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스님 “조주스님의 주인공은”
조주스님 “통테나 매주는 놈아”
학 인 “네”
조주스님 “통테도 제대로나 매봐”
조주 스님이 법상에서 이르셨다.
“형제 여러분, 그대들은 지금 제3생의 원수 테두리 안에 있기에 한마디 하겠노라. ‘구세대에 있었던 옛 습관은 고쳐도 좋으나 옛 사람의 마음은 바꾸지 말지니라!’
모두 개개인이 잘 알아서 출가했고 지금까지 무사하게 지내왔느니라. 그런데 새삼스럽게, 선(禪)이 무엇입니까? 하고 묻고 도(道)가 어떤 것입니까?, 하고 몰려와 떼지어 물으니 이것은 마치 선(禪) 빚쟁이에게 빚 받으러 온 것 같고 도(道) 빚쟁이에게 빚 받으러 온 것 같은 거야!
그대들이 노승을 선지식이라고 부르기에 노승 역시 그대들과 똑같은 고역고문이야! 노승은 그런 선지식이란 말씨가 좋지 않느니라.
단지 옛 사람에게 누를 끼칠까 싶어 짐짓 동도서설(東道西說=횡설수설)하였네!”
강설 / 옛사람이 수행자를 보는 방법이다.
“수행자의 정지견(正知見), 바른 견해(見解)만을 보라. 수행자의 언행은 그 다음 문제.”
깨달음의 문제에서는 바른 견해가 초점이다. 그 사람의 말하고 차를 마시고 잠자고 하는 평상 습관은 다음 문제이다. 왜 그럴까? 근본 뿌리를 높이 사고 잎과 가지를 다음으로 보기 때문이다. 옛사람, 선대의 선지식은 바꿀 필요가 없다. 도를 묻는 어수선한 태도만을 바꿔라. 물을 것만을 묻고 시시한 것은 거둬들여라. 복(福)이 중생의 삼생의 원수란 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생은 복을 짓느라고 마음공부를 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복을 짓는 자체가 중생의 원수이다.
둘째 생은 복을 받느라고 마음공부를 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복을 받는 자체가 중생의 원수이다.
셋째 생은 복이 다해서 마음공부를 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복이 다 한 자체가 중생의 원수이다.
한 스님이 여쭈었다.
“하루 24시간을 어떻게 마음 써야 할까요?”
조주 스님이 이르셨다.
“허참, 24시간이 너를 끌고 다니는구나. 노승은 24시간을 끌고 다니지. 묻는 이 말도 어느 쪽 시간인가?”
강설 / 세상을 살아가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무대의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객석의 관객으로 살아가는 길이다. 금생(今生)의 연극은 단 한 번에 끝나는 단막극.
조주 스님처럼 무대의 감독이자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날마다 대자유인의 삶인 것이다.
한 스님이 여쭈었다. “조주 스님의 주인공은 무엇입니까?”
조주 스님이 할(喝)을 하면서 이르셨느니라.
“이, 통테나 매주고 다니는 통쟁이 놈아!”
이때 학인이 네! 하고 대답하였다.
조주 스님이 이르셨다.
“통테도 제대로나 매봐!”
강설 /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물을 것만 묻지만 공부를 못하는 사람은 묻지 않아도 되는 것을 묻는다.
선방에 왔으면 기본적인 질문은 젖혀두고 활구 참선자다운 기백이 넘치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예의이다. 아니면 성스러운 침묵을 하든지. 통테와 주인공은 무슨 연관이 있는가.
질문이 주인공인데 대답이 통테를 매주는 통쟁이라고 하는 것은 알쏭달쏭하다. 그러나 이것을 깊이 알면 곧 싱거워진다.
한 스님이 여쭈었다.
“무엇이 학인의 본분사입니까?”
조주 스님이 이르셨다.
“수요조산(樹搖鳥散) 바람에 나무가지가 흔들리자 새들이 흩어지고
어경수혼(魚驚水渾) 고기가 놀래어 헤엄치니 물이 흐려졌네.”
강설 / 일을 그르치는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려해도 오히려 뒷걸음질이다. 옛사람은 말한다.
“개구즉착(開口卽錯) 입을 열어 말하면 곧 그르치고 동념즉괴(動念卽乖) 한 생각이 동하면 곧 어긋난다.”
성철(性徹, 1912∼1993)스님은 말한다. “불성을 말하면 이미 불성을 등진다. 이래서 내가 평생 쏟아낸 말들은 모두가 다 거짓말인 것이다.”
지묵스님 / 장흥 보림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