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의 축적된 성향으로 삽니다.
나라고 하는 자아가 사는 것이 아니고 과보의 힘이 굴러가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순간의 윤회입니다.
성격과 습관도 단지 원인과 결과에 의해서 일어나는 순간적인 마음의 흐름이며
여기에 자아는 없습니다.
마음은 매순간 일어나고 사라지면서
마음에 있는 종자가 다음 마음에 전해집니다.
그러나 지혜가 없으면 같은 마음이 지속되는 것으로 알아서
자아가 있다는 잘못된 견해가 생깁니다.
이런 견해는 자아를 강화하기 위한 온갖 수단을 동원하게 되므로
결국 괴로움 속에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없는 자아를 세우기 위해서 속고 산다는 것은 사실 억울하고 허망한 일입니다.
축적된 성향은 바뀌지 않습니다.
다만 수행의 알아차림을 통해서 조금씩 변화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오늘부터는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한문으로는 수념처(受念處)라고 합니다.
대념처경은 네 가지 대상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그래서 사념처 수행이라고도 합니다.
그 중에 첫째가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이고, 두 번째가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가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이고, 네 번째가 법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이렇게 해서 신, 수, 심, 법이라는 네 가지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을
사념처(四念處)라고 하고, 이상의 네 가지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이 바로 대념처경입니다.
부처님께서 수행을 이상 네 가지 대상으로 분류한 것은
네 가지 조건이 성숙되어야 비로소 완전한 수행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네 가지를 크게 나누면 사실은 정신과 물질입니다.
그런데 정신과 물질에 느낌과 법을 넣어서 네 가지로 구분한 것입니다.
이러한 분류는 이것이 깨달음으로 가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상의 네 가지 대상을 크게 나누면 정신과 물질인데
정신을 다시 더 세분화하면 느낌과 지각과 마음의 형성이라는 세 가지가 함께 있습니다.
이때의 정신은 오온에서 식이고 느낌과 지각과 마음의 형성이 바로 수, 상, 행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인 물질은 색입니다.
그래서 색, 수, 상, 행, 식을 오온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식은 아는 마음이고 수, 상, 행은 마음의 작용입니다.
마음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마음의 작용인 수, 상, 행이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식을 왕이라고 하고 수, 상, 행을 신하라고 합니다.
사념처에서는 마음의 작용인 수, 상, 행 중에서 느낌을 따로 떼어내어
하나의 염처인 수념처로 분류한 것은 느낌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느낌이 수행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오온이 작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신과 물질 두 가지만 작용하지 않고,
느낌과 지각과 마음의 형성이란 수, 상, 행이 함께 있습니다.
그 중에서 우리가 안다는 것은 마음과 함께 느낌이 항상 함께 한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가 여섯 가지 감각기관에서 정보를 받아들일 때 모두 아는 마음이 일어나는데
이때 반드시 느낌도 함께 일어납니다.
그래서 느낌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수행을 할 때 마음의 작용 중에서 느낌을 두드러지게 선택한 것은
모든 번뇌가 느낌으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처럼 우리가 안다는 것은 모두 느끼는 것이기 때문에 느낌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수행을 할 때에도 이러한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관념적인 수행에 머물지만
느낌을 알아차리면 실재하는 것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위빠사나 수행을 합니다.
그래서 무상, 고, 무아의 법을 볼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모든 것을 아신다는 것은 정신이 단지 정신에 그치지 않고
수, 상, 행이라는 마음의 작용이 함께 있다는 것을 아신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들 오온이 무더기로 모여서 작용한다는 것도 밝히셨습니다.
이러한 정신과 물질에 대한 분석이 있어서
비로소 우리가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열반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마음에 수, 상, 행이 함께 있다는 것은
부처님의 지혜로밖에 밝힐 수 없는 사실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부처님께서 밝히신 정신과 물질에 대한 분석은
온전하게 정신적 치유에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정신과 물질을 해체해서
과연 여기에 ‘나’ 라고 하는 것이 있는가를 알게 하기 위해서 분석하신 것입니다.
내가 없다는 무아를 알지 못하는 한, 영원히 갈애와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있다고 잘못 아는 정신을 치유하기 위해서 이런 분석을 하신 것입니다.
수행자가 느낌이 일어날 때 느낌으로 알아차리지 못하면 그 순간에 연기가 회전합니다.
그래서 갈애를 일으키고 집착을 하여 업을 형성합니다.
그러면 태어남이 있고 태어나면 반드시 늙음과 죽음이 뒤따릅니다.
그리고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느낌을 집착하고 있는 한은 한 생으로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윤회를 해야 합니다.
이러한 연기는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져 왔지만,
현재로부터 미래로 가는 중간지점이 바로 느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느낌을 어떻게 알아차리느냐가 바로 깨달음으로 가는 갈림길에 서 있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느낌은 항상 현재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몸과 마음에 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항상 현재를 알아차릴 뿐만 아니라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립니다.
이렇게 현재를 알아차린다는 것은
관념이 아닌 실재를 알아차리는 가장 중요한 조건입니다.
현재에 여기에 있는 대상을 알아차려야 번뇌가 침투하지 못해
청정한 상태가 유지되어 지혜를 얻습니다.
이러한 조건들의 중심에 항상 느낌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은
오온이 나의 것이 아니라는 무아를 아셔서
느낌에서 갈애를 일으키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느낌을 원인으로 갈애가 일어나지 않은 자리에
느낌의 소멸이 있어서 번뇌가 소멸하여 열반에 이릅니다.
