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스님이 여쭈었다. “진짜 법신불(法身佛)은 어떤 것입니까?”
조주스님이 이르셨다. “법신불이 이제 와서 무엇을 의심하는가?”
한 스님이 여쭈었다.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심지(心地)법문이란 게 무엇입니까?”
조주스님이 이르셨다. “고금의 입춘방(立春榜)!”
한 스님이 여쭈었다. “누가 손님 가운데서 주인인 사람입니까?”
조주스님이 이르셨다. 그럴 리가 없다는 뜻에서. “산승에게 내자(內子, 부인)를 묻지 말게!”
한 스님이 여쭈었다. “그럼, 누가 주인 가운데서 손님인 사람입니까?”
조주스님이 이르셨다. “노승에게는 장인 어르신이 안 계시지!”
강설 /
주객을 묻는 일은 요즘 잘 안 쓰는 표현법이다.
빈중주(賓中主, 손님 가운데 주인인 사람)는 학인이 선지식보다 우수한 경우이다.
주중빈(主中賓, 주인 가운데 손님인 사람)은 선지식이 학인을 가르칠 능력이 모자란 경우이다.
이와 같이 배우는 학인이 가르치는 선지식보다 우수한 경우를 두고 동산 스님은 비유로 말하였다.
“청산 복백운(靑山 覆白雲, 청산이 백운을 덮었느니라).”
임제종과 조동종은 차이를 보인다. 임제종에서는 앞서 경우처럼 주인으로 내세운 선지식과 손님으로 내세운 학인으로 표현한다.
한 스님 : 누가 손님 가운데 주인인가
조주스님 : 산승에게 내자를 묻지 말게
한 스님 : 그럼 누가 주인 가운데 손님인가
조주스님 : 노승에게는 장인어른이 안 계시지
선지식이 더 우수한가, 학인이 더 우수한가. 선문에서는 손님이 주인을 능가해야 가문이 날로 번창할 것이다.
스승은 제자가 자기를 딛고 올라서기를 기다리며 최대한으로 이용할 수 있을 만큼 이용해 쓰기를 바라고 있다.
조동종에서는 주인을 깨달음에 비유하고 손님을 미혹함에 비유해 쓴다.
산승이 한때 모신 불일암(佛日庵) 법정(法頂)스님의 경우이다.
대혜(大慧)스님의 <서장(書狀)>을 배울 때였다. 부엌에서 저녁 준비를 하다가 다실(茶室)로 올라간다. 손님이 저녁을 드시고 자고 갈지 어떨지 몰라서이다.
스님과 손님은 차를 마시면서 담소 중이다. 스님은 산승과 눈이 마주치자 곧 말씀하신다.
“오늘 밤 달이 참 밝겠다!”
이 경우는 손님이 저녁을 먹고 자고 간다는 신호이다.
“가만있자. 버스 막차 시간이 조금 남았네.”
이 경우는 저녁을 먹지 않고 곧 떠난다는 뜻이다.
말의 낙처(落處, 떨어지는 곳)를 알면 이런 표현법은 곧 익숙해져서 한 두 마디 말로도 통한다.
“달맞이 꽃이…”
“소몰이 새 소리가…”
산중에서 일어난 밤중의 일을 말하면 자고 간다는 뜻으로 통한다.
조주어록 본문 /
한 스님이 여쭈었다. “일체법이 상주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조주스님이 이르셨다. “노승은 조사 휘호(諱號)를 피하네!”
스님이 재차 물었다. “일체법이 상주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조주스님이 이르셨느니라. “오늘 시간은 이만하지!”
강설 /
조주스님은 상식적인 질문에 그만 입을 다물어버리신다.
일체법이 시방삼세에 상주하는가, 안하는가. 한다면 그건 무얼 말하는지 일러달라는 질문이다.
휘호(諱號, 웃사람의 이름자를 쓰지 않음)처럼 지금까지 교학에서 써온 상투적인 답변을 피하시겠다는 말씀. 가령 일상적인 말은 조석 예불문에서 볼 수 있다.
“시방삼세 제망찰해 상주일체…”
우리는 시방삼세 제망찰해 상주일체라는 남의 말에 속고 산다. 왜 멀쩡한 사람이 남의 말에 속고 사는가. 간절한 자기 내면의 소리를 들으려고 해야 하고 내면의 자기 빛깔을 보려고 해야 선(禪)의 정신을 이해한다.
지묵스님 / 장흥 보림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