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禪)이야기·지묵스님

조주 “지혜로운 사람은 열반 후 어디로 가나요”/지묵스님

通達無我法者 2008. 12. 11. 21:11

 

 

조주 “지혜로운 사람은 열반 후 어디로 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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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전 “산 앞마을 시줏집 물소로 태어날 거야”

조주스님이 스승 남전스님께 여쭈었다. “스님, 지혜로운 사람은 열반하신 뒤에 어디로 가실 것입니까?” 남전스님이 일렀다. “산 앞마을이지. 시주 집에서 물소로 태어날 거야!” 조주스님이 일렀다. “스님의 가르침에 감사합니다.” 남전스님이 일렀다. “어젯밤 삼경 달이 들창에 밝더라!”

강설 불교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반야의 지혜를 터득한 사람으로, 생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 윤회를 벗어난 사람이다. 세상에서는 누구를 보통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할까.

독일 한 연구소는 오랜 연구 결과 지혜로운 사람에게 몇 가지 공통점이 있음을 밝혀냈다. 첫째, 지혜로운 사람은 역경을 극복하면서 극한 상황을 경험하였다. 둘째, 지혜로운 사람은 가난을 경험하였다. 셋째, 지혜로운 사람은 인생의 어두운 면을 일찍 경험하였다.

서양 철학자 소크라테스를 평하는 경우이다. “소크라테스는 어떤 분입니까?”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어떤 면에서 그렇습니까?” “신념을 굽히는 일이 없어서지요.”

그렇다. 백 천 사람이 옳다고 해도 소크라테스는 신념에 없는 일을 끝까지 거부하는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용기도 용기려니와 인내력도 대단했다고 한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 여름날 아침에 한 생각에 빠져 다음날 새벽까지 꼬박 1박2일 동안 움쩍도 않고 서 있었다. 마치 철인의 모습을 보여준 듯했다.

이런 대인뿐만이 아니다. 우리 주변에도 이와 비슷한 예가 있다. 한 지혜로운 사람이 시골 닷새 장을 보러 가는 길이었다. 길가 솔밭에 들어가 바지를 내리고 소변을 보다가 홀연 한 생각에 빠졌다. 그는 소변을 보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해가 떨어질 때까지 그대로 서 있었다. 소설 같은 이야기나 실화이다. 삶의 진지한 탐구는 이렇게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게 하는 것이다. 하물며 명리(名利)를 떠났다고 자부하는 출가자에게 있어서랴.

살아서 죽도록 일하고 죽어서도 살코기를 남기는 소가 바로 지혜로운 사람이 다음 생에 바라는 바이다. 이보다 심하게 본생담에서는 육바라밀의 보시 정신으로 처자식까지 보시하는 보살이 나온다. 헌데, 이런 구도의 이야기는 한갓 탁상공론인가. 불교가 이 땅에 영원히 살아남기 위해서는 먼저 지혜로운 사람이 존경받고 어리석은 사람이 숨어들어가야 할 것이다.

산승은 미물 곤충 연구가의 이야기로 개미의 3:7제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처음 들어본 이야기지만 감동이 오래 남아있다. 정말 사람의 경우나 다름이 없다. 개미는 생활하면서 두 종류로 나눠진다. 일을 잘하는 부지런한 개미와 그렇지 않고 게으른 개미이다. 이 비율이 3:7로 일을 잘하는 쪽이 3이고 그렇지 않은 쪽이 7이다. 일을 잘하는 개미를 모아 새로운 A집단을 만든다. 이 집단은 100% 일을 잘하는 개미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모범 집단이다. 그래서 기대를 걸어보는 것이다. 모두가 일을 잘하고 지낼 것이라는 기대이다.

이들은 처음에는 일을 잘하다가 A 집단 역시 차츰 3:7제로 바뀐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의외로 두 종류로 나눠지기에 다시 일을 잘하는 A 집단의 3 그룹만을 모아 새로운 B 집단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다시 기대를 걸어보는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B 집단 역시 3:7제로 나눠져서 일을 잘하는 부지런한 개미와 그렇지 않은 게으른 개미의 비율이 처음처럼 3:7로 갈라졌다. 이것이 집단의 3:7제 원리이다.

산승은 이 이론이 사람에게도 적용된다는 사실을 알고 생각이 바뀌었다. 모두가 일을 잘하는 부지런한 사람으로 만들 수 없듯이 이 세상도 전체를 청정하게 할 수 없음을. 평범한 내용 같지만 화엄경에서 말하는 일심청정(一心淸淨)이면 법계청정(法界淸淨)이라는 법문이다. 수행을 통해 자기 마음이 청정해진다면 세상이 다 청정해지는 것이다.

결국 유턴(U-turn)을 하여 산승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가장 쉬운 진리라는 점을 알았다.

지묵스님 / 장흥 보림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