈에 마음에 들어 눈을 감아도 떠오르는 것이 바로 행의 작용입니다. 마음에 드는 물건을 찜해두고 돈이 마련되길 기다리는 것도 행의 작용입니다. 반야심경의 가르침은 행의 작용도 공하다 했으니 이 이치를 알면 마음의 조급함이나 집착이 지속되는 것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다시 차분히 생각해 보십시오, 공空이란 단순히 '있다','없다'의 차원을 훨씬 넘어선 말 아닙니까? 그래서 반복하여 주장하지만 우주의 법칙이기도 한 불법의 이치를 설명하며 벼룩의 간만한 '무'無자를 선택하여 밴댕이 소갈딱지 같은 어리석은 중생들에게 책잡힐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 당분간 성법스님 저서인 '마음 깨달음 그리고 반야심경'을 보내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