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禪)이야기·지묵스님

불을 ‘벌겋게 타는 불’로만 보지 말라/지묵스님

通達無我法者 2008. 12. 11. 21:14

 

 

불을 ‘벌겋게 타는 불’로만 보지 말라

조주어록 보기 ⑦


‘욕심의 불’ ‘성냄의 불’도 있으니…


조주스님이 스승 남전스님의 회상에서 지낼 때에 두어 가지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소임이 난로를 관리하는 노두(爐頭)였을 때의 일이다.

대중들은 운력으로 밭에서 채소를 뽑고 있었다. 조주스님이 홀연 승당 안쪽에서 외쳤다.

“불이야, 불이야!”

대중들이 일시에 승당 앞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조주스님이 승당의 출입문을 잠가버려서 대중들은 별 대책이 서지 않았다. 이때였다. 대중들이 승당 안으로 들어오도록 스승 남전스님이 창을 통해 열쇠를 던져주었다. 이때 조주스님이 승당의 출입문을 열어주었다.

강설 한편의 무대연극이다. 선사들은 각본도 없이 돌발상황을 잘도 연출하신다. 불이야, 하고 외치는 조주스님도 그렇고 잠가버린 문을 열도록 열쇠를 던져주는 스승 남전 스님의 연출도 그렇다. 불을 ‘벌겋게 타는 불’로만 보지 마시라. ‘욕심의 불’, ‘성냄의 불’도 있다.

요즘 우리 주위에서는 이런 일들을 좀체 보기 힘들다. 후학들에게 약발이 서지 않아서 스승들이 무대연극을 그만두신 것일까. 아니면 말세의 법이 쇠퇴해서 연극무대가 사라진 것일까.

무위법(無爲法)에 투철한 선사들에게는 일거수(一擧手) 일투족(一投足)이 다 법문인 것이다.

세계는 지금 타오르고 있다. 욕심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

“불이야, 불이야!”

비슷한 다른 한편의 이야기이다. 조주스님이 스승 남전스님의 회상에서 지낼 때의 일이다. 우물 누각에 올라가서 물을 한참 푸고 있었다. 이때 남전스님이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는 마치 물에 빠진 사람 모양으로 홀연 기둥을 껴안고 발을 대롱거린 채 말하였다. “사람 살려, 사람 살려!”

남전스님이 사다리를 딛고 올라서면서 말하였다. 수상 경찰 구조대가 호루라기를 부는 이치로써 말이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시간이 좀 지나서였다.

조주스님이 남전스님을 찾아뵙고는 구해 주심에 인사드리면서 말하였다. “조금 전에 화상께서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강설 활구(活句)의 진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평범하게 숫자를 세는 하나, 둘, 셋, 넷, 다섯이지만 눈푸른 사람의 말과 행동은 이렇게 활구이다. 말하자면, 쇠붙이를 황금덩이로 바꾸는 연금술이고 손에 무엇이나 닿기만 하면 황금덩이로 변하게 하는 도깨비 방망이가 바로 그것이다.

사랑하는 미인이 나무 아래로 지나간다고 하자. 이때 나무 위에서 사내가 외쳤다. “사람 살려, 사람 살려!”

미인이 나무 위의 사내를 보고 말한다. “무섭지 않아요. 그냥 내려와요!” 혹은 그냥 묵묵부답으로 미인이 가만히 지나가고 있다고 하자. 싱거운 장면이다. 이때 미인이 치마자락을 살짝 치켜 올리고 나무 위로 올라가려는 시늉을 지으며 말한다고 하자. “하나, 둘, 셋, 넷, 다섯.” 나무 위의 사내는 크게 만족해한다.

법문과 관련된 법륜(法輪)의 바퀴 이야기이다. 옛날에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혹은 등에 지고 다니는 시대에 바퀴는 대단한 발명품이었다. 수레바퀴를 이용해 슬슬 끌고 간 것을 본 사람은 모두가 놀랐던 것이다. 이와 같이 불교가 훌륭한 점을 수레바퀴에 비유한 것이 법륜(法輪)이다.

부처님의 법이 수레와 같다. 생사(生死) 윤회 가운데 떠도는 중생이 마음 한번 돌이켜서 사바생불(裟婆生佛)이 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생멸(生滅) 속에서 어떻게 불생불멸(不生不滅)이겠는가. 유(有)가 어떻게 무(無)이겠는가. 어떻게 보면 참선 하는 사람이 가장 욕심이 많은 사람이다. 참선만 잘하면 발원한 바가 모두 다 이뤄지기 때문이다.

마치 창을 열면 밤새 내린 흰 눈이 천지를 뒤덮고 있고 그 가운데 충천하는 청량한 기상이 가득 차있는 것과 비슷하다.

지묵스님 / 장흥 보림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