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禪)이야기·지묵스님

“자네라면 고양이를 살리겠는가?”/지묵스님

通達無我法者 2008. 12. 11. 21:21

 

 

“자네라면 고양이를 살리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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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전스님 회상에서였다. 동당과 서당 두 선방에서 고양이 때문에 다툼이 있었다. 이때 남전스님이 선방에 들어와서, 고양이 문제를 내었다.

“말하라. 그러면 고양이를 칼로 베지 않겠다. 만일 말하지 않는다면 내려치겠다.”

대중들에게 말을 던졌으나 모두 남전스님의 생각과 딱 들어맞지 못하였다. 순간, 고양이 몸뚱이 위에 칼을 내려쳐버렸다.

그 뒤에 조주스님이 출타하고 돌아와 남전스님께 인사를 올리러 갔을 때였다. 남전스님이 고양이 이야기를 꺼내고는 물었다.

“자네라면 고양이를 살리겠는가?”

조주스님이 머리에 신 한 짝을 쓰고 그냥 나가버렸다. 남전스님이 말하였다.

“그래, 자네가 있었다면 고양이가 살았을 걸세.”



우물쭈물 망설이다 벼랑으로 떨어진다

이것이 옳고 그르다는 시비에선

해답을 구할 수는 없지만

고개를 쳐들고 하늘 달을 쳐다보듯이

깨어 있어야 생명을 살린다



강설 : 참 이상하네. 고양이를 내려친 스님도 스님이거니와 머리에 지저분한 신을 쓰고 나간 그 스승에 그 제자. 왜 큰 스님네가 어린애 같은 연극을 연출하실까요.

“독자는 한 말씀하시라. 말씀을 한다면 이야기를 계속하려니와 그렇지 않는다면 여기서 이야기를 그만 두겠습니다.”

고양이 화두는 여러모로 뜻하는 바가 있다. 첫째는 살생을 금계로 삼는 불가에서 생긴 일이다. “왜 저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방편법의 고수는 불교냐 아니냐 하기 이전에 죽이고 살리고 하는 일상 평범한 생활을 한다. 마음의 본성은 불교 이전이나 불교 이후나 달라짐이 없듯이. 선의 세계를 신비하게 생각한다면 역주행(逆走行)이다.

단하스님이 등주(鄧州) 단하산(丹霞山)에서 이승을 하직할 때 일화이다. 86세 되던 해였다. 문인(門人)들에게 목욕시켜달라고 말하였다. 목욕을 다 마치고는 다시 갓을 쓰고 주장자를 짚으며 평소 나들이 하듯이 하게 해달라고 하였다. 이때 스님이 마지막 말을 하였다.

“자아, 이제 간다. 신을 신겨 주라.” 신을 신은 채 한 발을 내딛는 순간이다. 스님은 홀연 입적(入寂)을 하였다.

둘째는 시시비비를 금하는 선방에서 고양이 때문에 두 선방이 이러쿵저러쿵 다툰 것이다. 이상은 일상 유위법 세계의 일이다. 무위법에서는 신발을 머리에 쓰든 벗든 상관할 바가 아니다. 고양이를 죽이든 살리든 상관이 없으니 그 이유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이기 때문이다.

“한 생명을 살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화두가 이런 것임을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준 장면이다.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판단할 문제이다. 우물쭈물 망설이다가는 천길 발아래 벼랑으로 굴러 떨어지고 말 것이다. 이것이 옳고 저것이 그르다고 하는 시시비비 소리에서 해답을 구할 수는 없다.

다만, 고개를 떡 쳐들고 하늘 달을 보듯이 눈을 크게 뜨고 깨어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생명을 살리는 일은 어렵지 않다.

발아래에는 땅이 있고 머리 위에는 하늘이 있다. 생각을 유-턴 하시면 ‘하 하 하’ 웃으실 것이다. 속이는 말을 스승 남전스님이 해도 제자 조주스님은 넘어가지 않았다. 독자도 속이는 말에 넘어가면 안된다.

고양이 이야기가 깨어있는 조주 스님에게는 안 통하듯이 눈 푸른 사람에게는 이런 말까지 들을 것이다. “어리석소!”

지묵스님 / 장흥 보림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