이처럼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은 자리는 네란자라 강가가 아니고,
보리수나무 아래가 아니고,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지 않는 자리입니다.
바로 이 자리를 황금의자라고 합니다.
느낌을 바르게 알기 위해서는 12연기를 알아야 합니다.
느낌은 누가 만들어 준 것이 아닙니다.
과거의 무명을 원인으로 행이 일어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다시 행을 원인으로 식이 일어납니다.
식을 원인으로 정신과 물질이 일어납니다.
정신과 물질을 원인으로 육입이 일어납니다.
이때 육입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말합니다.
다시 육입을 원인으로 여섯 가지 감각대상과 부딪히는 접촉이 일어납니다.
다시 접촉을 원인으로 느낌이 일어납니다.
이처럼 느낌이 일어나기까지 모든 것이 원인과 결과로 일어나기 때문에
느낌은 누가 일으키도록 한 것이 아니고,
오직 원인과 결과에 의해 일어나는 현상만 있습니다.
그래서 느낌은 어디서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고 이러한 조건에 의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일어난 순간에 사라집니다.
이러한 진리를 알면 인간이 초월적 존재에 의해서 태어나지 않았고,
항상하지 않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느낌을 알아차려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느낌이 나의 느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원인으로 느낌이 일어났기 때문에
느낌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어난 느낌은 일어난 순간에 사라지는 무상(無常)이 있습니다.
그리고 일어난 순간에 사라지는 느낌은 괴로움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느낌을 통하여 무상과 고와 무아를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느낌을 알아차려서 느낌은 무상하고, 느낌은 괴로움이며,
느낌은 나의 느낌이 아니라고 알아야,
비로소 느낌을 원인으로 갈애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느낌을 원인으로 갈애가 일어나지 않으면
갈애를 원인으로 집착이 일어나지 않고,
다시 집착을 원인으로 업의 생성이 일어나지 않아 미래의 태어남이 없습니다.
태어남이 없기 때문에 죽음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느낌을 어떻게 알아차리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인간이 추구하는 부귀영화가 모두 느낌입니다.
사랑이 느낌이며 돈과 명예와 지위가 느낌입니다. 환난병고도 모두 느낌입니다.
과거를 후회하는 것도 느낌이며 미래에 대한 희망도 느낌입니다.
밥도 술도 담배도 느낌입니다.
선한 행위를 하는 것도 느낌이며, 선하지 못한 행위를 하는 것도 느낌입니다.
좋은 일도 좋은 느낌 때문에 계속하며, 나쁜 일도 나쁜 느낌을 좋아해서 계속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것이 느낌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이러한 느낌을 알아차리면 갈애가 일어나지 않고
단지 느낌으로 남아 있어서 번뇌가 생기지 않아 결국 해탈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감각적 욕망에 빠져서
무엇으로 태어날지 모르는 끊임없는 윤회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이것이 모두 느낌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과거의 즐거운 일을 기억하거나 괴로운 일을 기억합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죽었을 때 오랫동안 슬퍼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을 때 잊지 못하고 오랫동안 그리워합니다.
사랑하는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은 현재 실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재하지 않는 사람을 오랫동안 기억하여 슬퍼하거나 그리워하는 것은
과거의 느낌을 현재에 동일하게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으로 인해 괴로워하거나 그리워하는 것은
그 당시에 느꼈던 느낌을 현재에도 재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들이 모두 느낌과 지각과 마음의 형성에 의한 작용으로 일어납니다.
이때 이러한 느낌을 단지 느낌으로 알아차리면 이러한 괴로움이 일어나지 않지만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계속해서 과거의 느낌을 향유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어리석은 일을 하면서 산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느낌을 느낌으로 알아차리면 번뇌가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갈애를 일으켜 모든 번뇌의 씨앗이 됩니다.
느낌을 알아차리면 느낌이 일어나는 순간에 사라진다는 무상을 알아서 느낌에 구속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갈애를 일으켜 괴로움 속에서 살아야만 합니다.
느낌을 원인으로 갈애가 일어나는데
갈애는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가 있으며,
존재에 대한 갈애가 있고, 비존재에 대한 갈애가 일어납니다.
감각적 욕망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에 부딪히는 모든 것에 대하여 욕망으로 반응합니다.
이것이 바로 느낌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존재에 대한 갈애는 자신에 대해 더 좋은 것을 바라는 온갖 욕망으로 반응합니다.
이것이 바로 느낌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비존재에 대한 갈애는 이러한 욕망이 충족되지 않으면
자신을 비하하고 괴로워하면서 죽기를 마다하지 않는 욕망으로 반응합니다.
이것이 바로 느낌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비존재에 대한 갈애는 싫어하는 것을 좋아서 계속하는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느낌으로 인해 일어난 갈애는 느낌을 증폭시켜서 단순한 갈애로 그치지 않고
나타나는 모든 대상에 대해 끊임없이 집착을 합니다.
그래서 업을 생성하여 태어남을 피할 수 없게 합니다.
사실 태어남은 괴로움입니다.
태어나면 온갖 질병이 기다리고 있으며,
무한경쟁의 사회에서 약자는 늘 당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강자는 강자로서 만족하지 못하여 더 큰 괴로움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것이 모두 느낌이 일으킨 결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과정에
느낌이 아닌 것이 없다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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