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禪)이야기·지묵스님

“뜰 앞의 잣나무니라”/지묵스님

通達無我法者 2008. 12. 11. 21:41

 

 

“뜰 앞의 잣나무니라”

조주어록 보기 ⑫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은?”

위산스님이 서쪽에서 온 조사와 같이

“산승이 앉을 자리를 가져오게”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은?”

조주스님이 이르셨다

“뜰 앞의 잣나무니라”



조주스님이 법상에서 대중에게 이르셨다. “이 공부는 소위 초탈한 대도인이라 할지라도 이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해!

노승이 위산스님이 계신 위산에서 지낼 때였지. 한 스님이 위산스님께 여쭈었느니라.

‘여하시 조사서래의(如何是 祖師西來意,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위산스님이 이르셨느니라. 마치 서쪽에서 온 조사와 같이.

‘산승이 앉을 자리를 가져오시게!’

이 대목에서 소위 종사라면 이렇게 해야 좋다. 피하지 말고 본분사를 가지고 질문자에게 응하셔야 하는 거야!”

이때 한 스님이 조주스님께 여쭈었다. “여하시 조사서래의(如何是 祖師西來意,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조주스님이 이르셨다. “정전 백수자(庭前 栢樹子, 뜰 앞의 잣나무니라)!” “화상께서도 경계(境界)를 써서 응하지 마십시오!”

조주스님이 이르셨다. “산승은 경계를 써가면서 응하지 않느니라.” 스님이 조주스님께 다시 여쭈었다. “여하시 조사서래의(如何是 祖師西來意,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조주스님이 이르셨다. “정전 백수자(庭前栢樹子, 뜰 앞의 잣나무니라)!”

강설 /

경계는 손님이다. 주인이 아니라는 말이다. 문제의 핵심을 이리 피하여 돌리고 저리 피하여 돌리는 방법을, 경계를 가지고 응한다고 말한다.

눈푸른 사람은 전체가 주인이기 때문에 경계가 없으나 모르는 사람은 사바의 세계 어디를 가나 손님이기 때문에 도처의 경계를 만난다.

“왜 조주 스님은 뜰 앞의 잣나무라고 하셨을까?” 한번 의문에 빠져보자. 이것이 화두. 이 말씀을 지레짐작하여 경계라고 단정 지으면 열가지 화두 병 중의 하나에 걸린다.

“참 이상하네. 달마 스님이 서쪽으로 건너오신 까닭을 물음에, 뜰앞의 잣나무라고 하신 것은?”

화두 공부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은 일단 의문을 가지는 게 기본이다. 더 중요한 점은 기상이 없이 맥 빠진 사람 모양으로 가만히 의문을 일으켜 평생 그렇게 조용히 앉아있기를 즐기는 부류. 옛사람은 앉는 것을 종으로 삼는 병폐를 꾸짖는다. “이런 누에고치 부류는 때려 죽여도 살생죄가 되지 않는다.”



조주 어록 원문/

조주스님이 다시 말씀하셨느니라.

“노승의 90년 전 일이니라. 마조 대사의 회상에는 선지식으로 80분이 넘게 계셨지. 한분 한분이 저마다 일가(一家)를 이루신 분이시지!

요즘 번뇌의 가지 넝쿨에다 또 가지 넝쿨을 뻗게 만드는 어중이떠중이 법사하고는 다르니라.

애시 당초 부처님께 나아감에 때가 멀어 이렇게 한 세대 한 세대의 차이가 크구나!

남전스님만이 평소 하신 말씀이니라.

‘원력수생(願力受生)한 보살이 되어 수행할지니라.’

그대들의 생각은 어떤가? 이 가르침에 깨우침이 있는가?

요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겠느니라. 아직 삭도(削刀) 물이 채 마르지 않은 애송이들이 참새 새끼의 노란 부리를 가지고 짹짹거리는 데 말씀이야. 감히 네거리에 나와 법문이라고 한답시고 법문을 하고는 공양과 절을 받는 게 가관이야! 300명 혹은 500명 청법 대중 앞에서 큰소리를 치느니라.

‘산승은 선지식이고 그대들은 초심 학인이니 잘 들을지니라.’

이런 부류가 날뛰고 있느니라.”

강설 /

드디어 전선(戰船) 거북선 화구(火口)에서 불을 토해내는 모습이다. 100세 고령의 조주 스님이 함량 미달자 법사를 꾸짖어 사자후 하시는데 속이 다 후련하다. 세속 대중 영합주의를 요즘 말로 한다면 포퓰리즘.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 현상인가 본다. 오늘따라 조주 스님의 사자후가 그리워지는 건 산승만의 생각인가.

지묵스님 / 장흥 보림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